영화감독 임권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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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임권택_세계를 감동시키다

예술가는 절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시대정신을 자신의 작품 속에 담아내는 것은, 예술가의 의무이기도 하다. 그리고 대중은 그 속에서 삶과 역사를 다시 바라보고, 공감하며, 자극 받는다. 그렇다면 임권택 감독이 45년 동안 만들어낸 100편의 영화는, 예술가의 책임을 다하려 최선을 다했던 어느 영화감독의 흔적이다. 스스로는<잡초>(73) 이전의 50편에 대해 "거짓말투성이의 영화들"이라고 박하게 평가하지만, 돌이켜본다면 그 영화들도 '영화감독 임권택'을 만드는 자양분이 되었다. 그 영화들이 없었다면 임권택 감독은 이후 그토록 진지하고 때로는 처절할 정도로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고 스스로를 반성하는 영화를 만들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낮과 밤을 경계로 세상이 바뀌던 시절을 살다 

 

올해로 75세인(기록엔 1936년생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 출생연도는 1934년이다) 임권택 감독은 현재 101번째 영화를 준비 중이다. ‘한지’에 대한 영화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다. 100번째 영화를 마치고 101번째 영화를 준비하는 노장 감독의 심정이 궁금하다. “지금도 (100번째, 101번째라는) 숫자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은 많지요. 그런데 그것도 그렇게 마음처럼 되는 일이 아니요. 누가 물어오면, 101번째 영화는 데뷔작이라 생각하고 만들었으면 한다는 얘기를 하지요.”

 

모든 영화감독이 그렇겠지만, 특히 임권택 감독에게 영화는 삶이고 삶은 곧 영화다. 그의 영화를 이야기할 때 흔히 언급하는 ‘인본주의’는 캐릭터가 아닌 ‘사람들’의 삶을 영화에 담으려는,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서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와 대화하고 과거를 돌아보며 질문을 던지려는 임권택 감독의 시도다. “내 영화의 주인공은 선인도 악인도 아니요. 선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들의 내부가 실제로 선한가에 대해서는 늘 의심스럽고. 악한 사람도 마찬가지고요. 일상을 살면서 주변을 보거나 나를 보면, 선을 지향하고 사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러나 적당히 나빠지기도 하고 선한 쪽에 서기도 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한쪽에 몰아넣고 생각하진 않아요.” 임권택 감독의 이러한 인간관은 한국 현대사의 질곡과 그의 삶이 만난 ‘상황’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그는 이른바 ‘좌익’ 집안에서 태어났다. <태백산맥>(94)에서 볼 수 있듯, 그 시절엔 낮과 밤을 경계로 세상이 바뀌었다. 임권택 감독은 그 시절을 직접 겪었다. 우익과 좌익이 세상을 양분하며 서로 죽고 죽이던 때. 그 안에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실종되었고, 이후 임권택 감독의 영화 인생은 선인도 악인도, 좌익도 우익도 아닌 ‘한 시대를 살았던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로 귀결된다.

 

 

전쟁통에 부산으로 가출, 군화 장사하다 먹고 살기 위해 영화판에 뛰어 들어 

 

해방과 전쟁이라는 격동기에 10대 시절을 보낸 임권택 감독은 가출해, 당시 임시수도가 있었던 부산으로 간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이 임권택 감독과 나눈 방대한 인터뷰인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에서, 임 감독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거기서 살 수가 없는 거요, 숨막혀서. (중략) 생활이 어려워지니까 자꾸 땅을 팔아먹는 거요. 올해는 얼마를 팔아먹고, 나중에는 논이 열 마지기도 안 남더라고요. 요거 2, 3년이면 완전히 끝장 나는 거요. 그렇다고 집안에 장사하는 사람도 없고. 그러니까 숨막히는 거요, 거기는. 거기에 빨치산 가족이라는 것이 얼마나 숨 졸이면서 살아야 하는 건지, 그 감시와 통제라는 건 정말 넌더리가 나지.”

 

임권택 감독은 부산에서 군화 장사를 하며 살아간다. 그때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55)이 큰 흥행을 기록했고, 임권택 감독에게 물건을 대주던 장사꾼들은 영화가 돈이 된다는 생각에 영화제작에 뛰어들었다. 그 인연으로 임권택 감독은 ‘영화판’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단지 먹고 살기 위해서였다. 그는 그 시절의 자신을 “내일을 걱정한 적이 없는 대책 없는 인간”이었다고 말한다. “스무 살 때는 노동판에서 매일 소주만, 그것도 낙동강 막소주만 마셨어요. 안주는 해삼이나 멍게 한 사발. 그게 떨어지면 김치 좀 달라고 해서 마시다가, 그것도 더 안 주면 소금에다 마셨죠. 수전증이 심해서 소주잔도 못 들 지경이었어요. 그러다가 소주 몇 잔 들어가면 괜찮아지고. 주량은 나도 몰라요. 돈이 없어 끝까지 못 마셨으니까.”

 



영화계에 들어왔을 때 그의 스승은 정창화 감독이었다. 임권택 감독은 제작부로 시작해 소품 담당을 거쳐 연출부가 되었고, 7년 정도의 도제 시스템을 거친 후 20대의 나이에 <두만강아 잘 있거라>(62)로 데뷔한다. 요즘 감독 지망생들에겐 ‘꿈에 그리던 데뷔’겠지만, 임권택 감독은 데뷔가 그렇게 반가운 것이 아니었다. 그 시절 임권택 감독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생계였기 때문이다.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엔 이런 구절이 있다. “나는 감독 데뷔하는 게 무서웠어요. 연출부 할 때야 그냥 지내면 되지만, 감독은 하다 망하면 아무도 돌아보지 않을 것 아니에요. 내 말이 잘 안 믿어지지요? 나는 그렇게 1960년대를 살아남은 감독이에요.” 흥행하지 않으면 도태되고 마는, 주문에 의해 어떤 장르든 찍어내듯 영화를 만들었던 시절. 그렇게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은 그에게 ‘천직’이 되었다. “…현장에서는 어쨌든 최선을 다하려고 바둥바둥 애를 썼으니까. 성공할 리가 없는 것을 하면서도 포기한 일은 없어. 최선을 다해보는 거요, 어떻든 간에. 그건 내가 자랑할 수 있어, 내가.”

 

 

군사 정권의 숨막히는 현실, 계속 영화를 만들었기에 그렇게 답답하진 않았어요 

 

임권택 감독은 그 변화를 감지하기 힘들 만큼 느리게, 하지만 꾸준히 비전을 발전시켰던 감독이다. 그의 필모그래피엔 어떤 뚜렷한 ‘전환점’이 될 만한 영화가 없다. 그러기에 임권택 감독의 영화를 이야기하며 ‘대표작’ 운운하는 건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가 만든 100편의 영화는 ‘전체’로서 의미가 있으며, 임권택 감독은 주어진 상황 속에서 나름대로 새로움을 추구하고 또 좌절하면서 현장을 지켰다. “나는 도약을 한 적이 없어요. 어떤 평론가는 내가 ‘바람이 부는 만큼 풀처럼 드러눕고’ 그랬다는데, 그 말이 옳은 것 같아요. 사회적으로 민감한 소재를 담아서 과감하게 영화를 할 수 있는 시대도 아니었고, 가족사를 봐도 내가 그런 일을 했다가는 혼이 크게 날 입장이었고, 그런 영화를 찍었다고 해도 검열을 통과해 공개될 일도 없었고…. 관(官)이 허락한 만큼 조금씩 열어가면서 찍었죠.” 그러한 점진적인 변화 속에서 임권택 감독은 어느 순간 달라져 있었다. “나 자신은 내 속에서 참으로 느린 속도로 변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만다라>(81) 같은 영화를 보면서 사람들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한국영화였다며 깜짝 놀랐다고들 그래요.”


5.16 쿠데타를 통해 탄생한 군사 정권의 지배 속에 있었던 1960년대와 1970년대. 이 시기에 영화를 시작했고 나름대로 영화적 세계를 키워왔던 영화감독이라면 이른바 ‘시대와의 불화’ 같은 것이 있을 법도 하지만, 임권택 감독에겐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군사 정권의 숨막히는 통제 속에 있어서 사회 전체가 답답한 건 있었지만, (영화감독으로서) 나는 그렇게 답답하지 않았어요. 계속 영화를 만들고 있었으니까. 어떤 평론가는 그럽디다. 한국영화 사상 최고의 암흑기였던 1970년대에 나름대로의 자기 계발을 통해 그 암흑으로부터 벗어났던 ‘괴이한 감독’이라고.(웃음) 그런 말을 들을 만큼, 나는 그 시기를 잘 보냈던 감독이었던 것 같아요.”

 

 

임권택에게도 저급한 영화를 찍어내는 '3류'감독이라는 낙인이 있었죠 

 

정부가 인정하는 ‘우수 영화’를 찍으면 외화를 수입할 수 있는 쿼터를 주었고, 그렇게 수입된 1년에 20편 정도의 외국영화가 큰 흥행을 거두었던 시절. 한국영화는 외화를 사오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고, 영화감독이라는 존재는 예술가라기보다는 그 수단을 위해 고용된 사람이었다. 임권택 감독에 대한 영미권의 연구서 <임권택, 민족영화 만들기>에서 영화학자 김경현과 인터뷰를 나누며 임권택 감독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단순히 먹고, 생기면 마시고, 찍고, 그것도 내가 찾아 다니면서 ‘한 작품 하자’가 아니고, 저급한 필름 적당히 하면 지방에서 흥행이 되고, 그래서 흥행업자들이 요구하면 제작사에서도 의뢰가 오고 그런 식으로 해달라고 하면 하는 거였죠.” 하지만 임권택 감독의 마음속에선 ‘다른 영화’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들기 시작한다. <잡초>(73)는 그 실천이었다. 거짓말을 조금 덜 하는, 삶의 모습을 담은 영화를 찍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니죠. <잡초> 찍기 몇 년 전부터 내 영화 인생에 대해 여러 가지로 생각을 했고, 내가 달라지지 않으면 영화인으로서 살아남을 길이 없다는 생각을 해오던 끝에 <잡초>라는 영화를 찍게 된 거죠.”


 

현재 필름이 남아 있지 않은 <잡초>는, 전쟁을 배경으로 잡초처럼 살 수밖에 없었던 한 여인의 일생을 다룬 영화. 임권택 감독이 직접 제작까지 겸한 영화다. “그런 삶의 냄새가 물씬 나는 영화를 그전부터 하고 싶었어도, 난 재미나 좇는 3류 감독으로 이미 낙인 찍혀서, 어떤 제작자가 나서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할 수 없이 내가 제작을 했죠.” 흥행에 성공하진 못했지만, <잡초>를 통해 임권택 감독은 크게 얻은 것이 있었다. 충무로 사람들이 그를 다시 보게 된 것. 임권택 감독은 “진지한 영화도 만들 수 있는 감독”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임권택 감독은 빠르게 변하지 않았다. 아니, 빠르게 변할 수 없었다. “거짓없이 삶을 담아내는 영화를 찍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쉬운 게 아니에요. 10년 이상 마구잡이로 50편의 저급한 영화를 찍어낸 감독이다 보니, 그 저급한 게 체질화된 거요. 어느 날 생각을 바꾸어서 ‘맑은 영화’를 찍으려고 해도, 바로 그렇게 될 리가 없는 거고. 그래서 그 체질화된 때를 벗겨내는 시간이 필요했던 거요.” 그러면서 임권택 감독은 조금씩 평가 받게 된다. 1970년대 후반엔 대종상과 백상예술대상에서 세 개의 감독상 트로피를 가져갔고, 이 즈음 이루어진 정일성 촬영감독과 송길한 작가와의 만남은, 여러 난관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에 그의 영화 세계가 만개할 수 있었던 좋은 징조였다.

 

 

<비구니>중단 때 이민 생각도 상처를 겪으며 단단해진 '임권택 표 영화', 대중성까지 얻다

 

임권택 감독의 1980년대를 이야기하는 것은, 가슴 벅차면서도 조금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의 영화는 한국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인정받기 시작했고, 흥행에 대한 부담은 여전했지만 관객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자유’는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커졌다. <깃발 없는 기수>(80)와 <짝코>(80)로 시작한 그의 1980년대는 <만다라>(81)에서 치열한 삶을 사는 두 승려를 통해 ‘병 속의 새’라는 화두를 제시했고, <길소뜸>(86) <티켓>(86) <씨받이>(87) <아제아제 바라아제>(89) 등 내놓는 작품마다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아픔도 있었다. 그 중 <비구니>가 조계종의 외압으로 중단된 것은 가장 가슴 아픈 일이다. 대규모 전투 신을 포함에 1만 자 이상 촬영되었지만, 몇 장의 스틸 사진 말고는 현재 남아 있는 것이 없다. 1984년 당시 <스크린>과 가진 인터뷰를 보면, 잠시나마 영화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임권택 감독은 꽤 구체적으로 이민을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사건은 그의 영화 인생에서 그렇게 결정적인 사건은 아니었다. “당시는 참담하고 그랬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런 것이 오랫동안 못으로 남을 만큼 깊은 상처를 준 것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 일 때문에 영화를 포기하고 다른 일을 했다면 모르겠지만, 난 끊임없이 영화를 찍고 있었으니까.” 그러면서 임권택 감독은 점점 단단해졌고, 그의 영화를 통해 환기되는 역사와 현실은 리얼리즘이라는 영토 위에 굳건히 서 있었다.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에서 그는 자신의 1980년대를 이렇게 바라본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중략) 영화를 매력 있게 끌어가는 무슨 살 같은 것이 함께 붙어가야 된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어요. 물론 살 같은 것이 붙어야 되는 거지만 그것 때문에 영화의 진행에 낭비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 커트도 낭비가 있어서는 안 되는 거요. 그래서 군더더기 없는 영화, (중략) 또 어떤 감상에 빠지지 않는 영화, 또 절제가 보이는 영화, 딱 이렇게 된 거예요.” 그렇게 ‘임권택 표 영화’는 만들어지고 있었고, 1990년대엔 여기에 ‘대중적 흥행’이라는 이름이 붙는다.

 

 

101번째 영화는 한지에 관한 영화예요. 세계인과 공유할 한국 이야기를 담고 싶어요 

 


그다지 내키는 영화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에게 흥행과 함께 이후 좀 더 큰 예술적 자유를 안겨 준 <장군의 아들>(90). 임권택 감독을 이야기할 때 ‘인본주의’라는 단어가 본격적으로 제기된 계기였던 <개벽>(91). ‘판소리’에 대한 신드롬을 일으키며 흥행 대기록을 세운 <서편제>(93). 정권의 압력에 의해 계속 미뤘다가 ‘문민 정부’ 시절을 맞이해 드디어 만들 수 있게 된 <태백산맥>(94). 그때까지 만든 영화 중 가장 힘들었다고 고백했던 <춘향뎐>(00)과, 칸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며 한국영화의 위상을 드높였던 <취화선>(02). 그리고 100번째 영화이자 <서편제>와 이어지는 <천년학>. 여기까지는 우리 모두, 임권택 감독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지금 그는, 우리가 아직까지 잘 모르고 있는 이야기를 위해 조용히 준비 중이다. 제목도, 시나리오도, 배우도, 로케이션도 정해지지 않은, 그저 ‘한지’에 대한 영화라는 것만 알려져 있는 영화. 감독 스스로 데뷔작을 만드는 심정으로 임하고 싶은 바로 그 영화다.

 

“우리의 한지가 굉장히 질이 좋았다고 그래요. ‘견오백지천년’(絹五百紙千年)이라고, 비단은 오백 년밖에 못 가지만 한지는 천 년을 간다는 건데…. 그런 좋은 종이를 만들어내는 걸 영화에 담아보고 싶은 거죠. 그런데 그냥 담아내면 누가 영화를 보겠어요. 그래서 뭔가 영화적 재미가 있도록 하려고 노력하고 있죠.” 한국 사람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영화로 보편성을 얻고, 세계인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문화로 만드는 것. 그 보람을 위해 임권택 감독은 오늘도, 한지를 만들고 파는 사람들을 일일이 만나 이야기를 듣고,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고, 촬영 장소 헌팅을 다닌다. “생각해보면 정말 정신 없이 살았어요. <천년학>(07) 끝나고 지난 한 해 동안, 한지 관련해서 여기저기 다니긴 했어도 ‘평생에 내가 이렇게 쉬는 때도 있구나’라며 새삼 놀랐거든요. 평생 영화 만든다고 정신 없이 살았다고 해야 하나…. 난 영화 만드는 것 빼면 아무 것도 없는 인생을 산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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