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법상

이권초 하권

Extra Form

     

    • (일곱가지 전식의 종자만이 아니다) 아뢰야식의 종자도 아뢰야식 속에 유지되고 있다. 다만 아뢰야식은 종자를 受持하고 있는 존재이고, 종자를 훈습하는 것은 아니다. 아뢰야식의 종자는 의식과 말라식이 훈습한다. 그 양상을 말하면 길어지므로 생략한다.
    • 이제까지 말해온 종자는 新熏種子이다. 처음으로 훈습되었기 때문에 신훈종자라고 이름 붙인다.
    • 이밖에도 본유종자가 있다. 本有種子 처음 훈습된 것이 아니고 제팔아뢰야식 속에서 무시이래로 본래적으로(법대로) 존재하는 기분이다. 이것에는 가지가 있다. 하나는 유루의 法爾種子, 둘째는 무루의 法爾種子이다. 전자든 후자든 색과 마음 어느 쪽에서나 천차만별의 수많은 종자가 있다.
    • 이 유루 혹은 무루의 本有新熏의 양종자도 유위의 법이므로 찰나에 생멸한다. 그리고 멸할 때는 뒤에 자기와 똑같은 종류의 (종자) 야기시킨다. 색의 종자가 멸할 색의 종자를 끌어당기고, 마음의 종자가 멸할 마음의 종자를 끌어당긴다. 속에도 온갖 다양한 색이 있고, 마음속에도 온갖 다양한 마음이 있지만 모두 이처럼 자기와 똑같은 종류의 (종자) 야기시킨 것이다. 이런 식이기 때문에 모든 법의 종자가 단절되어 없어져버리는 것은 아니다. 흡사 강물의 흐름은 빠르게 흘러 사라지지만, 차례차례로 흐름이 이어져 그치는 일이 없는 것과 같다.
    • 따라서 종자는 현행을 낳고 현행은 종자를 낳는다. 종자는 종자를 낳는 . 가지 에서 의 본체 자체가 변화하여 가 된다. 따라서 (원인) 으로서는 가장 가까운 것이다. 앞서 말한 가지 가운데서 인연은 지금 여기서 말한 가지 인연이다. 이상 신훈종자와 본유종자 (유루의 종자) 대해서 약설했다.

     

     

    2 오성각별

     

    • 法爾無漏 종자 중에 부처의 종자와 독각의 종자와 성문의 종자가 있다. 이것을 三乘의 종성이라고 이름한다. 삼승의 종성을 어떻게 갖추고 있는가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어떤 사람은 부처의 종자만을 지닌다. 따라서 사람은 성문이나 독각을 이루는 없이 바로 부처가 된다. 이것을 頓悟 대승이라고 이름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독각의 종자만 있어서 바로 독각을 이루어 無餘涅槃에 들어간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문의 종자만 있어서 성문을 이루어 無餘涅槃에 들어간다. 사람을 정성(種姓 정해진) 이승이라고 이름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삼승의 종자가 모두 있다. 따라서 사람은 먼저 성문을 이루거나 독각을 이룬 후에 부처가 된다. 이것을 漸悟菩薩이라 이름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삼승의 종자가 모두 없다. 따라서 사람은 영원히 범부로 존재한다. 이것을 無姓有情이라 이름한다.
    • (성문과 독각이 들어간다고 말하는) 無餘依涅槃이란 신체도 마음도 소멸하여 어디에도 다시 태어나지 않고 영원히 깨달은 것이다. 이것은 유위의 제법이 모두 소멸하여, 무위로서 상주하는 법성이라는 진리만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같은 성취를 훌륭한 것이라 생각해서 성문과 독각은 이를 성취하길 바란다. 적멸을 즐기는 것이므로 이 역시 훌륭한 결과이다. 그러나 범부의 마음은 유치하기 때문에 자신을 애착하고 세계를 탐내며 번뇌에 휩쓸려 涅槃寂靜 無爲常主의 즐거움을 두려워한다.
    • 자신의 몸이 소실되고 세간에 (태어나는 일이) 영원히 끊어지더라도 그것에 상관하지 않는다. 단지 그렇게 되면 중생을 이롭게 하는 덕이 영원히 결핍되는데, 바로 그것이 괴로운 것이다. 따라서 성문이나 독각을 이루지 않고 성불하려는 생각은 뛰어난 마음이다. 이것이 바로 대보리심이다.
    • 따라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참되게 안다. 정토라는 보리에 도달하면 몸도 안락한 세계일거라 생각해서 경지에 도달하길 바란다면 그것은 올바르게 정토와 보리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사윤회를 바라는 것이다. (설사 정토에) 태어난다 할지라도 그것이 어떻단 말인가. 태어난 것은 반드시 멸한다. (설사 정토가) 안락하더라도 그것이 어떻단 말인가. 유위의 즐거움은 반드시 소진해버리는 때가 온다. (실제로) 정토의 즐거움은 세상의 즐거움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보리라는 과는 태어나 도달하는 장소라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는 二乘을 성취하지 말고 성불하려는 생각을 하라. 마음이야말로 정토에 태어나는 일이 가능한 원인이다. 그런데 중생을 제도하는 동안 몸을 잃고 목숨을 바치는 일을 어느 정도 많이 해야 하는가. 중생을 위해서는 설사 몸과 마음을 망치는 위험이 있더라도 그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더구나 (중생에) 이익을 주는 일이 있다면, (신심을 망치는 일도) 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 身心을 망치게 되면) 중생에게 이익을 없기 때문에 성불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상은 사실에서 분명히 있는 것은 보리심이 없으면 정토에는 태어날 없다는 것이다.
    • (정토에 왕생하는) 것에 대한 질문이다. 사람들이 정토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것은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인데, 이제 그와 같이 말씀하신다면 정토에 태어나서 무엇을 한단 말인가. 오히려 이 穢土에 태어나는 편이 좋지 않은가. 왜냐하면 중생을 구제하는 일은 예토에 있는 쪽이 더 낫기 때문이다.
    • 질문에 답한다. 정토를 바라는 것은 즐거움에 대한 욕구가 근본원인이 된다고 누가 말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즐거움을 얻고자 (정토에) 태어나길 바라는 사람은 정토에 태어날 수도 없고, 오히려 예토에 태어나 생사윤회하게 된다. 왜냐하면 즐거움을 바라는 것은 예토의 특질이기 때문이고, 정토의 (참된) 즐거움은 애욕을 일으키는 즐거움이 아니기 때문이다.
    • 따라서 정토에 태어나는 것은 다음 두 가지 바람을 원인으로 한다. 하나는 부처를 보고 (부처로부터) 법을 듣기 위해 정토에 태어나고자 바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토에서는 부처를 보고 법을 듣는 것이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처를 보고 법을 듣는 것은 중생에게 이익을 주기 위해서이다. 둘째는 중생에 이익을 주기 위해 예토에 태어나고자 바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토에는 고를 받는 중생이 있지 않고, 대비를 통해 제도된 중생이 있기 때문이다.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것은 대보리를 얻기 위한 것이다. 두가지 바람이 정토에 태어나기 위한 행위로서 원인이 된다. 다만 보리심이라 할지라도 보리심엔 계급이 있지만, 대강의 취지를 말하면, 보리심은 올바른 자비심이다. (이상) 五姓各別 말한 끝에 마음속에 품고 있던 (정토왕생에 관한) 사소한 견해를 조금 말해보았다.
    • 질문한다. 오성각별의 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긴다). 자신도 궁극적으로는 무성유정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정토나 보리를 원해도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무성유정인 이상 정토를) 성취할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기 자신이 (무성유정은 아닐까) 의심한다면, 어느 누구도 보리심을 발할 수가 없다. 따라서 자기가 확실히 성불할 있는 인간이라는 어떻게 하면 있는가.
    • 답하여 말한다. (오성각별에 대해서는 먼저) 오성이 가정적인 가르침인지 진실한 가르침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중생을) 제도하는 방편을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오성이 만약 진실한 것이라면 ( 무성유정도 있다면), 밀의의 방편 ( 일승이라는 방편) 으로써 중생에게 발심하도록 권고해야 하며, 그렇다고 해도 (오성의 진실을 설하는 법상종 사람의 입장에선) 아픔을 느끼는 일은 전혀 없다. 어리석은 자가 그러한 의문을 나타내길 두려워하여 (오성각별이라는) 법문의 진리를 말하지 않는 것이 어떻게 있을 있겠는가. 하물며 형식적으로라도 유식의 교리를 배우고 깨닫고자 하는 바람을 발할 정도라면 확실히 부처의 종자를 지닌 사람이다. 이유는 해심밀경에서 <확실히 무성유정인 사람은 (아뢰야식이라는 유식의 교리를 배울) 정도의 근기를 지닌 사람이 아니다>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지혜있는 사람 중에서 어느 누가 ( 해심밀경에 설해진 석존의) 훌륭한 말을 믿지 않고 헛되이 생사윤회하려 하겠는가. 법화경을 읽는 사람, 나아가 마음을 깨닫고자 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부처의 종자가 없을 있겠는가. (일승을 설하는) 법화와 (삼승을 설하는) 유식은 一體이다. 일체인지는 생략한다.
    • 종자가 어떤식으로 있는가는 대강 이상과 같다.
    • 이외에 (종자는 크게 나누면) 業種子名言種子로 나눌수 있다. 이중 명언종자는 이제까지 말해온 종자이다. (명언종자 ) 선의 종자는 선의 현행을 생기게 하고, 악의 종자는 악의 현행을 생기게 하고, 무기의 종자는 무기의 현행을 생기게 한다. 업종자란 만약 악을 일으킨다면 악의 종자를 훈습한다. 그리고 종자의 힘에 의해 삼악도에 태어난다. 선근을 일으키면 선심의 종자를 훈습한다. 그리고 종자의 힘을 통해 인간계나 천상계에 태어난다. 따라서 (업종자) 원래 (명언) 종자를 떠나서 별도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종자에서 일어나는 의 종자가 약간 (명언종자의 경우와는) 다르다. 삼악취와 인간계와 천상계의 본체는 아뢰야식이다. 아뢰야식은 (선악무기의 세가지) 性에서 본다면 (선도 악도 아닌) 무기이다. 그것을 總報라고 한다. 이외에 別報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도 無記이다. 따라서 업종자는 선의 종자의 힘으로 무기의 과를 일으키고, 또는 악의 종자의 힘이나 무기종자의 힘으로도 무기의 과를 일으킨다. 자세히 말하면 길어지므로 (생략한다.)

     

     

    3 부처의 종자

     

    • 그러면 부처의 종자를 지닌 사람이 수행하여 성불할 때, 보리심을 일으켜서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양상은 다음과 같다. 먼저 성불하기 위한 종자가 없어선 안되지만, 종자는 단지 한가지만이 아니라 여러가지로 분류된다. 먼저 8식의 종자와 그들 (8식에 상응하는) 여러가지 심소의 종자가 있다. 심소는 (전부해서) 23 있다. 번뇌6心所, 수번뇌2심소, 거기다 부정의 심소 睡眠惡作의 두가지 심소를 합하여 28심소는 (불에는) 없다. 왜냐하면 이들 모두는 有漏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 이들 (무루의 종자에서 일어난 무루의 8) 중에 5식을 成所作智라 이름하고 의식을 妙觀察智라 이름하고, 말라식을 平等性智라 이름하고, 아뢰야식을 大圓鏡智라 이름한다. 이처럼 (명명하는) 이유는 無漏眼識 내지 身識의 다섯가지는 일체의 신통이나 변화를 만들어내는 일을 성취하는 작용이 뛰어나기 때문에 성소작지라 이름한다. 무루의 의식은 (사람들의) 근기를 묘하게 관찰해서 법을 설하고, (사람들의) 의심을 끊어주는 작용이 뛰어나기 때문에 묘관찰지라 이름한다. 무루의 말라식은 영원히 자아에 대한 집착을 떠나서 (자기와 타자의) 평등이라는 존재의 본성을 깨닫기 때문에 평등성지라 이름한다. 무루의 8아뢰야식은 영원히 알라 (또는 이숙, 아타야) 등의 이름을 떠나서 모든 존재를 속에 떠올려 아는 것이, 마치 크고 밝은 깨끗한 거울이 만상의 형태를 속에 비추는 모습과 같기 때문에 대원경지라 이름한다.
    • 원래 이란 心王의 별명이다. 智 심소 의 심소이다. (따라서) 유루의 에도 가 있고, 무루의 에도 식과 지가 있지만, 유루의 위에서는 식의 작용이 강하므로 특히 8식이라고 이름붙이나, 智(慧라는) 심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무루의 에서는 지의 (작용이) 강하므로 특히 四智라고 이름붙이나, 식과 심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무루의 8 하나하나에 혜라는 심소가 있기 때문이다.
    • (·심소의 종자) 외에 眼耳鼻舌身色聲香味觸을 생기게 하는 (무루의) 종자도 모두 (성불하기 위한 종자) 로서 있다. 그들 (종자) 모두 善性이다. 여러가지 무루의 종자도 아뢰야식을 떠나서는 존재 하지 않지만, 그러나 (유루의 종자의 경우와는 달리) 아뢰야식은 (그들을) 인식의 대상으로는 하지 않는다.
    • 이에 대해 무루에는 3품의 무루가 있다. 하품, 중품, 상품의 무루이다.
    • 하품의 무루는 見道에서 일어나는 무루이다. 견도라 함은 처음 무루의 지가 일어나면서 조잡한 장애를 끊는 때이다. 중품의 무루는 修道에서 일어나는 무루이다. 수도라는 것은 무루의 지가 여전히 때때로 일어나는 미세한 장애를 끊는 때이다. 상품 ( 무루) 부처 (에서 일어나는 무루) 이다. 온갖 장애가 모두 완전히 끊어지고, 깨달음이 완성된 위이다. 이상 가지를 삼품의 무루라고 말한다.
    • 그런데 앞서 말한 갖가지 무루의 종자를 이 삼품에 적용시켜 분류해보면 다음과 같다. 하품의 종자에는 묘관찰지와 평등성지의 종자만 있고, 특히 종자에 상응하는 심왕이나 심소, 나아가 (, 심소) 에서 변화해 생긴 색법의 종자도 모두 (중품의 종자로서) 있으며, 외의 종자는 없다. 중품의 종자에 대해서도 (하품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하품에서 일어나는 묘관찰지와 평등성지에는 제각기 (편행의 5 별경의 5 선의11) 21 심소가 상응한다. 단지 묘관찰지에는 21외에 심의 심소와 사의 심소가 상응하므로 전부23 ( 심소) 상응한다. 상품의 종자에는 사지의 종자가 모두 있고, 특히 (사지의) 어느 쪽에도 각각의 21 심소가 상응한다. (23 아니냐면) 심과 사는 불에 업기 때문이다.
    • (상품의 종자로서) 5근의 종자와 5경의 종자가 있다. 즉 여래의 (신체적 특징인) 32, 80수호, (특히 여래로부터 발하는) 무수한 대광명, (여래가 현출하는) 무변의 불토 등도 모두 (상품의 무루종자로서) 이 아뢰야식 속에 있다. 왜냐하면 (32상 내지 불토 등은) 무루의 색 성 향 미 촉을 떠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감정이나 금용의 (부처) 모습도 단과나 청련등 (부처를 장식하는) 치장도 또 화태나 옥루 등의 구조물도 특히 8공덕수나 7중보수 등의 장식품도 모두 자기 마음내부에 있다. 물론 (자기의) 법성은 청정해서 무수무량의 미묘한 공덕을 본래적으로 구비하고 있다. 따라서 나의 몸이 바로 부처이고, 이 마음이 곧 정토라고 관해도 결코 틀린것은 아니다.
    • 그러나 자기 마음이면서 자기 마음을 지배할 수 없고, 무명의 미혹은 어둠처럼 캄캄하고, 살가야견에 의한 집착은 돌과 같이 견고하기 때문에 (진리를) 관하고자 해도 명확히, 오래 관할 수가 없다. 마치 깊은 어둠 속을 세차게 바람이 부는 어둠속을 희미하게 켜진 횃불을 들고 걸어가는 것과 같다. 갑자기 (횃불이) 꺼져 캄캄해지면서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게 된다. (불교에 접하는 사람도 그럴진다) 하물며 불교를 만날 연이 없이 변경의 땅에 태어난 중생들은 더욱 그렇다. 지옥 아귀 축생의 중생들은 더욱 그렇다. 때문에 무상대각을 낳는 종자는 헛되게 (아뢰야식 속에) 묻혀져서 현행으로 생길 수가 없다. (향기로운) 전단나무 종자가 흙속에서 갖가지 더러운 악취에 파묻혀 아직 싹을 틔우지 못하는 것과 같다.
    • 근기가 성숙하고 때가 된 사람이 중생을 위해 성불하려 하고 또 깨달음을 얻기 위해 중생을 이롭게 하는 보리심을 발하여서 자나깨나 잊는 일 없이 다시 태어날 때마다 그 세상에서 ( 발심의 서운이) 변동하는 일이 없으면, 스스로 가르침을 배우거나 혹은 남의 설법을 들음으로써 종류의 무루종자가 점차 윤택해져 싹을 틔우는 상태가 된다. 마치 전단종자가 (싹을 틔우는 시기가 다가와서 비나 이슬에 의해 윤택해 지는것과 같다.

     

     

    . 수행의 계위

     

    1 자량위와 가행위

     

    • 이와 같이 (발심의) 마음이 깊고 견고해지면 교법을 배우고 수행을 실천함으로써 지혜의 단계도 점차 높아지고 자비의 덕도 점점 늘어간다. (이렇게 하면서) 一大無數劫 경과하면, 범부로서의 깨달음은 극치에 달하고 무루의 종자가 모두 윤택해지는 가운데, 하품의 무루종자가 바로 (싹을) 틔우려고 하지만, 아직은 생겨나지 못한 (상태가 된다.) 맨처음 견고한 보리심을 발하는 데서부터 상태에 이르기까지를 지전보살이라고 이름한다. 아직 10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 이 일대무수겁 동안 깨달음이 깊어지는 순서에 대해 말한다면, 먼저 서른 가지 마음이 있다. 그것은 (자량위의) 十住 十行 十廻向이다.
    • 이중 십회향의 마지막에서 가행의 단계가 시작된다. ( 단계는) 四善根이라고도 이름한다. 煖善根頂善根忍善根世第一法이다. 네가지 단계의 (수행하는 을 차례로) 明得定 明增定 印順定 無間定이라 이름한다.
    • (사선근) 외의 서른가지 마음을 모두 資糧位라고 이름한다. 佛道糧食을 저축하므로 자량이라고 이름한다. 마지막엔 특히 見道를 일으키는 방편이 되기 때문에 加行이라고 말한다.
    • 지금 이 地前(자량위와 가행위) 에서는 갖가지 장애의 대부분을 한다. 장애는 煩惱障所知障이다. 번뇌의 양상에 대해서는 이미 말했다.
    • 수번뇌도 이 (번뇌장) 속에 속한다. 소지장이라는 것은 번뇌 하나하나의 근저에서 (제법의) 體 미혹하는 마음이다. ( 소지장은) 번뇌보다 끊기 힘든 장애이지만, 번뇌를 벗어난 별다른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번뇌의 근저에 있는 희미하고 깊은 부분을 소지장이라고 한다. 예컨대 밤에 그루터기를 보고 그것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하자. 그루터기라고 알지 못하는 마음과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마음 두가지가 일어나지만, ( 경우)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마음 외에 그루터기라고 알지 못하는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은) 작용에 미혹되어 있고, (그루터기라고 알지 못하는 마음은) 체에 미혹되어 있다는 두가지 존재방식을 하고 있는 불과한데, 번뇌장과 소지장도 마찬가지이다. 번뇌장은 사람이라 생각하는 마음같은 것이고, 소지장이란 그루터기라고 알지 못하는 마음같은 것이다. 貪에도 두가지가 있고, 瞋에도 두가지가 있고, 또한 수번뇌 하나하나가 모두 이와 같이 (두가지 장애가 있다.)
    • 이 번뇌에는 거친 종류와 미세한 종류가 있다. 거친 종류를 분별의 번뇌 () 이라 이름하고, 근저에 있는 所知障을 분별의 소지장이라고 이름한다. 분별의 두가지장애를 見道에서 끊는다. (다른 한편) 미세한 종류를 俱生의 번뇌라 이름하고, 근저에 있는 소지장을 구생의 소지장이라 이름한다. 구생의 가지 장애를 修道에서 끊는다. 斷한다는 것은 무루의 깨달음이 열렸을 , 번뇌장과 소지장 두가지 장애가 영원히 소멸해버리는 것이다.
    • 이라는 것은 (두가지 장애의) 종자가 소멸해버리는데 까지는 가지 않고, 종자는 의연히 존재하지만 지혜의 힘으로 ( 종자가) 현행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말한다. (앞에서) 지전보살은 온갖 장애 대부분을 복한다고 말했는데, 이는 분별의 가지 장애를 자량위에서 차례로 복하기 시작하고, 가행위에서 복하는 것이 끝난다. (다른 한편) 구생의 두가지 장애를 가행위에서 차례로 복하기 시작하여, 地前 아닌 지상에서 복하여 끝난다. 지상이라는 것은 初地이상을 말한다. 양상에 대해서는 다음에 말하겠다. 이상 지전의 一大阿僧祇劫기간은 장애를 할 뿐이지 아직 그것을 끊지는 못한다.
    • 아승기겁은 일명 무수겁이라고 말한다. 무수겁은 예를 들면 넓이와 높이가 팔백리나 되는 돌을 얇고 가벼운 하늘 옷으로 (백년에 한번 정도씩 극히) 드물게 쓰다듬어 돌이 점차로 마멸되어서 아무것도 남지 않을 정도의 오랜 기간, 것을 일대무수겁이라 한다. 지전의 (수행기간이) 오랜 것이 이와 같다.

     

     

    2通達位(見道)

     

    • 이처럼 범부로서의 깨달음이 극치에 달하면, 마침내 무루의 종자가 처음으로 下品(무루의) 현행을 생기게 한다. 하품의 묘관찰지와 평등성지 두가지 가 생기는 것이다. 단계에서 비로소 진여의 이치를 깨닫고, 분별의 두가지 장애를 끊는다. 이것을 견도라 이름한다.
    • (견도에는 세가지) 단계가 있다. 一心眞見道3心相見道16心見道인데, ( 세가지는) 차례로 계속해서 일어난다. (견도) 10 초지의 시작이다. (견도) 이후를 聖者라 부르고, 地上보살이라고도 이름한다.

     

     

    3修習位

     

    • 十地 환희지 이구지 발광지 염혜지 극난승지 현전지 원행지 부동지 선혜지 법운지歡喜地 離垢地 發光地 焰慧地 極難勝地 現前地 遠行地 不動智 善慧地 法雲地이다. (앞서 견도는 초지의 처음이라고 말했는데), 初地라는 것은 처음 환희지이다. 이들 십지는 깨달음을 열고서 점차 성불로 나아가는 심경의 단계를 10으로 나눈 것이다.
    • 하나하나의 단계에서 각각 장대한 시간, 백천대겁을 경과한다고 말하므로 처음 환희지도 대단히 시간이다. 그런데 견도는 (일심진견도, 3심상견도, 16심상견도) 세가지 단위가 있지만, 경과하는 시간은 짧기 때문에 견도를 지나 수도에 들어가도 여전히 초지내에 머물게 된다.
    • 수도에 들어갈 때 妙觀察智平等性智가 다시 일어난다. 두가지 는 중품의 무루종자에서 생긴다. (지의) 깨달음은 점점 명확해지고, 앞서 말한 구생의 미혹을 끊기 시작한다. 미혹이라는 것은 장애를 말한다. 구생의 미혹에 대해서, 번뇌장과 소지장 중에서 보살은 구생의 번뇌장을 10 마지막에서 성불할 끊는다. 이전 수도에 들어간 이후로는 점점 구생의 소지장을 끊는다. 초지에서 2지로, 2지에서 3지로, 9지에서 10지에 들어가도, 다음 지에 들어갈때마다 다음지의 장애가 되는 구생의 소지장을 차례차례하나씩 끊는다.
    • 이와 같이 제10지에서 성불할때는 佛果의 장애 (불이라는 과를 생기게 하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 끊는다. 불과의 장애는 (하나는) 아직 끊어지지 않고 남은 구생의 소지장과 (또한 가지는) 일부러 끊지 않은 남겨둔 구생의 번뇌장이다. 두가지 장애는 불과를 얻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에 참된 성불을 할때 이들을 끊는다. 보살이 구생의 번뇌장에서 (단지 현행만을) 伏하고, 십지 사이에서 ( 종자를) 끊지 못했던 것은 하나는 (구생의 번뇌가) 십지의 장애에는 없기 때문이고, 한가지는 중생에게 이익을 주기 위해서이다. 이외에도 이유가 있지만 생략한다.
    • 10지에 대해서 특히 뛰어난 점을 말한다면, (10지의 각지에서) 제각기 하나의 행을 수행하고, 하나의 장애를 끊고, 하나의 진여를 證하는 것이다. 그 수행된 행을 10바라밀다라 이름하고 끊어지는 장애를 十重障이라 이름하고 증해지는 진여를 10진여라 이름한다. 그 내용에 대한 서술은 생략한다.
    • 그리고 (수행기간의 길이에 대해서 말하자면), 초지에서 7지끝에 이르기까지 일대아승기겁을 지난다. 이것이 2아승기겁이다. 다음 8지에서 10 끝에 이르기까지 一大阿僧祇劫을 지난다. 이것이 3아승기겁이다. (發心에서 加行位끝까지) 地前 일대아승기겁이 초아승기겁이다. 이상 이것을 3아승기겁의 수행이라고 이름한다.
    • 2아승기겁에서 무루지가 일어나지만, 기간 동안의 無漏智는 찰나찰나 생멸한다. 그리고 멸할때마다 (무루의) 종자를 훈습하는 양상은 유루종자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무루의 종자를 훈습하는 것은 견도의 2념부터 훈습하기 시작한다. 2념은 2찰나이다. 무시이래 범부로 있는 동안은 무루의 신훈종나는 없다. 무루심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도대체 누가 (무루의 종자) 훈습하는 것일까. 따라서 견도의 최초의 찰나에 일어나는 지는 단순히 法爾의 무루종자에서 생긴다. 이후부터는 신훈종자가 생겨 (무루종자에) 바싹 달라붙기 때문에 본유종자와 신훙종자는 서로 붙어서 (무루지의 현행을) 낳는다. 이것을 신고합생이라 이름한다. 新古合生 무루만이 아니다. 무시 이래 유루의 제법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느쪽의 법이든 본유종자와 신훈종자 두가지가 없는 것은 아니며 신고합생한다.
    • 이 삼대아승기겁에 대한 것이다. 초아승기겁에서는 단지 유루의 깨달음만이 일어나고, 아직 무루의 깨달음은 열리지 않는다. 2아승기겁에서는 유루의 깨달음과 무루의 깨달음이 서로 혼재하여 일어난다. 3아승기겁에는 무루의 깨달음만이 계속되고 유루의 는 섞이지 않는, (따라서 3아승기겁에서는) 공덕이 일념일념으로 점점 빨리 쌓여나가고, 깨달음도 한찰나 한찰나 점점 빠르게 열려간다. (3아승기겁의) 초찰나는 앞의 두가지 아승기겁보다도 (공덕은) 배로 증가하고, 2찰나에는 앞의 初刹那보다도 또 배로 증가한다. 배증은 원래 있는 양과 똑같은 정도의 양이 더욱 가해지는 것이다. 이런식으로 3찰나, 4찰나로 이어지면서 마침네 10 마지막 찰나까지 점차로 배증해나간다.
    • 3아승기겁 마지막에 相好(닦는) 백겁이 있다. 성불하고자 하는 시기가 가까워지면서, 특히 백겁사이에 (부처의) 신체적 특징[諸根相好] 몸에 지니는 수행을 한다.
    • 이러한 다양한 수행을 성취했을때 (마지막에는 色究竟天에서 금강유정을 수행하여 성불한다) 사물의 형태를 지닌 세계로는 가장 위에 있는 색구경천보다 위에 있는 大自在天宮이라는 정토에서 십아승기 백천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커다란 寶蓮華王의 자리에 앉아서 金剛喩三摩地라는 에 들어가 앞서 말한 불과를 방해하는 장애를 끊는다. 이때를 등각보살이라고 이름한다. 부처의 지위를 받는 의식도 단계속에서 행해진다.

     

     

    4究竟位

     

    • 이와같이 (극히 미세한 俱生의 소지장과 일체 구생의 번뇌장이라는) 佛果 장애를 끊어버리면, 급속히 究竟道에 들어간다. 이때 일체의 유루 ( 종자) (하품과 중품의) 열등한 무루 ( 종자) 모두 멸해 사라져버린다. 이것은 소위 無始이래 구비되어 있는 상품 法爾의 무루종자에서 (大圓鏡智 등의) 네가지 지혜가 모두 현행하고, 모든 덕을 모두 몸에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를 부처라고 이름한다.
    • 무릇 (성불하기 위한 원인이 되는) 因位에서든, (성불한) 佛果에서든 마음과 육체의 무루법은 모두 성질이 선이다. 이것은 유루의 법에 (善, 惡, 無記) 세가지 성질이 함께 혼재하는 것과는 다르다. 성불하면 신체는 법계 전체에 가득 넘쳐흐른다. 그리고 부처의 신체의 뛰어난 특징 하나하나가 (법계전체에) 편재하여) 無邊이다. 왜냐하면 삼대아승기겁에 걸친 오랜 시간에 걸쳐 수행한 무변의 선행위의 결과로서 보답된 것이기 때문이다. 인과의 도리는 필연적으로 이 무변이면 도 무변이다.
    • (성불한) 이후에는 새롭게 종자를 훈습하는 일은 없다. (존재하는 종자로는 하나는) 상품의 법이의 무루종자와 (또 하나는) 本有이든 新熏이든 하품 중품의 무루종자가 (그 성질을) 바꿔서 상품이 된 것이 無垢識 속에 존재할 뿐이다.
    • 無垢識大圓鏡智相應하는 心王이다. 범부에서 7지까지는 아뢰야식이라고 이름한다. 等覺까지는 異熟識이라고 이름한다. 성불하면 무구식이라고 이름한다. 무구식을 산스크리트에서는 아말라식이라 한다. 이것은 8 (여덟번째인) 8식이다. 이같이 8식에는 여러가지 다른 이름이 있다. 아타나식도 역시 식의 명칭이다.
    • 따라서 성불한 뒤에도 여덟가지 식이있다. ( 각각의 식에 상응하는) 심소가 있다. 심소의 수는 스물한 가지인데, 이에 대해서는 이미 말했다. 심왕과 심소는 제각기 모두 사분으로 나뉜다. 상분에 속하는 五根 五境 있고, 오경 중에 여래의 상호 대광명이 있고 不可說의 정토가 있다.
    • 이들 (부처님의 色心) 법중에서 실법으로서 있는 것은 모두 각각의 종자가 있고, 그들 종자는 여래의 무구식 속에 수용 유지되고 있다. (색심의 현행이) 생길 때는 각각의 종자에서 생긴다. 생기기때문에 또한 반드시 멸한다. 종자도 찰나찰나 생멸하고, 현행도 찰나찰나 생멸한다. 이와 같이 갖가지 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佛身이라 해도 이것을 有爲라고 이름한다.
    • (부처를) 유위라고 이름하면서도, (부처는) 영원히 두 종류의 생사를 떠나 있다. 두 종류의 생사는 분단생사와 변역생사이다. 이 중 분단생사는 우리가 되풀이하여 받는 생사이다. 길게 살든 짧게 살든 그 수명에는 반드시 한계가 있고, 오래 살고자 생각해도 뜻대로 할 수 없다. 그러한 과보 (로서의 생사이다.) 변역생사란 보살이 받는 생사이다. 오래 살고자 생각하면 언제라도 오래 살 수 있고, 그 수명에는 한계가 없다. 단지 성불할 때 그 몸으 ㄹ버리는 그러한 생사이다.
    • 따라서 부처는 영원히 이 두가지 생사를 떠난다. (부처의 생멸의) 생은 생사의 생이 아니다. 생사의 생은 반드시 업력에 의해 삼계에 태어나는 것을 의미하지만, 佛身 생은 유위라 해도 무루가 일어난 것을 생이라 이름붙였을 삼계에 태어난다는 의미는 아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生滅) 멸도 생사의 사는 아니다. 생사의 사는 업력이 다햐여 명이 끝난다는 의미이지만, 불신의 멸은 유위라 해도 무루가 찰나에 멸하는 것일뿐 부처의 목숨을 마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부처의) 법체가 생멸하는 미세한 찰나의 생멸이다. 따라서 생사를 벗어난 (出離生死) 부처라 이름한다. (그러나) 만약 생이 있는데 멸이 없다는 그러한 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생멸하는 부처), 이것을 유위의 報佛이라 이름한다.
    • 지금 이 법계에 널리 편재하는 상호 (신체적 특징) 莊嚴 (장식) 지닌 유위의 보신불을 自受用身이라고 이름한다. 그런데 부처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성불한 것이기 때문에 중생에 이익을 주는 일을 잠시라도 그칠수가 없다. 따라서 범부로부터 이승, 地前보살, 십지보살, 등각보살까지 (모든 중생) 제도한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법계에 편재하는 (자수용신) 진실한 모습은 등각보살이라도 볼수가 없다. 물론 (등각에) 미치지 못하는 보살이나 이승도도 마찬가지이고, 더구나 우리 () 범부) 들은 더욱 그렇다. 그래서 (부처는) 사람들에게 ( 모습이) 보이도록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 그 중에서 우리 (범부) 위해 나타난 것이 신장이 6척인 부처이다. ( 부처는 四洲 四海 이루어진 一天下를 국토로 삼고, (범부 이외에도) 資糧位 보살과 성문 독각의 이승까지도 똑같이 받드는 부처이다. 이것을 작은 화신(小化身)이라고 이름한다. ( 한가지 화신이 있다. 그것은) 加行位 보살을 위해 나타난 (부처인데,) 모습은 삼천대천세계를 국토로 삼는다고 말할 정도로 커다란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것을 大化身이라고 이름한다. 초지의 보살을 위해서 (나타난 부처는) 한잎의 넓이가 삼천대천세계만큼 넓은 연꽃잎과 연꽃잎 백장으로 이루어진 정도의 자리, 그리고 자리에 어울릴 만한 부처로서 나타난다. 2지의 보살을 위해서는 (이처럼 광대한) 잎사귀 천장으로 이루어진 연꽃에 앉으시고, 3 보살을 위해서는 잎사귀 만장으로 이루어진 연꽃에 앉으시고 내지 10지의 (보살을) 위해서는 말로 표현할 없을 정도로 수많은 잎사귀로 이루어진 연꽃에 앉으시고, 자리에 어울릴 만한 모습을 (나타내시기) 때문에 (부처의 모습이) 점차로 커진다는 것은 정말로 그럴 것이다. 이들 10가지 불신을 타수용신이라 이름한다.
    • (타수용신의) 국토는 모두 淨土이다. 넓이는 연꽃의 좌석과 똑같이 점차 넓어진다. 따라서 초지에서 10지에 이르기까지 10개의 정토가 있다. 극락 (정토) 초지보살을 위해 아미타불이 나타나신 때의 국토라서 그와 같이 보인다. (그런데) 이같은 제법의 본성은 진여인데, 여래의 자수용신 속에 갖춰진 무루의 지혜가 진여와 ( 하나로) 합치한다. 진여를 법신이라 이름한다. (이상) 이들 법신 보신 화신을 (부처의 三身이라고 말한다. 타수용신을 보신에 배분한다.
    • 佛身 응해서 정토가 있지만), 정토중에서도 최고의 정토는 자수용신의 정토이다. 더구나 (자수용신의 정토의) 본성을 말하면, 그것은 법신의 국토이다. (法性土) (제불과 삼신의 관계를 말한다면), 비로자나불은 법신이고, 노사나불은 보신이고, 석가모니불은 화신이다.
    • 五位 수행양상은 이상과 같다. 그런데 수행이 삼대아승기겁의 기간에 걸쳐서 이루어진다고 하면, (자신은 결코 깨달을 없다는) 쓸데없는 생각이 들면서 (수행하고자 하는 의욕도 시들어버린다.) 그러나 (唯心如幻이라는) 깨달음 앞에서 (삼대아승기겁은) 찰나속에 거둬들여진다. 삼대아승기겁을 정녕 오랜 기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명에 미혹된 오랜밤이 아직 밝아지지 않은 기간이고, 강하게 집착한 꿈에서 아직 깨어나지 않은 기간이다. 미혹에서 한번 깨어나면, 삼대아싱기겁이 一念이고, 일념이 삼대아승기겁이다. (따라서) 어떻게 수행하지 않을 있겠는가. 어떻게 (보리에) 도달하지 않을 있겠는가.
    • (이상 말해온) 것은 오류도 있을지 모르고, 또 표현이 서툴지 모르지만, (어머니의 말씀을) 받들어서 (유식의 교리를) 약설했다. (따라서) 경전이나 논서의 글, 특히 논사들의 해석 등은 생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