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불교

남종선의 돈오사상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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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머리말-南宗禪의 성립과 荷澤 神會

禪宗(선종)의 開祖(개조)라 하면 누구나 菩提達摩(보리달마)라고 생각하지만 현재 선종교단이 계승하고 있는 菩提達磨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편의상 구별하여
 歷史上의 인물을 '達摩'라 쓰고, 선종교단의 요청에 의해 성립된 개조를 '達磨'라 칭하고 있다.

'達磨'의 등장은 荷澤 神會(하택신회)와 깊이 연관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南宗禪(남종선)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禪宗開祖(선종개조)인 '達摩'와 '達磨'의 관계로 정리해 보기로 한다.
南山 道宣(남산도선; 569~667)이 貞觀19년(정관; 645)에 續高僧傳(속고승전)의 [菩提
達摩(보리달마장)]을 쓸 때, 두 가지 자료에 근거하였다. 二入四行論(이입사행론)과 曇林(담림)이 쓴 그 서문, 그리고 洛陽伽藍記(낙양가람기)이다.
洛陽伽藍記(낙양가람기)는 楊衒之(양현지)가 武定5년(무정; 547)에 편집했으므로 더 오래 전에 성립된 것이고, 거기에 菩提
達摩라는 인물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菩提達摩가 '二入四行'을 설한 사람인지 아닌지는 전혀 명확치 않아서, 어쩌면 洛陽伽藍記(낙양가람기)의 菩提達摩와 禪宗의 開祖라고 전해지는 菩提達磨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자연스럽다.
그 둘을 同一人이라고 본 사람은 道宣(도선)이다. 그는 '二入四行'을 설한 菩提
達摩와 그의 제자 慧可(혜가), 僧粲(승찬)을 楞伽經(능가경) 연구자라 하고, 새롭게 대두되었던  州 雙峰山(쌍봉산) 道信(도신; 580~651)과 그의 제자 弘忍(홍인) 계통의 동향이 무시할 수 없는 것임을 알고 [道信傳(도신전)]을 補筆(보필)하였지만, 그 두 계통을 연속되는 하나의 법계로 결부시키지는 않았다.
北宗系의 燈史(등사)에서 713년 경에 성립된 楞伽師資記(능가사자기)가 續高僧傳(속고승전)의 法沖傳(법충전)을 기초로 하여 菩提
達摩-慧可-僧粲(보리달마-혜가-승찬)계통과 道信-弘忍-神會로 이어지는 北宗禪 계통을 결부시키게 된 것은, 자료 자체가 서술하고 있는 바와 같이 續高僧傳(속고승전)에는 없는 새로운 전개이다.
또다른 北宗禪 계통에 속하는 傳法寶記(전법보기)도 계통의 문제에 관하여는, 續高僧傳에 없는 僧粲(승찬)과 道信(도신)의 연결을 의도하고 있다. 그 주장은 洛陽(낙양)이나 長安(장안)에서 활약한 神秀(신수)와 그 문하가 인정되므로써
한층 
達摩의 法系(법계)가 정착되어, 楞伽師資記(능가사자기)에서는 '二入四行'을 達摩의 설로서 인정하려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神秀(신수)를 중심으로 하는 북종선은 荷澤 神會의 공격으로 결국 멸망하였고, 達摩의 '二入四行說'도 무시되었는지, 중요시되는 일이 없었다.
南宗禪의 
達磨는 北宗禪을 비판하는 가운데 등장하고, 선종교단은 이것을 계승하고 있다. 開元 20년(732)에 저술된 神會의 북종선 공격 기록인 菩提達摩南宗定是非論(보리달마남종정시비론)에서 獨孤沛(독고패)의 서문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卽我襄陽神會和上 悟無生法忍 得無碍智 說上乘法 誘諸衆生 敎道衆生 敎道廻向者 若百川赴海 於開元二十年 正月十悟日 在滑台大雲寺 設無遮大會廣資嚴飾 昇師子坐 爲天下學道者說 梁朝婆羅門僧(字)菩提達摩是南天竺國國王第三子 少小出家 智惠甚深 於諸三昧 獲如來禪 遂乘斯法 遠涉波湖至於梁武帝 武帝問法師曰 "朕造寺度人 造像寫經 有何功德不" 達摩答 "無功德" 武帝凡情不了 達摩此言 遂被遺出[達摩]行至魏朝 便遇惠可 [惠可]時年四十 俗姓姬 武牢人也 遂與菩提達摩相隨至嵩山少林寺 達摩說不思[議]法惠可在堂前立 其夜雪下至惠可腰 惠可立不移處 達摩語惠可日 "汝爲何此間立" 惠可涕淚悲泣曰 "和上從西方遠來至此 意[欲]
즉아양양신회화상 오무생법인 득무애지 설상승법 유제중생 교도중생 교도회향자 약백천부해 어개원이십년 정월십오일 재골태대운사 설무차대회광자엄식 승사자좌 위천하학도자설 양조파라문승(자)보리달마시남천축국국왕제삼자 소소출가 지혜심심 어제삼매 획여래선 수승사법 원섭파호지어양무제 무제문법사왈 "짐조사도인 조상사경 유하공덕불" 달마답 "무공덕" 무제범정불료 달마차언 수피유출[달마]행지위조 편우혜가 [혜가]시년사십 속성희 무뢰인야 수여보리달마상수지숭산소림사 달마설불사[의]법혜가재당전립 기야설하지혜가요 혜가립불이처 달마어혜가일 "여위하차간립" 혜가체루비읍왈 "화상종서방원래지차 의[욕]

說法度人 惠可今不憚損軀志九勝法 唯願和上大慈大悲" 達摩語惠可曰 "我見求法之人 咸不如此" 惠可遂取刀自斷左臂 置達摩前 達摩見之[日]"汝可在" 先字神光 因此立名 遂稱惠可 [惠可]深信堅固 棄命損身 志求勝法 喩若雪山童子捨身命以求半偈 達摩遂開佛知見 以爲密契 便傳一領袈裟 以爲法信 授與惠可 惠可傳僧璨 璨傳道信 道信傳弘忍 弘忍傳惠能 六代相承 連線不絶[胡適校訂 [神會和尙遺集] 261~262頁, 胡適記念館. 以下, 胡適本と略稱す]
설법도인 혜가금불탄손구지구승법 유원화상대자대비" 달마어혜가왈 "아견구법지인 함불여차" 혜가수취도자단좌비 치달마전 달마견지[일]"여가재" 선자신광 인차립명 수칭혜가 [혜가]심신견고 기명손신 지구승법 유약설산동자사신명이구반게 달마수개불지견 이위밀계 편전일령가사 이위법신 수여혜가 혜가전승찬 찬전도신 도신전홍인 홍인전혜능 육대상승 연선불절[호적교정 신회화상유집 261~262혈, 호적기념관. 이하, 호적본と약칭す]


여기서 말해지는 선종개조 達磨(달마)와 慧可(혜가)의 이야기는 현대 선종교단이 전승하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神會(신회)가 주장하는 이 8세기 達磨는, 실은 北宗禪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禪宗史上 [
達磨傳(달마전)]에 梁武帝(양무제)가 등장한 것은 이 신회의 설이 처음이므로 선종교단에서 창작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왜 武帝가 새로 등장했는가? 그의 등장은 무엇을 뜻하는가? 창작자 신회로서는 歷史上의 梁武帝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어도 좋았을 것이다.
神會가 등장시킨 武帝라는 인물은 則天武后(칙천무후), 中宗(중종), 叡宗(예종) 등의 권위를 암시하는 것 이상이 아니었다. 신회의 목적은 이들의 권위에 의해서 지탱되던 북종선을 부정하는 데 있었던 것이다.
이 목적은 결과적으로 훌륭하게 성취되었고, 선종개조에 대한 이야기로서 후대에 길이 전승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 이야기는 南宗禪에 내려오는 대표적 저술 돈황본(敦煌本) 六祖壇經(육조단경)에 다음과 같이 영향을 주고 있다.


使君禮拜自言 "和尙說法 實不思議 弟子當有少疑 欲問和尙 望和尙 大慈大悲 爲弟子說" 大師言 "有疑卽問 何須再三 使君問 (和尙所說)法 可不是西國第一祖達磨祖師宗旨" 大師言 "是" (使君問) "弟子見說 達磨大師化梁武帝(帝)問達磨 '朕一生已來 造寺布施供養 有功德否' 達磨答言 '병無功德' 武帝추장 遂遣達磨出境 未審此言 請和尙說" 六祖言 "實無功德 使君 勿疑達磨大師言 武帝著邪道 不識正法 (拙稿 惠昕本 [六祖壇經]の硏究(續) 83~84頁, [駒澤大學佛敎學部論集] 第12號, 1981年)"
사군예배자언 "화상설법 실불사의 제자당유소의 욕문화상 망화상 대자대비 위제자설" 대사언 "유의즉문 하수재삼 사군문 (화상소설)법 가불시서국제일조달마조사종지" 대사언 "시" (사군문) "제자견설 달마대사화양무제(제)문달마 '짐일생이래 조사포시공양 유공덕부' 달마답언 '병무공덕' 무제추장 수견달마출경 미심차언 청화상설" 육조언 "실무공덕 사군 물의달마대사언 무제저사도 불식정법 [졸고 혜흔본 육조단경の연구(속) 83~84혈, 구택대학불교학부논집 第12號, 1981年]"


이 이야기는 다시 碧岩錄(벽암록) 第一則의 本則(본칙)으로서 특히 유명해지지만 達摩가 대답한 '無功德(무공덕)'의 문답보다 '廓然無聖(곽연무상)'이나 '不識(불식)'의 문답으로 전승되어 가고 있다.

擧 梁武帝問達磨大師 "如何是聖諦第一義" 磨云 "廓然無聖" 帝日 "對朕者誰" 磨云 "不識" 帝不契 達磨遂渡江至魏(岩波文庫, [碧岩錄(上)]36項, 1992年)
거 양무제문달마대사 "여하시성체제일의" 마운 "곽연무성" 제일 "대짐자수" 마운 "불식" 제불계 달마수도강지위[암파문고, 벽암록(上)36項, 1992年]


이러한 변화는, 南宗禪(남종선)이 확립되고 나서는 神會에 의해 창작된 北宗禪 공격의도가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하고 그런 의도 역시 사라졌음을 나타내고 있다.
禪宗史에서 그러한 변화의 예가 있어 왔다 해도 
達磨傳(달마전)에 梁武帝(양무제)를 등장시킨 것은 神會이므로, 요즘 연구에서는 처음 말했던 바와 같이, 편의상 '達摩'와 '達磨'를 구별해서 쓰고 있다.
다시 말해, 楞伽經(능가경) 연구자와 北宗系에 전하는 선종개조를 
達摩라 칭하는 데 비해 南宗禪의 개조를 達磨라고 구별하는 것은 新역의 영향에 의해 다르마(dharma)라는 말의 번역이 '達磨'라는 글자로 통일된 데도 있지만 개조(開祖) 그 자체가 시사하는 내용도 변화되었음을 의미한다.
神會가 지은 菩提達摩남宗定是非論(보리달마남종정시비론)이라는 저술의 題目으로 살펴보면, 普寂(보적)이 칭한 '南宗'은 잘못된 명칭아고, 神會가 칭한 것만이 菩提
達摩가 전한 남宗의 정통이라고 못 박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므로 荷澤 神會(하택신회)는 결과적으로 開祖 
達磨의 새로운 등장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이 된다. 돈황에서 발견된 선적(禪積) 중, 神會에 관한 자료는 중국선이 北宗에서 남宗으로 어떻게 변해갔는가를 명확히 보여 준다.
오랫동안 신회에 관해 연구해 온 胡適(호적; 1891~1962)氏는 연구성과를 되돌아 보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짓고 있다.


中國佛敎史上最成功的革命者 印度禪的毁滅者 中國禪的建立者 袈裟傳法的僞史的製造者 西天二十八祖僞史的最早製造者 六祖壇經的最早原料的作者 用가造歷史來做革命武器而有最大成功者 這是我們的神會(胡適本, 425頁)
중국불교사상최성공적혁명자 인도선적훼멸자 중국선적건립자 가사전법적위사적제조자 서천이십팔조위사적최조제조자 육조단경적최조원료적작자 용가조력사래주혁명무기이유최대성공자 저시아문적신회(호적본, 425頁)


裴休拾遺問(배휴습유문)은, 신회가 북종선을 비판하면서 썼던 두 마디 '師承是傍(사승시방), 法門是漸(법문시점)'이라는 말로 끝을 맺고 있다. 神會가 성취한 역할을 이처럼 잘 드러낸 말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 신회사상의 성립과정에 관한 우수한 연구가 나왔다. 특히 伊吹敦(이취돈)씨와 松本史朗(송본사랑)씨 두 사람의 업적은 주목할 만하다.


첫째는 伊吹敦(이취돈)씨의 頓悟眞宗金剛般若修行達彼岸法門要決과 荷澤神會(돈오진종금강반야수행달피안법문요결과 하택신회)라는 논문이다. 그의 설에 의하면, 후에 智達(지달)이라는 법호를 가진 북종계 侯莫陳居士(후막진거사; 속명은 琰之(염지), 또는 琰이라고도 함)의 돈오설이 신회의 돈오설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돈황본 侯莫陳琰之居士撰(후막진염지거사찬) 頓悟眞宗金剛般若修行達彼岸法門要決(돈오진종금강반야수행달피안법문요결)과 돈황본 李慧光居士撰(이혜광거사찬) 大乘開心顯性頓悟眞宗論(대승개심현성돈오진종론)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저술이다.
이 두 저술의 관계에 최초로 주목한 사람은 柳田聖山(유전성산)씨다. 그 후 유전(柳田)씨는 [北宗禪의 思想]을 발표하고, 전자의 [要決(요결)]이 후자 [眞宗論(진종론)]의 영향을 받아서 성립되었다고 추측한 것이다.
이 설은 田中良昭씨도 계승하고 있다. 이취(伊吹)씨는 기본 자료인 [侯莫陳大師壽塔銘(후막진대사수탑명)]에서 후막진염찌거사의 전기를 확정하고 顯慶 5년(현경;660)부터 開元 2년(714)까지를 생몰년으로 추정한다.
그것은 [요결]에 있는 체州刺史 劉無得(체주자사 유무득)이 선천(先天) 원년(712) 11월 5일에 쓴 서문의 기록을 인정하여 그 년월에 의문을 가졌던 종래의 설과는 달리, 그 해야말로 [요결]이 성립된 해라고 하는 것이다.
그 해는 6조 慧能이 입적하기 전 해이자 당시 神會의 나이 30세였던 때이다. 당연한 것이지만 신회가 開元 18년(730) 滑台 大雲寺(골태 대운사)에서 北宗禪을 공격하기 전의 일이다. 神會가 頓悟(돈오)를 강조한 것은 北宗禪을 공격하기 위함이었다.


伊吹(이취)씨의 설에 의하면 侯莫陳琰之 居士(후막진염지 거사)가 이미 頓悟를 주장하고 있었으므로 신회의 돈오사상은 북종선의 영향 아래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神會說의 많은 근거가 이미 北宗禪에 있음을 인정하는 것은, 당연히 신회의 설이 북종선의 주장을 이용하면서도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므로 伊吹(이취)씨의 설은 주목해도 좋을 것이다.
단 侯莫陳琰之(후막진염지) 거사의 북종선을 북종선 중 어떠한 위치에 둘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앞으로 종합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要決(요결)의 지은이를 일단 후막진염지 거사라고 하였지만 이 사람에게 문제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요결]은 侯莫陳琰之居士가 智達禪師(지달선사)에게 질문하여 그 답을 기록한 문답형식을 취하고 있다. 같은 관계에 있는 眞宗論(진종론)이 李慧光(이혜광)과 大照禪師(대조선사)의 문답을 취하는 형식과 동일하다.
그러나 [후막진대사수탑명]이나 [요결]의 서문에서 알려진 侯莫陳居士는 俗名이 琰之(염지), 또는 琰(염)이며 法名은 智達(지달)일 전하고 있어 묻는 자와 답하는 자가 같은 인물로 되어 있다.
眞宗論에서 李慧光의 法名이 大照(대조)로 되어 있는 것과 같은 일이다. 伊吹(이취)씨는 [후막진대사수탑명]의 原刻(원각) 탁본이 존재하므로 내용에 신뢰성이 있다고 하지만 초기 선종사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탑명의 기사내용은 흔히 의뢰자의 형편에 맞게 서술된 것이어서 이 점을 전제로 논의를 진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상과 같이 남는 과제도 있다는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두 번째는 松本史朗(송본사랑)씨의 [金剛經解義와 神會]라는 논문이다. 松本씨는 이 논문에서 [금강경해의]가 六祖 慧能의 眞撰(진찬)이라는 획기적인 설을 제기하고 있다. 이제까지 [금강경해의]가 혜능의 眞撰이라는 설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많은 연구자들의 찬동을 얻지는 못했었다.
松本씨의 설은 그런 의미에서 참신한 문제제기다. 우선 神會의 저술 중에 확실한 금강경해의에 영향을 받아 그것을 인용하고 있는 것을 논증하고 있다. 금강경해의가 신회 이전에 성립되었다고 하는 주장은 큰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또 
금강경해의와 敦煌本(돈황본) 六祖壇經(육조단경)과의 관계도 자세히 검토하고, 돈황본 [육조단경]의 사상이 [금강경해의]를 알고서 창작했다고 한다.
단 松本씨의 설에서 마음에 걸리는 데가 있다. 앞서 말했듯, 神會가 저작하기 이전에 금강경해의가 존재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은 松本(송본)씨의 가장 주목할 만한 설이라고 필자도 생각하지만 그것을 慧能(혜능)의 眞撰(진찬)으로 직접 연관시켜도 좋을 것인가 하는 문제다.
신회 이전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을 신회가 혜능에게 師事(사사)한 이래 혜능이 직접 지은 [금강경해의]를 알고 있었다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지 어떨지는 의문이다.
요컨대 신회 자신에게 사상의 변화가 있었고, 애초부터 신회는 금강경해의를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것은 신회가 [금강경]을 선양한 것이 그의 말년이나 사후라고 생각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만일 혜능에게 [금강경해의]라는 저술이 있다는 것을 신회가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면 그의 북종선 공격은 다르게 전개되었으리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특히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것은,
神會가 王維(왕유)에게 의뢰하여 만든 六祖能禪師碑銘(육조눙선사비명)에 그 일이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또 혜능의 전기에 관해서는 石井本(석정본) [神會語錄(신회어록)]을 비롯하여 歷代法寶記(역대법보기) 曹溪大師傳(조계대사전) 돈황본 [六祖壇經] 등에 [금강경해의]라는 저술이 있었다고 표현한 데가 없다는 것이다.
현재 알려진 혜능의 전기도 후세의 요청에 의해 성립되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데 유독 [금강경해의]만을 혜능 당사자와 직접 결부시킨다는 것은 앞으로 검토할 과제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금강경해의가 神會 이전에 성립되었다는 松本씨의 주장에 대해서는 높히 평가하지만 그것이 혜능의 眞撰(진찬)인지 아닌지는 종합적으로 고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처럼 神會思想의 성립과정은 크게 재검토를 필요로 하지만 胡適(호적)이 지적한대로 禪思想史(선사상사)의 흐름에 神會가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틀림없다.
다 알려진대로 荷澤 神會의 法系는 裴休拾遺問(배휴습유문)을 설한 圭峰 宗密(규봉종밀: 780-841)의 시대에서 최후를 맞고 후에 발전하는 선종을 짊어질 수 없게 된다. 南宗禪은 北宗禪에 비해 우월을 주정하고 北宗禪은 傍系(방계)로 물러날 수밖에 없는 편치않은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으며,
그 후는 오히려 南宗禪 가운데서 어느 것이 정통인가를 주장하지 않으면 안될 시기가 되는 것이다. 남종선이 성립된 후에는 神會의 思想이 어떻게 성립되었는가.
神會가 北宗禪을 어떻게 공격했는가에 대해서는 禪宗敎壇(선종교단)에서는 문제삼지 않게 되었다. 발전 전개된 남종선은 북종선 멸망의 결과로부터 재출발했지만 그 경과는 더 이상 문제되지 않았다.


                  2. 荷澤 神會의 頓悟思想(하택 신회의 돈오사상)

荷澤 神會의 저술은 돈황에서 발견된 많은 禪續(선속) 중에서도 가장 일찍부터 관심을 끌고 연구되어 온 분야일 것이다. 神會의 傳記에 대한 연구도, 그의 塔銘(탑명)이 새로 발견 소개되면서 宗密 圓覺經大疏抄(원각경대소초)의 기술과 일치되는 嗣聖(사성) 원년(684)부터 乾元(건원) 원년(758)을 생몰년으로 보고, 그 타당성이 많이 논의되고 있다.
특히 최근 小川隆(소천륭)씨는 荷澤 神會의 傳記와 思想을 간결하게 정리하였다. 여기서는 이러한 종래의 성과를 넘어서 南宗禪에 있어서 頓悟思想의 전개를 검토하는 데 필요한 神會의 頓悟思想을 정리해 두기로 한다.


신회는 開元 20년(732) 정월 15일에 滑臺(河南省 滑臺;하남성 골대) 大雲寺에서 열린 無遮大會(무차대회)에서 北宗禪을 공격했다. 菩提達摩南宗定是非論(보리달마남종정시비론) 獨孤沛(독고패)의 序(서)에 의하면,
그 공격은 2년 전인 開元 18년부터 시작되었다고는 하나 菩提達摩南宗定是非論 본문이 남긴 것만으로 본다면 개원 20년이라는 기록만 전해진다. 개원 20년 神會는 49세였고, 최대의 공격상대였던 普寂(보적)은 82세였다.
普寂의 당시 세력으로 보아 이 공격은 타격이 되지 못했고 보적 측 또한 그것을 무시한 듯하다. 개원 27년 보적은 89세로 興唐寺(흥당사)에서 입적하였다. 그후 神會가 兵部 侍郞 宋鼎(병부시랑송정)의 부름에 응해서 洛陽(낙양)의 荷澤寺(하택사)에 주지하게 된 것은 天寶 4년(천보;745) 62세 때의 일이다.
신회는 북종선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는 한편, 남종선은 慧能이 顯彰(현창)했으며 그 七祖는 자신이라고 정당성을 강조했다. 그가 70세 되던 天寶 12년 御史 廬奕(어사 여혁)의 讒言(참언)으로 河南省 陽郡(하남성 양군)에 유배된 것은 북종선 공격이 과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유배지는 湖南省 均縣(호남성 균현)에서 天寶 13년 襄州(양주)로 옮겨지고, 같은 해 7월에는 荊州 開元寺(형주 개원사)로 옮겨진다. 이처럼 유배지가 4번씩이나 옮겨진 데에는, 圓覺經略疏抄(원각경략소초) 권4와 圓覺經大疏抄(원각경대소초)에 의하면, 모두 북종문화와 관련되어 있다고 전해진다.
신회가 아무리 북종선을 격렬하게 공격했다 하더라도 당시까지 아직 그의 주장이 완전히 인정되지 않았던 것은, 그가 유배라는 조치를 받았다는 사실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玄宗(현종) 황제 天寶 14년에는 친지를 발칵 뒤집을 만한 일대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이 그 유명한 安史(안사)의 亂(난)으로서 이 사건으로 현종의 총애를 받던 楊貴妃(양귀비)가 살해되고 현종은 蜀(촉)으로, 황태자는 朔方(삭방)으로 蒙塵(몽진)을 하게 된다.
신회는 安史의 亂을 평정하기 위한 비용으로 
香水錢(향수전: 出家를 허가해주고 받는 돈)을 모아다가 바친다. 얼마 안 있어 난이 끝나자 그 공이 인정되어 궁안에 들어올 수 있다는 허가를 받았다.
한편 전란에 의해 북종선의 근거지가 파괴되고 비호하던 사람들도 많이 죽어 북종선은 급속히 무너졌다. 神會는 7祖의 지위를 얻고 乾元(건원) 元年(758) 5월 13일 荊州(형주) 開元寺(개원사)에서 입적하여 洛陽(낙양) 寶應寺(보응사)에 장사지내졌다.


神會의 頓悟思想은 북종선 비판을 통해 완성되어 갔지만, 우선 신회의 저술 중에 돈오사상이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열거해 보기로 한다.
여기서 南陽和尙頓敎解脫宗禪門直了性壇語(
남양화상돈교해탈종선문직료성단어)와 菩提達摩南宗定是非論(보리달마남종정시비론)의 전후관계는, 전자의 [壇語(단어)]가 먼저 성립되고 후자의 定是非論(정시비론)이 뒤에 성립되었다는 설에 연구자들의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후자는 앞서 말했듯이 開元 20년에 행해진 북종선 공격에 대한 기록이다.
전자는 제목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신회가 그 이전인 개원 8년(720) 南陽 龍興寺(용흥사)에 있을 때 지은 것이라고 한다. 神會語錄은 계통적으로 늘려지고 발전되어 왔다.
南陽和尙問答雜微義(
남양화상문답잡미의) (s.6557), 胡適訂本 神會語錄 (p.3047)이나 石井光雄舊藏頓煌出土神會錄(석정광웅구장돈황출토신회록)의 성립과정은 일괄적으로 말할 수 없는 점도 있어서,
石井本 [신회어록]에는 신회 사후에 내용이 덧붙여졌을 가능성도 지적되고 있다. 신회어록의 초기작이 원래 南陽和尙問答雜徵義라고 말해지는 것은 신회의 남양시대가 포함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신회의 돈오사상을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예를 (A){壇語(단어)}와 (B)定是比論(정시비론)과 (c)石井本(석정본) 新會語錄(신회어록)에서 하나씩 뽑아보기로 한다.


(A) 壇語(단어)
知識 自身中有佛性 未能了了見 何以故 喩如此處各各思量家中住宅 衣服臥具 及一切等物 具知有 更不生疑 此名爲知 不名爲見 若行到宅中 見如上所說之物 卽名爲見 不名爲知 今所覺者 具依他說知身中ㅇ有佛性 未能了了見但不作意 心無有起 是眞無念 畢竟見不離知 知不離見 一切衆生本來無相 今言相者 병是妄心 心若無相 卽是佛心 若作心不起 是識定 亦名法見 心自性定 馬鳴云 "若有衆生觀無念者 卽爲佛智故" 今所說般若波羅蜜 從生滅門 頓入眞如門 更無前照後照遠看近看 都無此心 乃至七地以前菩薩 都總慕過 唯指佛心 卽心是佛 經云 "當如法說" 口說菩薩 心無住處 口說涅槃 心說寂滅口說解脫 心無繫縛 "向來指知識無住心知不知" 答 "知"(胡適本 246~247頁, 鈴木本29~31, 313~314頁)
지식 자신중유불성 미능료료견 하이고 유여차처각각사량가중주택 의복와구 급일체등물 구지유 갱불생의 차명위지 불명위견 약행도택중 견여상소설지물 즉명위견 불명위지 금소각자 구의타설지신중ㅇ유불성 미능료료견단불작의 심무유기 시진무념 필경견불리지 지불이견 일체중생본래무상 금언상자 병시망심 심약무상 즉시불심 약작심불기 시식정 역명법견 심자성정 마명운 "약유중생관무념자 즉위불지고" 금소설반야파라밀 종생멸문 돈입진여문 갱무전조후조원간근간 도무차심 내지칠지이전보살 도총모과 유지불심 즉심시불 경운 "당여법설" 구설보살 심무주처 구설열반 심설적멸구설해탈 심무계박 "향래지지식무주심지불지" 답 "지"(호적본 246~247頁, 영목본29~31, 313~314頁)

(B) 定是非論(정시비론)
遠法師問 "如此敎門(引用者注, 北宗禪をさす) 豈非是佛法 何故不許" 和上答 "皆爲頓漸不同 所以不許 我六代大師一一皆言 單刀直入 直了見性 不言階漸 夫學道者須頓見佛性 漸修因緣 不離是生 而得解脫 臂如母頓生子 與乳 漸漸養育 其子知惠自然增長 頓悟見佛性者 亦復如是 知惠自然漸漸增長所以不許"(胡適本 286頁)
원법사문 "여차교문(인용자주, 북종선をさす) 기비시불법 하고불허" 화상답 "개위돈점불동 소이불허 아육대대사일일개언 단도직입 직료견성 불언계점 부학도자수돈견불성 점수인연 불리시생 이득해탈 비여모돈생자 여유 점점양육 기자지혜자연증장 돈오견불성자 역복여시 지혜자연점점증장소이불허"(호적본 286頁)
(C) 神會語錄(신회어록)
志德法師問 "禪師今敎衆生 唯令頓悟 何故不從小乘而引漸修 未有昇九層之台 何由階漸而登者也" 答日 "只恐畏所登者 不是九層之台 恐畏漫登著土胡塚 若是實力層之台此卽頓悟義也 今於頓中而立其漸者 卽如登九層之台也要籍階漸 終不向頓中而立漸義 事須理智兼釋 謂之頓悟 병不由階漸 自然是頓悟義 自心從本己來空寂者 是頓悟 卽心無所得者爲頓悟 卽心是道爲頓悟卽心無所住爲頓悟 存法悟心 心無所得 是頓悟 知一切法是一切法 爲頓悟 聞說空不著空我 卽不取不空 是頓悟 聞說我不著 卽不取無我 是頓悟 不捨生死而入涅槃 是頓悟 又有經云 '言自然智 無師智' 於理發者向道疾 外修者向道遲 出世而有不思議事 聞說者卽生驚疑 今見在世不思議事有頓者 信否" 問日 "其義云何 願示其要"
지덕법사문 "선사금교중생 유령돈오 하고불종소승이인점수 미유승구층지태 하유계점이등자야" 답일 "지공외소등자 불시구층지태 공외만등저토호총 약시실력층지태차즉돈오의야 금어돈중이입기점자 즉여등구층지태야요적계점 종불향돈중이립점의 사수리지겸석 위지돈오 병불유계점 자연시돈오의 자심종본기래공적자 시돈오 즉심무소득자위돈오 즉심시도위돈오즉심무소주위돈오 존법오심 심무소득 시돈오 지일체법시일체법 위돈오 문설공불저공아 즉불취불공 시돈오 문설아불저 즉불취무아 시돈오 불사생사이입열반 시돈오 우유경운 '언자연지 무사지' 어리발자향도질 외수자향도지 출세이유불사의사 문설자즉생경의 금견재세불사의사유돈자 신부" 문일 "기의운하 원시기요"

答曰 "如周太公·殷傳說 皆竿釣板築 而簡在帝心起自匹夫 爲頓登台輔 豈不是世間不思議事 出世不思議者衆生心中 具足貪愛無明宛然者 但遇眞正善知識 一念相應 便成正覺 豈不是出世不可思議事又經云 '衆生見性成佛道' '龍安須臾頓發菩提心, 便成正覺' 又 '令衆生入佛知見' 若不許頓悟者 如來卽合편說五乘 今旣不說五乘 唯言衆生入佛知見 約斯經義 只顯頓門 唯在一念相應 實更不由階漸 相應義者 謂見無念 見無念者謂了自性 了自性者謂無所得 以其無所得 卽如來禪 維摩詰言 '如自觀身實相者 觀佛亦然' 我觀如來 前際不來 後際不去 今則無住 以無住故 卽如來禪又經云
답왈 "여주태공·은전설 개간조판축 이간재제심기자필부 위돈등태보 기불시세간불사의사 출세불사의자중생심중 구족탐애무명완연자 단우진정선지식 일념상응 편성정각 기불시출세불가사의사우경운 '중생견성성불도' '용안수유돈발보제심, 편성정각' 우 '영중생입불지견' 약불허돈오자 여래즉합편설오승 금기불설오승 유언중생입불지견 약사경의 지현돈문 유재일념상응 실갱불유계점 상응의자 위견무념 견무념자위료자성 요자성자위무소득 이기무소득 즉여래선 유마힐언 '여자관신실상자 관불역연' 아관여래 전제불래 후제불거 금칙무주 이무주고 즉여래선우경운

'一切衆生本來涅槃 無漏性智 本自具足' 欲擬善分別自心現與理相應者 離五法三自性 離八識二無我 離內見外見 離有無二法 畢竟平等 湛然常寂廣大無邊 常恒不變 何以故 本自性淸淨 體不可得故 如是見者 卽見本性 若人見本性 卽坐如來地 如是[見]者 離一切諸相 是名諸佛 如是見者恒沙妄念一時俱寂 如是見者恒沙淸淨功德一時等備 如是見者 名爲無漏智 如是見者名一字法門 如是見字六度圓滿 如是見者名法眼淨 如是見者 謂無所得 無所得者卽是眞解脫 眞解脫者卽同如來 知見廣大深遠 一無差別故 如是知者 卽是如來應供正遍智 如是見者 放大智慧光 照無余世界 所以者何 世界卽心也言心應[洪]正遍知 此者正言心空寂坑無余念 故言照無余世界
'일체중생본래열반 무루성지 본자구족' 욕의선분별자심현여리상응자 이오법삼자성 이팔식이무아 이내견외견 이유무이법 필경평등 담연상적광대무변 상항불변 하이고 본자성청정 체불가득고 여시견자 즉견본성 약인견본성 즉좌여래지 여시[견]자 이일체제상 시명제불 여시견자항사망념일시구적 여시견자항사청정공덕일시등비 여시견자 명위무루지 여시견자명일자법문 여시견자육도원만 여시견자명법안정 여시견자 위무소득 무소득자즉시진해탈 진해탈자즉동여래 지견광대심원 일무차별고 여시지자 즉시여래응공정편지 여시견자 방대지혜광 조무여세계 소이자하 세계즉심야언심응[홍]정편지 차자정언심공적갱무여념 고언조무여세계

諸學道者 心無靑黃赤白黑 亦無出入去來遠近前後 亦無作意 亦無不作意 若得如是者 名爲相應也 若有出定入定及一切境界 非論善惡等皆不離妄心 병有所得 以有所得 병是有爲 全不相應 若其決心證者 臨於三軍際 白刀相向下 逢丸解身日見無念 堅如金剛 毫微不動 縱使恒沙衆生一時俱滅 亦不起一念悲心者 此是大丈夫 得空平等心 若有坐者 凝心入定 住心看淨 起心外照 攝心內澄者 此是障菩提 未與菩提相應 何由可得解脫 解脫菩提若如是 舍利弗宴坐林間 不應被維摩詰訶 訶者云 '不於三界現身意 是爲宴坐也' 但一切時中見無念 不見身相 名爲正定 不見心相 名爲正慧(鈴木本21, 261~265頁, 胡適本30, 130~134頁)"
제학도자 심무청황적백흑 역무출입거래원근전후 역무작의 역무불작의 약득여시자 명위상응야 약유출정입정급일체경계 비론선악등개불리망심 병유소득 이유소득 병시유위 전불상응 약기결심증자 임어삼군제 백도상향하 봉환해신일견무념 견여금강 호미불동 종사항사중생일시구멸 역불기일념비심자 차시대장부 득공평등심 약유좌자 응심입정 주심간정 기심외조 섭심내징자 차시장보제 미여보제상응 하유가득해탈 해탈보제약여시 사리불연좌림간 불응피유마힐가 가자운 '불어삼계현신의 시위연좌야' 단일체시중견무념 불견신상 명위정정 불견심상 명위정혜(영목본21, 261~265頁, 호적본30, 130~134頁)"

이상 3가지 예에 나타난 神會의 頓悟思想을 2가지 문제로 좁혀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2가지 문제란, 
첫째 신회의 돈오사상이란 어떤 것이며 어떤 특색을 가지고 있는가, 둘째 신회의 頓悟漸修說(돈오점수설)에는 어떤 문제점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먼저 첫 번째로 신회의 돈오사상이란 어떤 것이고, 어떤 특색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검토해 보자.
이 경우 주목할 만한 용례는 (A) 壇語(단어)에 인용된 문장일 것이다.
여기서의 馬鳴(마명)의 말이란 起信論(기신론)을 가리킨다. 이 起信論과 頓悟說이 결부되고 있는 것이다. 기신론은 다 알려진대로 중국 · 한국 · 일본의 불교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논서이다. 기신론은 大乘起信論이라고도 하는 바와 같이 대승의 바른 믿음을 일으킬 것을 설하고 있다.
[기신론]에서는 大乘(摩訶衍)을 두 가지 측면에서 설한다. 즉 대승의 신심을 일으키는 근거가 되는 一心(衆生心:중생심)과 이 一心을 어째서 大乘이라고 하는가 하는 意義(의의)를 보여주는 것이다. 
一心은 迷惑(미혹)한 세계로서의 世間法과 生死를 초월한 깨달음의 세계인 出世間法을 다 포함한다. 이 一心에 의해 
일심의 體(체)인 心眞如門(심진여문)과 일심의 用(용)인 心生滅門(심생멸문)의 뜻을 보여준다.
또 이 일심이 범부에 있다해서 줄어드는 일이 없고 부처에 있다해서 늘어나는 일이 없다는 
體大(체대)와 일심이 여래의 무량한 공덕을 갖추고 있다는 相大(상대)와 일심이 세간 출세간의 모든 善因果(선인과)를 생한다는 用大(용대)의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결국 一心二門三大를 골격으로 설하고 있는데, 二門이란 心眞如門과 心生滅門이고, 三大란 體大 相大 用大를 말한다.
이 사상은 각각 다르게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일심을 근원에 두고 그 근원으로부터 모든 것이 갈라져 나오며, 다시 모든 것이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사고에 중점이 두어져 왔다. 起信論은 修證論(수증론)에도 영향을 주었다. 本覺(본각)과 不覺(불각)과 始覺(시각)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心眞如門과 心生滅門은 동일한 衆生心(중생심)의 양면이다.
不覺이란 자기의 현실적인 迷惑(미혹)을 말한다. 그러나 불각 중에는 미혹해 있는 자신을 부정하는 자각이 있고, 수행해 나아가면서 깨달아[悟]가는 지혜, 즉 깨달음[覺]으로의 단계적인 진전이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수행의 모든 단계를 始覺(시각)이라고 한다.
수행이 완성되므로해서 始覺은 本覺에 합치[合體(합체)]된다.
(A) 壇語에서는 生滅門으로부터 眞如門으로 들어가는 方便(방편)을 頓(돈)이라 하나 여기서는 十地(십지)의 第七 遠行地(원행지)로부터 第八不動地(부동지)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다시 頓悟(돈오)가 卽心卽佛(즉심즉불)이라는 말로 표현되며, 반드시 보살의 단계적 수행을 전제로 하는 것은 아니고 오랜 기간의 수행이 요구되어지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A)의 첫부분에 인용된 [기신론]의 다음과 같은 설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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