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불교

간화선과 묵조선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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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화선과 묵조선

 

 

 

1. 선의 기원

 

2. 간화선 이해

 

3. 묵조선 이해

 

4. 간화선과 묵조선

 

* 참고서적

 

 

 

  

1. 의 기원 

 

일찍이 서산대사께서는 <禪家龜鑑>에서  "부처님께서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하신 것은 禪旨가 되고, 한 평생 말씀하신 것은 敎門이 되었다. 그러므로 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는 부처님의 말씀이다."고 밝혀 놓았다.  마하가섭이 부처님으로부터 세 곳에서 선의 등불을 받으신 三處傳心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다자탑 아래에서 자리를 절반 나누어 앉으신 것이다.  어느날 부처님이 제자들을 모아놓고 설법을 하고 있는데 가섭이 누더기를 입은 초라한 모습으로 뒤늦게 참석하였으나 사람들이 선뜻 자리를 양보해주지 않았다. 이에 부처님이 설법을 하시던 중 앉으셨던 자리를 반으로 나누어주시면서 가섭에게 앉으라고 하셨다는 일화이다.

둘째는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이심이다. 어느 날 부처님이 영취산에서 대중들을 모아놓고 설법을 하시는데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 그 가운데서 연꽃 한 송이를 들어 보이니 대중은 전부 의아해 하는데 가섭만 빙그레 웃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가섭에게 "나의 正法眼藏 涅槃妙心을 가섭, 너에게 부촉하노라"고 선언하셨다.

셋째는 사라쌍수 아래에서 관 속으로부터 두 발을 내어 보이심이다부처님이 열반에 드시자 부처님의 시신을 베옷으로 싸고 몇 겹의 관에 모셔두고 다비식을 하려고 준비해 두었는데, 열반에 드신지 7일이 지난 후에 먼 곳에 갔다가 늦게야 도착한 가섭이 관 주위를 세 번 돌고 세 번 절하자 관 밖으로 부처님이 두 발을 내어 보이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以心傳心으로 법을 전해 받은 마하가섭은 선종의 초조가 되었고, 그 맥을 이은 27菩提達磨가 동쪽으로 건너와 중국 선불교가 일어난다. 이 후 2조 혜가(慧可), 3조 승찬(僧璨), 4조 도신(道信), 5조 홍인(弘忍), 6조 혜능(慧能)에 이르러 중국의 고유의 선풍을 드날려 선종이 꽃피게 되었다.

 

선종을 실제로 정착시킨 분은 육조혜능이며, 그의 제자 하택신회는 대통신수의 선을 북종선이라 칭하고, 육조혜능의 선을 남종선이라 칭하였다. 그리고 북종선은 점진적인 깨달음을 추구하는 漸修法으로 조사선의 傍系라고 치부하고, 혜능의 남종선이야 말로 달마가 전한 정통 頓悟法이라고 했다.

이후 남악회양, 마조도일을 거쳐 백장회해에 이르러 백장청규가 제정되면서 교단으로서의 선종이 성립되었고, 이후 중국 고유의 독자적인 특색을 발휘하며, 五家七宗으로 전개되었다. 오가칠종은 달마선풍에 뿌리를 두고, 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 공통 종지로 삼는 돈오법을 주장한다. 또한 문자나 경론에 의지하지 않고 스승이 바로 제자로 하여금 마음을 보도록 지도하여 見性成佛케 하기에 祖師禪이라고도 불리었다.[師資相承] 그 중에서도 후대에 까지 이어져 온 것은 임제계와 조동계의 선풍이었다.

11세기 후반 이후로 중국선의 가풍이 정형화된 틀에 편중되는 것을 우려하면서 새로운 출구를 모색하였고, 이윽고 조동종 가풍을 이은 宏智正覺(1087-1157), 임제종 양기파의 가풍을 계승한 大慧宗杲(1089-1163)이 각기 黙照禪看話禪 주창하기에 이르렀다.

 

혜능 ┌남악회양-마조도일-백장회해 ┌황벽희운-임제의현 [임제종]

│ │

│ └위산영우-앙산혜적 [위앙종]

└청원행사-석두희천 ┌약산유엄-운암담성-동산양개-조사본적 [조동종]

└천황도오-용담숭신-덕산선감-설봉의존 ┌운문문언 [운문종]

└현사사비-나한계침-법안문익 [법안종]

 

 

 

2. 간화선 이해 大慧宗杲看話禪修行 - 話頭

 

1) 간화선의 개요

 

看話禪은 선종의 오가중 하나인 임제종을 그 근간으로 하는 禪風으로 나라의 大慧禪師에 의하여 宣揚되어 그 禪風나라 나라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세력을 떨쳤다.

간화선에서 看話란 화두를 본다는 뜻으로, 화두를 참구하여 단박에 깨달음에 이르는 돈오수행법이다. 대혜종고는 화두의 기능을 혼침과 산란을 제거하는 것과 깨침에 도달하는 직접적인 수단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간화선은 화두에 의심을 두고, 그 힘으로 마음에 달라붙은 망념을 잘라내어 몰록 깨닫는 것이 핵심이다.

마조도일의 平常心是道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간화선은 일상생활 속에서 화두를 들어 생활을 수행과 일치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때문에 편안하게 몸을 안정시켜서 번뇌망상을 제어하는 것만이 아니라 行住坐臥 黙動靜一切處 一切時에 화두에 일념으로 들어가야 한다.

여기서 화두를 든다는 것은 公案의 말머리를 놓지 않고 의심을 키워가는 것으로 公案參究라고도 한다. 화두에 대한 의심을 해결하는 것이야 말로, 지상의 과제이며, 의정의 덩어리를 부수어야 비로소 부처를 알고, 조사를 알고, 自性을 알고, 법을 알게 된다. 따라서 공안은 분별심을 버리게 하는 절대적 방편이자 자성을 비추는 도구이다.

간화선에서는 깨달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벙어리가 꿈을 꾸었으나 꿈에서 본 것을 표현하지 못한 것과 같다며, 비유와 상징만을 통해 표현할 뿐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고 있다. 다만, 사량분별에 얽매이지 않고 천지우주와 자기가 하나가 되어 能所泯絶하여 所觀能觀不二一體가 되는 無碍淸淨한 작용이라고 설명할 뿐이다. 이는 깨달음의 단계를 인정하면서도 깨달음의 구조를 논하기보다는 자성을 밝히는 데 중점을 둔 것으로 철저히 중국적 사유방식에 기초하여 탄생한 수행법이다.

이러한 간화선은 초심자와 구참수행자 모두가 겪게 되는 산란심과 혼침을 제어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면서 등장했고, 이와 같은 산란심과 혼침을 제거하고, 나아가 본래의 면목을 구현하는 방식의 수단으로 화두를 드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2) 구체적인 수행법

 

화두에 대한 간절한 의심으로 화두일념의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대게 생각대로 화두가 들리지 않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좌선이 습관적으로 몸에 배지 않은 탓이고, 둘째는 경험이 부족한 까닭이며, 셋째는 화두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의 부족이고, 넷째는 마음을 간절하게 화두에 매어두지 않기 때문이다. 첫째와 둘째는 자꾸자꾸 반복을 통해서 어느 정도 극복할 수가 있다. 그리고 셋째는 발심의 문제에 관련되어 있어 일단 구도심을 낸 사람이라면 그 지속성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넷째의 산란심과 혼침이 생기는 것은 마음이 간절하지 않기 때문인데, 화두수행에 대한 간절한 마음은 당사자가 의도적이며 반복적으로 발원해야 증장한다.

그래서 高峰原妙는 화두수행의 기본원칙으로 大信根大疑問大憤志 세 가지 원칙을 제시하였는데, 이를 구족하는 것이 올바른 간화선 수행방법이라 하겠다.

첫째, 大信根은 자신이 화두수행을 통해서 반드시 깨침에 이른다는 사실과, 화두수행을 이루어낼 수 있다는 자기자신을 통째로 믿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의 인과법만큼이나 명확한 명제이기도 하다.

둘째, 大疑問大信根의 바탕 위에서 화두 자체에 대한 疑情을 키워가는 것이다. 이는 화두에 대한 사량분별적 접근방식을 놓아버리고, 하나의 화두에 전념하면 그것이 내면에 깊숙하게 의문덩어리로 자리잡게 된다. 여기에서 지상 과업으로 본질적 의문을 자기 스스로 해결하기위해, 화두에 대한 의심을 지속적으로 진행시켜 나가면, 점차 일상생활에서 한순간도 의심을 놓지 않고, 의심의 덩어리가 더욱 커지고 백척간두에 선 듯, 마음이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화두일념이 지속되면, 꿈속에서도 이어지는 몽중일여의 상태에 도달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을 타파할 수 있는 하나의 계기가 생긴다. 이것이 화두타파의 기연이다. 기연을 만나기 전까지 오로지 의심만 있을 뿐이다.

셋째, 大憤志는 위의 화두를 줄기차게 진행시켜 나아가는 정진이다. 이 세상에 한 번 태어나지 않은 셈치고 화두를 들다가 죽을지언정 의정에서 물러나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여기에 깨침을 기다리는 미혹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은 금물이다.

 

 

3) 믿음의 중요성

 

대혜종고는 「辨邪正에서 妙圓道人에게 제시한 8가지 원칙 가운데 마지막으로 강조하는 항목이 을 지녀라는 것이며, 에 근거하여 화두를 들라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래의 경지를 알고자 하면 지니고 있으면 됩니다. 이미 지니고 있다면 굳이 마음을 일으켜 생사를 벗어나고자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하루종일 여의지 않고 반드시 손안에 꼭 쥐고 있으면 그것이 곧 용맹지사입니다. 만약 반신반의하면 상속되지 못합니다. 깨침이라는 것은 남녀귀천大小(어른과 아이)를 막론하고 평등일여합니다. 왜냐하면 세존께서는 法華會上에서 단지 한 여성을 성불시켰을 뿐입니다. 그리고 열반회상에서는 또한 단지 한 廣額屠兒 성불시켰을 뿐입니다.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 이 두 사람의 성불은 다른 공용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곧바로 으로 성불시켰을 뿐 다른 第二念 없었습니다. 앉아 있는 그 자리에서 報化佛 넘어 곧바로 생사를 벗어난 것일 뿐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묘원도인께서는 비록 여성이기 합니다만 그 立志 위에서 성불한 여자보다 못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기특한 인연을 알아서 결정코 생사의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편지를 통해서 간절히 저한테 가르침을 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저는 묘원도인을 위하여 붓을 들고 정성을 기울여 글을 통해서 그 가르침을 드리는 것입니다. 권하노니 부디 화두를 드십시오.

 

신심이 갖추어지면 화두를 정하여 지속적으로 밀고 나아가야 한다. 이것저것으로 바꾸면 마치 부싯돌에서 불을 붙이는 같아서 도중에 멈추거나 다른 것으로 바꾸어서는 불이 붙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오늘은 이 화두, 내일은 저 화두 하면서 좋다는 것을 따라 자주 바꾸기도 한다. 오로지 한 우물을 파야 한다. 이것이 화두를 통한 不退轉의 용맹심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신심이 필요하고 신심은 지속적인 용맹심이 필요하다는 도리이기도 하다.

 

 

3. 묵조선 이해 宏智正覺 黙照禪修行 - 坐禪

 

1) 묵조선의 개요

 

묵조선은 당대의 동산양개의 조동종을 근간으로 명맥이 이어지면서 밀밀면면 只管打坐를 주장하는 宏智正覺(1087-1157)에 의하여 본격적으로 그 선풍을 드날리게 되었다.

묵조선에서 묵조라는 말은 원래 승조법사의 <肇論>에 있는 “성인은 깊은 마음으로 묵묵히 비춘다”는 말에서 유래되었으며, 묵조선이라는 말은 대혜종고가 간화선을 주장하면서 굉지정각의 선법을 默照邪禪이라고 비판하면서부터 생긴 상대적인 용어였다. 하지만 조동종의 굉지정각은 오히려 黙照라는 용어를 통해 자신의 선풍을 고취시켰고, 그 후 조동종의 선승들이 일체의 분별과 망상을 끊고 고요히 좌선함으로서 심성 그 자체의 미묘한 작용을 깨닫는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용어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일체가 그대로 本證임을 자각하는 것이고, 이라는 의 행위를 통해 라는 선의 妙用을 터득하는 것이 묵조선인 것이다.

여기서 묵조의 語義를 살펴보면 네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로 「黙黙히 비춘다」고 해석하여, 주체인 내가 이미 여기 좌선하는 존재로 있으면서 스스로가 諸法根源임을 묵묵한 상태로 비추어 보는 것이다. 둘째로 「이 비춘다」로 해석하는 것이다. 나 자신이 곧 그 자체가 되어 본래 깨쳐있음을 비추어 보는 것이다. 黙黙히 비출 때는 좌선 속에 내가 있지만, 이렇게 「이 비춘다」로 해석하게 되면 깨달음 속에 자신이 있는 것이다. 셋째는 「을 비춘다」로 이해하는 것이다. 좌선속의 내가 이미 완성되어있는 부처라는 것을 의 미묘한 활용을 통해 관찰하는 것이다. 이는 本覺佛性이 하나가 되는 상태이다. 네 번째가 「을 하면서 비춘다」는 것이다. 이는 좌선하는 내가 바로 이면서, 으로 本證을 비추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가 각각이면서 동시에 이고, 이 되는 墨照가 이루어진다.

<黙照銘>에 의하면 이라는 것은 묵묵히 일체의 언어를 끊고 좌선할 때 영묘한 작용이 분명한 깨달음의 세계로서 그대로 드러난다. 비출 때에는 확연하여 텅 비어있지만 그 본성은 영묘히 작용하고 있다. 영묘히 작용하여 깨달음의 세계를 비추며, 깨달음의 세계는 언어와 분별을 초월하고 있다고 전한다. 사량분별을 초월한다는 점에서 간화선의 입장과 다르지 않다.

묵조선에서 깨달음은 은 따로 차별되어 있지 않으므로, 이미 諸佛同體상태에 있다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修證不二] 모든 사람들에게 이미 부처의 경지가 완벽하게 本其되어 있으므로 이를 그대로 체득해 드러내면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묵조선은 개개인 자신에게 구족된 불성의 本其性을 모르고 외경으로 향하는 마음을 멈추고 자신의 본래성과 합일된 삶을 살려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중생 모두가 본래 깨달음의 상태에 있다는 것의 인정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실로 일체의 모든 만물이 부처라는 사상에 입각한 묵조선은 우주의 모든 만유가 그대로 진실임을 나타내는 인간 정신의 혁명을 나타낸다. 묵묵히 只觀打坐하여 앉아 있지만 그 打坐한 곳에서의 정신적 역동성은 우주의 모든 만유를 포함할 수 있는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며, 좌선이야 말로 일체 본성인 불성을 자각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2) 구체적인 수행법

 

묵조의 굉지정각에게 있어서 좌선은 그자체가 바로 수행이고 깨침의 행위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 곧 이고, 는 곧 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그리고 좌선을 통한 墨詔야 말로 그 자체가 좌선의 본실체임을 나타내는 것이며, 좌선이 바로 妙用임을 그대로 자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좌선을 통해 一切處 一切時에 삼매가 현전하는 現成公案의 묵조선의 세계가 펼쳐진다고 한다.

현성공안 중 현성은 현재 이루어져 있다는 것으로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완벽하게 완성되어 있는 상태라는 것을 의미한다. 원래 공안의 사전적 의미는 틀림없는 사실을 뜻한다. 간화선에서 말해지는 공안은 화두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데, 묵조선에서 말하는 공안과 관련한다면, 하나하나가 이미 완성된 불법의 경지라는 것이다. 때문에 굉지정각의 공안은 진리와 다르지 않고, 이러한 진리가 현상 속에 그대로 완벽하게 드러나 있는 것이 바로 현성공안이다. 현상세계 모두가 부처의 도리가 아님이 없다는 것이다. 굉지는 이러한 現成公案의 의미를 간혹 見成公案으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것도 공안의 현현이라는 범위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세계가 그대로 부처의 세계이니, 오직 일체의 모든 것이 부처의 상태와 같다는 것을 자각하고, 그대로 합일시키면 된다는 것이다. 결국 묵조선에서 수행의 목적은 일체를 부처님과 일치시키는 것이다.

또한 좌선함에 있어 非思量으로 의식을 이어갈 것을 강조한다. 사량이 아니라 해서, 무념무상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나 무의식의 정신작용이 완전히 없어진 상태의 순수한 의식활동이다. 원래 무자성이기 때문에 번뇌작용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저절로 사라진다는 것이다. 옳고 그름의 분별과 언어문자를 초월한 절대 진리로서 비사량의 경지는 결국 불립문자의 경지로 이어진다. 곧 묵조선의 좌선은 단순히 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는 의미라기보다는 一切處을 내지 않고 取捨를 버리며 一切行爲行住坐臥에 있어서 直心을 지니고 나아가는 마음의 자세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묵조선의 좌선은 달마의 벽관수행과도 통한다. 묵조선의 입장에서는 달리 의지할 하나의 가르침[一乘]도 없고, 달리 닦을 萬行도 없으며, 달리 벗어날 三界도 없고, 달리 알아야 할 萬法도 없다. 여기서 바야흐로 黙照八不이 등장한다. 곧 벗어나려고도 않고[不出], 남아 있으려고도 않으며[不在], 없어지지도 않고[不壞], 걸림도 없으며[不礙], 굴리려고도 않고[不轉], 알려고도 않으며[不了], 분연도 없고[不紛], 소란스러움도 없다[不擾]. 그래서 문득 확연히 드러난 몸을 보게 된다. 그 몸은 소리와 색깔에서도 방해받지 않고 잠을 자며, 소리와 색깔에서도 앉고 누우면서 모든 상대적인 것들을 끊어버린다. 그리고 항상 광명이 현전하여 깨침을 열어 알음알이의 경계를 초탈한다. 이처럼 될 때 비로소 원래 닦아서 지닐 것이 없고, 일찍이 染汚된 적이 없어서, 무량겁동안 本來具足되어 일찍이 털끝만치도 모자람이 없고, 일찍이 털끝만치도 남음이 없음을 알게 된다고 한다.

 

3) 믿음의 중요성

 

묵조선에서는 부처님의 좌선을 자신이 직접 행하는 가운데, 일체가 그대로가 부처임을 믿을 것이 필연적으로 강조된다. 묵조선에서의 좌선은 수단이나 과정이 아니요 바로 깨침의 모습이기 때문에 信心이 바탕이 되어야 깨달음의 자각이 가능하며, 本證自覺信心은 서로가 不一不二의 관계로서 구족되어 있다. 때문에 본래 실 한 오라기의 부족함도 없고 벗어남도 없어서 근본으로부터 텅 비고 확철하다는 것을 믿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수행자에게 신심은 발심의 근원이며, 모든 보살행의 시작이다. 그래서 수행과 깨침을 위한 기초이면서 궁극적으로는 보살행의 완성이기도 하다. 화엄경에서 말한 “믿음은 깨침의 근본이요, 공덕의 어머니이다.[信爲道元功德母]”는 것은 수행과 깨침의 근본이 신심이라는 것을 표현한 말이다. 생사를 해탈하기위해서는 견고한 신심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 이는 진리를 믿고 우리의 자성을 믿으며 수행하면 성불한다는 가르침은 묵조선의 입장과 상통한다.

 

 

 

4. 간화선과 묵조선

 

간화선은 行住坐臥 黙動靜 가운데서 화두를 참구함으로써 마음자리를 찾을 것을 강조하고, 묵조선은 좌선을 통해서 妄緣을 멸하면 그대로 부처의 깨달음이라고 가르친다.

이러한 간화선과 묵조선은 공안에 대한 입장에서부터 궁극적인 목표인 깨달음에 대한 인식, 수행방법 전반에서 그 성격이 상반되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표로 요약된다.

 

 

간화선

묵조선

주창자

양기파의 대혜종고   

조동종의 굉지정각

공안관

無字公案의 절대화

現成公案

修證觀

先修後證, 先定後慧

修證一如, 本證自覺

話頭一念, 見性

坐禪一如, 非思量

수행방식

公案參究, 一行三昧

黙照坐禪, 只管打坐

성 격

動中定, 悟後成佛, 大悟禪

定中動, 本證習佛, 無事禪

비 판

待悟禪, 梯子禪

暗證禪, 墨照邪禪

 

본래 간화선이라는 용어도 굉지정각 쪽에서 대혜종고의 禪風을 비방한 말이었고 묵조선이라는 말은 대혜종고 편에서 굉지정각의 선풍을 비난한 말이었던 점에 비추어 보면, 이들 사이의 法擧揚의 공방전이 매우 치열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대혜종고가 묵조선에 대해서 퍼부은 맹렬한 공격에 비해서 굉지정각의 대응은 그다지 맹렬하지는 않았다. 묵조선답게 침묵을 했다고도 할 수 있다.

간화선 쪽에서 묵조선을 평하기를 ‘枯禪’이라고 한다. 묵조선이란 마른 나무와 같이 그저 묵묵히 앉아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고목과 같아서 피가 통하지 않는 시체와 같고 불꺼진 재와 같은 이라고 평해서 ‘고목사회선(枯木死灰禪)’이라고도 한다. 뿐만 아니라 다만 묵묵히 앉아 있을 뿐 교리에 대한 공부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無事禪’이라고 비난했다. 또 맹목적으로 앉아 있을 뿐 불교에 대해서 無知하고 내용이 없는 선이라고 해서 ‘暗證禪’痴禪盲禪’이라고 했다. 대혜종고는 이것도 모자라서 「辯正邪說」에서 굉지정각의 묵조선을 깨달음을 무시하는 ‘欺瞞禪’邪禪’이라고 규정하였다.

대혜종고는 이같이 평상시의 설법에서까지 굉지정각에 대한 공격을 늦추지 않았다.

 

만약 참선하는 자가 반드시 오묘한 깨달음이 있다고 믿으면 내가 있는 이곳에서 공부를 하라. 그러나 만약 깨달음을 지엽(枝葉)이라고 믿는다면 다른 곳으로 가서 공부를 해라. 나는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옆 산(천동산)에 천동화상이 있다. 그이는 으뜸가는 宗師이다. 내가 여러 곳으로 스승을 찾아다니며 법을 묻고 있을 때 그분은 이미 衆僧 第一座 차지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그 분의 뛰어난 높은 제자도 있다.

그대는 그 분에게 진정으로 물으라. 만약 깨달음을 지엽(枝葉)이라고 하면, 나는 그러한 사람은 눈먼 장님이라고 한다.

 

대혜종고의 맹렬한 공격에 대해서 굉지정각은 이렇게 대응하였다.

 

오직 고요히 앉아서 묵묵히 참구하여야 깊이 이르는 곳이 있다. 밖으로 유전(流轉)하는 인연(因緣)의 영향을 입지 않고 그 마음이 비면 만물을 받아들이고 그 비춤이 오묘하면 만사를 바로잡는다. 안으로 반연에 이끌리지 않으면 확연하여 홀로 밝고 견줄 것 없이 신령해서 스스로 깨닫는다. 진실로 해야 할 것은 이것뿐이다.

 

대혜종고는 이렇게 대응하는 굉지정각을 천동산으로 찾아 간다. 그때가 1156, 굉지정각이 입적하기 1년 전이다. 이 자리에서 두 선사가 어떠한 말을 주고받았는지 전해지지 않으나 대혜종고는 그 자신이 주지를 맡은 아육왕산(阿育王山) 보은광효사(報恩光孝寺)를 개당(開堂)할 때, 백추사(白鎚師)가 되어 달라고 부탁을 한다. 백추사가 된 굉지정각은 대혜종고의 주지될 자격은 물론 그의 선풍을 인정하였다.

마지막으로 입적을 앞둔 굉지정각이 유서를 써서 대혜종고에게 후사를 부탁하자 그 유서를 받아 든 대혜종고는 대중에게 말하였다.

 

바야흐로 깃발은 꺾이고 대들보가 부러져 법의 강은 마르고 法眼 없어지리라. 그렇다고 하더라도 진정 천동(天童=굉지 정각)의 진실한 말이 무엇인지 서슴지 말고 말하라. 지음(知音)을 안 뒤에 또 누가 아는가.

 

 

* 참고문헌

 

: 선 이야기(일지, 운주사, 1996)

: 좌선수행법(남민수 역, 불교시대사, 1999)

: 굉지정각의 수증관(김호귀, 대각사상, 1999)

: 묵조선 연구(김호귀, 민족사, 2001)

: 선학의 이해(최현각, 불교시대사, 2003)

: 중국선사상사(종호, 제본용, 2003)

: 시공불교사전(곽철환, 시공사, 2003)

: 조사선의 수행과 신심의 관계(김호귀, 정토학 연구, 2008)

: 간화선(불학연구원, 불교전도협회, 2009)

: 默照銘에 나타난 개념(김호귀, 한국불교선리연구원, 2010)

: 하룻밤에 읽는 불교(소운 스님, 랜덤하우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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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불교 [해설, 요약, 개괄] 육조단경의 개요 file 13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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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학과 수행 [동영상 + 강의안] 제8강 나는 누구인가 ― 초기불교의 인간관, 오온2: 수온 1765
교학과 수행 [동영상 + 강의안] 제7강 나는 누구인가 ― 초기불교의 인간관, 오온1: 색온 3146
교학과 수행 [동영상 + 강의안] 제6강 초기불교의 진리 ― 사성제: ② 멸성제와 도성제를 중심으로 1929
교학과 수행 [동영상 + 강의안] 제5강: 초기불교의 진리 ― 사성제: ① 고성제와 집성제를 중심으로 1963
계율학 계율(戒律)의 개괄 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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