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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 황금시대 - 주승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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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가귀감』수사본_선종의 교과서

『선가귀감』(禪家龜鑑)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1564년에 서산대사 휴정이 편찬한, 일종의 ‘선종(불교) 교과서’라고 할 만한 책입니다.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일반인들이 선(禪)과 쉽게 만나도록 하기 위해 선의 종지를 뽑아 편집했다고 하네요. 그래서 한문본과 함께 언해본이 존재하는 텍스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책은 제가 출판사에 입사해서 두 번째로 편집에 참여했던 책이기도 합니다. 재교를 볼 때 잠시 참여했던, 일종의 보조 편집 작업이었는데, 많지는 않지만 무척 낯선 한자 용어들이 그보다 훨씬 많은 주석들과 함께 웅성거리고 있어 꽤나 당혹스러우면서도 호기심이 당겨, 주말에도 도서관에 가 사전을 펼쳐 보며 확인하고 노트에 한자를 적어 가며 공부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몇 년이 지나 오늘 제가 소개하려는 책 『선의 황금시대』를 만났습니다. 이 책은 오경웅(吳經熊, 존 우)이라는 중국학자가 서양에서 낸 책인데요(원제 The Golden Age of Zen, 1967), 마치 서양인들에게 선불교를 소개하려는 듯 당대(618~906) 선사들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흥미롭고도 알기 쉽게 풀어쓰고 있습니다. 즉 『선가귀감』과 『선의 황금시대』 모두 제게 선과 불교를 이해하게끔 해준 훌륭한 입문서가 되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선불교를 궁금해하는 독자에게 『선의 황금시대』를 추천하고 싶은 마음이 쪼금 더 있습니다. 『선가귀감』이 압축적이고 비의적인 데 반해 『선의 황금시대』는 언어를 풀어서 써 이해를 위한 징검다리를 놓아 주었고, 무엇보다 많은 일화를 통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선종이 남과 북으로 갈리는 일화가 한 편의 소설을 읽는 것처럼 펼쳐지는데요, 오조 홍인(弘忍)의 촉망받는 제자였던 신수(神秀)가 “몸은 보리수여, 마음은 맑은 거울. 부지런히 털고 닦아, 먼지 묻지 않게 하라”라는 시를 짓자 홍인은 제자들 앞에선 칭찬했지만, 닦고 말고 할 마음이 어디 있겠습니까, 최상의 지혜를 얻으려면 직관을 갖고 자신의 참본성을 꿰뚫어보아야 한다며 신수에게 충고합니다. 꼭 필요한 말들은 빠짐이 없으면서도, 현대인에게 그 참본성을 깨울 만한 언어를 이 책은 잘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 혜능(慧能)은 “보리 나무 원래 없고, 거울 또한 틀이 아니다.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어느 곳에 먼지가 일까”라는 시를 지어 선종의 진면목을 보여 줍니다. 물론 이로 인해 신수 무리에게 해를 당할지 몰라 양자강 남쪽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게 되지만요.
    
<선종의 계보도>_선종의 심법전승 계보입니다.
사실은 대단히 복잡한 계보도인데,

책에서는 ‘선의 불꽃을 이어온 사람들’이라며 이처럼 간략하게 표기했습니다.

이 책은 이렇게 당대 대선사들의 이야기를 주로 하고 있습니다. 지은이의 말마따나 “그들이야말로 독창적인 통찰력과 풍부한 개성의 힘으로 선의 심지에 불을 당겼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책의 선의 이야기는 달마대사가 중국으로 들어온 일화부터 시작합니다. 그 이후 오조 홍인까지의 이야기, 그리고 육조 혜능부터 다섯 종파(위앙종, 조동종, 임제종, 운문종, 법안종)로 나뉘는 과정 속에서 펼쳐지는 재미난 일화들이 소설처럼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읽다 보면, “마른 똥막대기”니 “뜰 앞의 잣나무”니 하는 여러 선어들과,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로다”, “임제할 덕산방” 같은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듯한 말들의 의미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구게>_“敎外別傳, 不立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
교외별전, 불립문자, 직지인심, 견성성불. 보통 사구게(四口偈)라 불리는, 달마대사의 핵심 교리입니다.

이야기들 중엔 특히 조주 종심(趙州從諗)의 일화가 재밌는데요, 지은이에 따르면 그는 ‘우주적인 농담’을 통해 낙관적으로 도의 길을 인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한 일화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조주를 만나러 온 중 하나가 설봉과 그의 제자 사이의 대화를 조주에게 전해줍니다.

“제자가 ‘고담한천(古潭寒泉)이란 어떤 것입니까’ 하니, 설봉이 ‘네가 아무리 뚫어지게 들여다보더라도 그 밑바닥을 볼 순 없다’고 대답했답니다. 제자가 다시 ‘물을 마시려는 사람에겐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설봉이 ‘입으로 마시는 게 아니다’라고 했답니다.”
이야기가 여기까지 이르자 조주는 넌지시 우스갯소리를 했다.
“입으로 마시지 않으면 코로 마시나 보지?”
이 말에 중이 물었다.
“그러면 스님께선 ‘고담한천’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물맛이 아주 쓰다.”
“물을 마시는 사람에겐요?”
“죽지!”
설봉이 나중에 이 대화 내용을 전해 듣고 나서 찬사에 찬사를 거듭하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고불(古佛)인데! 정말 고불이야!”

입이든 코든 깨달음을 얻는 데는 상관없고, 오직 죽음과 같은 쓰디쓴 고통을 관통했을 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일화인데, 공(空)과 깨달음의 관점을 꿰뚫고 있는 조주의 해학이 숨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대화처럼 단순한 비유로써 도(道)가 얘기되면 좋은데, 그렇지 않은 경우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뜰 앞의 잣나무” 일화가 대표적인데, 지은이의 추가 해설이 곁들여 있지 않았다면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한 중이 조주에게 물었다.
“달마 조사께서 서쪽으로부터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조주가 대답했다.
“뜰 앞의 잣나무니라.”
조주의 대답에 그 중은 질문에는 상관없는 엉뚱한 물건을 들춘다고 항의했다. 그러자 조주가 말했다.
“아니지. 난 단순히 물건을 가리킨 게 아니야.”
그러자 중은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달마 조사께서 서쪽으로부터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조주가 대답했다.
“뜰 앞의 잣나무니라.”

지은이의 말에 따르면, 도는 만물 어디에나 편재해 있으니 조주가 눈앞에 있는 잣나무를 그저 입에 올렸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도가 어디에나 있는데, 이것이 도입니까, 저것이 도입니까, 무엇이 도입니까, 하고 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반대로 해석하면, 그것은 어떤 하나의 대상에 집착하면 거기서 헤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겁니다. 도나 깨달음 역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이미 그 대상에 집착하면 도에서 멀어지는 것일 뿐.

그래서 선(禪)은 추구해야 할 도나 부처나 깨달음 모두 타파할 것을 권합니다. 하나의 사물에 집착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지요. 조주의 스승 남전 보원이 말했듯 “평상심(平常心)이 곧 도”입니다. 도달하겠다는 그 순간 이미 빗나간 것입니다. 이 세상 어느 먼 곳에, 마음 바깥에 따로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조 도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상(色)이 모두 텅 비어(空) 있으니 삶은 곧 삶이 아니다. 이 뜻을 충분히 깨치면 일상생활에 따라 때 맞추어 옷 입고 밥 먹으며 마음속 성스러운 태(胎)를 키우고 인연에 따라 생활해 갈 것이니 이 밖에 또 무슨 일이 있겠는가?” 그래서 문제의 위치는 다시 발 딛고 서 있는 이곳으로 돌아옵니다. 문제는 늘 일상인 것이지요. 내 주변의 문제가 곧 우주의 문제와 맞닿아 있는 것이고, 나의 마음 밖에 따로 문제의 본질이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도가 따로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담박한 삶을 긍정하고 문제를 삶으로 돌이킨다는 이런 말은 앞서 말한 조주의 도처럼 죽음과 같이 쓰디쓴 고통을 관통했을 때 가능한 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선은 깨달은 자들의 ‘언어 밖 언어’, ‘학문을 넘어선 학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문제를 만나거나 겪고 났을 때 일상에서부터 다시 생각하고 시작합니다. 그것이 이 선과의 첫 만남이 가져다준 한 배움이었습니다.

- 편집부 주승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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