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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발심자경문 강의 - 발심수행장 [책한권 타이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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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문현토,해설포함

1. 이 강의는
2. 해인사에 주석하시는 宗眞스님께서,
통도사 3기 행자 교육 때 < 불멸후 2535년 (서기 1991년) 가을 >,
행자들을 대상으로 강의하셨고, 그것을
3. 통도사 眞目스님이 비디오로 녹화⋅녹음했는데, 그것을,
4. 해인사 常愚가 녹음한 것만을 DAT에 復音하고,
4.1. 그것을 다시 일반 카세트에 復音하였고, 또 그것을
5. 동학사 行吾 비구니가 그것을 모두 종이에 적었는데, 그것을,
6. 해인사 강원에 圓昌외 지산⋅보인⋅혜종⋅동운⋅현묵스님이 셈틀에 옮겨 입력한 것을
7.해인율원 (효명,법천,지효,수경,화봉,수인,신묵)에서 감수.교정.교 열했읍니다.

 


  發心修行章

「發心修行章」 줄여서 ‘발심’ 그러죠. 발심은 발보리심의 준말이고 수행은 수도의 다른 표현이다. 위로는 부처님이 되겠다 하고, 아래로는 모든 중생을 교화하려는 뜻을 내는 것을 한문으로는 ‘상구보리 하화중생’ 그러죠. 위로는 부처가 되고 아래로는 모든 중생을 교화해서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불국토로 만든다 하는 마음을 내는 것을 발심이라. 여러가지 의미가 있읍니다만은 그렇게 이해를 하고 수해은 수도의 다른 표현이다. 장은 글이다. 글 원 문자하고 같습니다.
언제 지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구요. 흔히 해동사문 원효술 그렇게 되어있는데 분황사 사문 원효 술 그렇게 바꾸었읍니다. 왜냐하면 말년에 원효스님이 분황사에 계셨기 때문에 그렇게 표기를 했구요. 또 이 교재를 만들 때에 한국불교전서를 참고를 했읍니다.
원효스님은 너무 유명하기 때문에 그 전기를 다 말씀드릴 수가 없구요.
간략한 전기는 뒤에 밝혀 놓았읍니다. 그리고, 원효스님은 공부를 더 많이하기 위해서 중국으로 가려고 하다가, 지금은 어느 장소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서해쪽 어느 곳에서 잠을 자다가 목이 너무 마른 나머지 옆에 고여있는 물을 떠마셨는데 그것이 그렇게 달수가 없더라. 이튿날 날이 밝은 다음에 깨어서 보니까 그렇게 달게 마셨던 물은 해골에 고여있는 물이었다. 그 해골을 보는 순간 온 오장이 뒤틀리면서 구토를 하게 됐는데, 그 때 홀연히 아! 어제 밤에는 그렇게 달던 물이 내 지금 해골을 보는 순간 이렇게 오장이 뒤틀리면서 구토를 하게 되었구나.
거기에서 이 세상 모든것은 마음으로 되는 것이다하는 무심의 도리. 화엄경의 이치죠. 그것을 깨닫고는, 같이 동행했던 의상스님은 중국으로 가시요 나는 중국에 가서 별로 새로 할 것이 없읍니다하고 돌아와서 여러 사람을 위해서 노력을 하셨다. 그런 전기도 마침 종경록에 실려있기 때문에 참고로 실어 놨읍니다. 참고로 하시고요. 전통문서연구원에서 국제학술회의를 하고 원효스님의 사상을 상당히 다각도로 조명해 가지고 통일원에서 후원을 하고 해서 정리해논 책이 있읍니다.
 그 후에 민족사라고 하는 출판사에서 제목을 약간 바꾸어 가지고 책을 내 놓은게 있으니까! 혹 그런 책을 참고로 하시면 되겠구요. 본문을 바로 시작하겠읍니다.

夫諸佛諸佛이 莊嚴寂滅宮은 於多劫海에 捨慾苦行이요 衆生衆生이 輪廻火宅門은 於無量世에 貪慾不捨니라 無防天堂에 小往至者는 三毒煩惱로 爲自家財요 無誘惡道에 多往入者는 四蛇五欲으로 爲妄心寶니라.

「夫諸佛諸佛이 莊嚴寂滅宮은」
夫는 부초심지인의 부하고 같읍니다.
제불제불, 글 전체가 운문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운문입니다. 자수를 맞추었기 때문에 제불제불하고 반복 했읍니다. 
부처님이 그 말씀이죠. 장엄. 꾸밀장자, 꾸밀엄자 입니다. 장식한다 그 말씀입니다. 
적멸궁은 적멸보궁, 적멸은 열반을 가리키는데 그것을 집에다 비유하여서
적멸궁이라 했읍니다. 곧 열반을 장식한다는 것은

「於多劫海에 捨欲苦行이요」
많을 겁, 해자는 猶如山海, 초심에서 나오는 유여산해의 해와 마찬가지입니다. 겁은 인도에서 말하는 시간 단위를 나타내는 말인데 다겁이니까 많은 세월동안, 흔히 불교에서는 3 아승지겁 동안 수행을 해야 부처님이 된다 하고 말하니까 
원효스님이 여기에서 ‘다겁해’ 이런 표현을 했읍니다. 於는 시간을 나타낼때 쓰이는 조사, 이렇게 이해를 하십시요. 많은 겁 동안에, 사욕고행이요. 탐진치 삼독의 욕심을 버리고 고행을 했기 때문이요. 원래 고행이란 수행 방법은 불교 이외의 다른 종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시기 이전부터 인도에서 있었던 수행 방법의 하나 입니다.
 한 예를 들면 한 무더위에, 우리나라에서는 삼복이라 그러죠. 몹시 더울 때에 옷을 발가벗고 밖에 나가서 볕을 쬐입니다.더운데다가 옷을 다 벗은 상태에서 밖에 가서 볕을 쪼이면 얼마나 덥겠어요. 거기에다가 옆에는 불을 놓아 가지고 뜨겁게 만들어서 그것을 참는 그런 수행도 했다 합니다. 그런걸 ‘고행’이라 하는데 그것이 불교에서도 자기완성을 위해서는 피나는 자기와의 싸움 과정으로 겪어야 된다. 그래서 고행을 하게 되었읍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하루에 삼 한알, 보리 한톨을 잡숫고 6년을 수행했다고 하는 고행림이라고 하는 곳이 인도에 있다고 합니다.
현장스님이 인도에 갔을 때는 그게 남아 있었다고 그러는데요. 지금은 있는지 제가 확인을 못했읍니다. 어쨌든 그렇게 애써서 수도를 하셨다. 이 귀절은 부처님은 어떻게 해서 부처님이 되셨는가. 장엄적멸궁은 결과요, 사욕고행은 원인이죠. 이걸 순서를 바구면 부처님은 사욕고행을 했기 때문에 적멸궁을 장엄하실 수 있었다. 곧 열반을 성취할 수 있었다. 이런 말씀을 글을 잘 쓰기 위해서 순서를 바꿔 놓았죠. 반대인, 부처님의 반대인 번뇌에 쌓여있고 나고 죽음을 면하지 못한 중생들이 나옵니다.

「衆生衆生이 輪廻火宅門은」
화택은 법화경 비유품에 나오는 三界無安이 猶如火宅이라. 삼계가 편안함이 없는 것이 마치 불난 집과 마찬가지다 하는 데서 나오는 말입니다.곧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불난 집하고 마찬가지다. 그렇게 불안한 장소도, 여기에서는 ‘온 세상’ 하는 뜻입니다. 윤회를 하는 것은

「於無量世에 貪欲不捨니라」
한량없는, 셀 수가 없는, 어떻게 많은지 셀 수가 없는
세상에 탐욕불사니라. 탐욕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다. 탐진치 삼독에 휩쓸려서 생활했기 때문에 항상 죄를 짓게 되고, 죄를 지으니까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항상 괴로움 속에서 고통을 받고 살게 된다. 윤회니까. 바퀴돌듯 한다
그러니까 계속 반복된다 이겁니다. 이 두 귀절이 바로 발심수행장의(요지입니다) 욧점입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하나 설명해 나가는데

「無防天堂에 少往至者는 三毒煩惱로 爲自家財요」
막음이 없는 천당. 예수교에서도 천주교에서는 ‘천당’하는데 불교 말을 빌려다가 자기들 말처럼 쓰는 겁니다. 天堂은 天은 천상. 하늘 세계를 말하고 불교에서는 하늘세계를 28로 나눕니다. 잘못 아는 이들은, 불교 천문학에서는 하늘을 몇가지로 나눕니까? 이렇게 물으면 “33가지로 나눕니다” 그러는데 그것은 잘못 아는 겁니다. 그것은 도리천이 바로 33개로 나누어져 있다. 이렇게 해서 33천을 말하는데, 불교에서는 28가지로 구분한단 말씀이죠. 천은 28가지의 하늘을 말하고 堂은 거기에 있는 궁전을 말합니다. 곧, 쉬운 말씀으로 해서 ‘하늘 세계’지요. 막음이 없는 하늘세계니까 너는 예쁘니까 하늘로 올라오고, 너는 미우니까 오지 말아라 이렇게 안한단 말씀이죠. 불교에서는 五戒와 十善을 지키면 살생하지 않고,훔치지 않고 바람을 안 피우고 거짓말하지 않고 술을 안마시는 五戒를 잘 지키고, 그 다음에 입으로 짓는 네가지 나쁜짓. 몸으로 짓는 세가지 나쁜짓 생각으로 짓는 세가지 나쁜짓을 하지 않으면 그것은 十善이라고 하는데 열가지 착한 일을 하게 되면 하늘세계에 태어나는 원인이 된다. 五戒十善은(   )이다 그렇게 말씀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착하게 바르게 살면 하늘 세계에는 저절로 갈 수가 있고, 그 반대로 생활하면 가고 싶어도 못가게 된다. 누가 막고 안막고, 오라하고 가라하고 그건 안된단 말씀이죠. 갈 수 있고 없고는 자신에게 매여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그렇게 말씀을 합니다. 천당에 태어나는 것을 막는 이가 없어도 이렇게 해석 할 수도 있고, 막는 이가 없는 천당에 소왕지자는. 가서 이르는 사람.  ‘至’字는 탄생한다 그말이죠. 이르는 사람이 적은 것은  少는 드물다 그말씀이죠. 많지않다. 적은 것은. 그래 거의 뜻은 ‘없을 무(無)’字하고 마찬가지입니다. 큰 방에 한두 사람이 있으면 “사람이 없다” 또 개울에 물이 거의 말라버리면, 물이 조금은 있는데도 “고랑이 다 말랐다” 이런 표현하고 같죠.가서 태어나는 사람이 적은 것은 삼독번뇌로 위자가재요. 삼독번뇌로 자기 집의 재물을 삼는 것이요. 삼독번뇌를 귀하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無誘惡道호대 多往入者는」
악도에 삼악도의 준말입니다.
삼악도,지옥, 아귀. 짐승 세곳에는 고통이 아주 많은데고 죄가 지극히 무거운 사람들이 태어나는 곳이다 해서 삼악도라 그러죠. 그 삼악도에 유인하는 사람이 없는데 다왕입자는 가서 들어가는 사람이 많은 것은

「四蛇五欲으로 爲妄心寶니라」
사사는 우리 몸을 말하고 자기를 말합니다 
몸을 말하고 사대, 대라고 하는 것은 큰대자를 쓰는데 이 대는 원소라는 뜻입니다. 네가지 기본원소다 그런 말씀이죠. 사사는 四大의 다른표현입니다.
오욕은 색성향미촉 5진을 말합니다. 안이비설신을 가지고 색성향미촉 바깥 경계를 반연해서 여러가지 작용을 하게 되는데 그러할 때에 좋은 일을 하기보다는 나쁜 일을 많이 해서 죄를 짓게되고 마음에는 점점 어두운 고뇌가 쌓이게 된다. 그래서 5진을 5욕이다 그렇게 달리 표현합니다. 4사와 5욕으로 망심의 보배를 삼음이니라. 眞心의 반대가 망심 입니다. 언제나 있는 마음이 아니고, 우리가 눈으로 물건을 볼떄는 거기에 인식작용이 기죠. 귀로 소리를 들을 때도 마찬가지 음식 맛을 볼 때도 마찬가지고, 코로 냄새를 맡을 때도 마찬가지 이러한 마음 곧, 이러한 마음, 곧 5근을 가지고 바깥경계를 봤을 떄에 일어나는 마음, 항상 있는 마음이 아니고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마음을 妄心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망심의 보배를 삼기 때문이니라.

 人誰不欲歸山修道리요마는 而爲不進은 愛欲所纏이니라. 然而不歸山藪修心이나 隨自身力하야 不捨善行이어다. 自樂을 能捨하면 信敬如聖이요 亂行을 能行하면 尊重如佛이니라.

「人誰不欲歸山修道리요 만은」
사람이 누구든지 산에 돌아가서 수도를 하지않으려고 하리요 만은, 다 수도를 하고 싶어 하지 만은

「而爲不進은」
성공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不進, 두가지로 볼 수 있어요. 부진이 하나는 수도를 하고 싶어 하는 데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 않는다 하는 의미가 되고, 또 하나는 수도를 하더라도 도를 성취하지 못한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읍니다. 

「愛欲所纏이니라」
애욕에 얽힘을 받기 때문입니다. 所자는 타동사 위에 바소, 형식명사죠. 이것 저것 하는 형식 명사, 타동사 위에 형식명사 所가 놓이게 되면 피동형을 만듭니다. 그래서 이건 피동형으로 해석을 해야 됩니다. 애욕의 얽힘을 받기 때문에 그렇다, 곧 애욕 때문에 안된다. 이렇게 보면, 뒤의 애욕소전 까지를 인수불욕 그 귀절하고 연결시켜보면 이위부진 그것은 도를 성취하지 못한다 하기 보다는 출가를 하려고 해도 굳은 결심이 없어서 하지 못한다. 이렇게 보는 것이 더 났읍니다. 어쟀건 이 귀절에서는 애욕을 끊지 못했기 때문에 수도에 전념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문장 해석하는데 거듭 말씀드리지만은 얽힐 전자, 얽힌다 하면 타동사입니다. 타동사 위에 형식명사고, 이것 저것하는 건 형식입니다. 형식 명사인 所자가 놓이게 되면 피동형으로 해석을 한다. 기억해 두십시요. 애욕의 얽힘을 받기 때문이니라.

「然而」
흔히는 연이 두글자를 ‘그러나’ 로 해석 합니다. 여기에는 그렇게
해석을 하면 안됩니다, 그러니까 해야 됩니다. 그러니까는 그러므로 지요, 조금 바꾸면 ‘그리하여’ 마찬가지죠. 그러니가, 그러므로나 그리하여나, 그러나 하는 것은 위에 말씀이고 밑에 말씀하고 반대의 경우를 표현 할 때 쓰죠. 접속사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然자가 보통 그러나 할 연자로 나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해석해 가지고는 뜻이 분명하게 드러나지를 않읍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하여,

「不歸山藪修心이나」
산에 돌아가서 마음을 닦지는 못하지만, 자 그러나
밑에 도 -이나  이렇게 해석을 하면 문장이 어색해 집니다. 그리하여 산수풀에 돌아가서, 그러므로, 그렇기 때문에 산에 돌아가서, 산수풀은 산속이다. 그 말씀입니다. 산에는 수풀이 많챦아요. 산중에 들어가서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마음을 닦지는 못하지만은

「隨自身力하야 不捨善行이어다」
자신의 힘을 따라서, 자신의 능력대로 그 말입니다.
자신듸 능력대로 선행을 버리지 말지어다. 착하게 살아야 된다  

「自樂을 能捨하면 信敬如聖이요」
자신의 즐거움을 능히 버리면, 믿고 공경하는 것이 성인과 같이 할 것이요 ,

「難行을 能捨하면 尊重如佛이니라」
행하기 어려운 일을, 실행하기 어려운 일을 능히 실행하면
존중 받는 것이 부처님과 같이 할 것이니라. 여불의 불은 서가모니 부처님을 가리킵니다. 또 역사적으로 서가모니부처님 말고 다른 부처님도 우리가 부처님 명호를 부르면서 절을 하고 하듯이 역사적인 부처님 아닌 부처님으로 해석을 해도 관계는 없읍니다만은 서가모니 부처님처럼 존중을 받을 것이다.

 慳貪於物은 是魔眷屬이요 慈悲布施는 是法王子라.高嶽莪巖은 智人所居요. 碧松深谷은 行者所捿니라. 飢湌木果하야 慰其飢膓하고 渴飮流水하야 息其渴情이니라 喫甘愛養하여도 此身은 定壞요 着柔守護하여도 命必有終이니라.

「慳貪於物은 是魔眷屬이요」
간탐,아낀다. 간은 아끼는 것이요.
탐은 욕심내는 것이다. 그러면 간은 자기에게 있는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않는 것을 말하고, 탐은 다른 사람에게 있는것을 자기것으로 만들고 싶어하는게 탐이죠. 물은 여러가지물질입니다. 물질.여러가지 물질을 간탐하는것을 사마권속. 보통 ‘이 마구니의 권속이고’ 이렇게 새기는데 그러면 안되죠. 이 책상⋅이사람 이 마이크⋅이 노트⋅이 수건⋅ 이 물, 그러면 그건 어떻게 됩니까. 가리키는 관형사가 되죠. 이 책⋅이 사람⋅이 옷, 관형사가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그렇게 쓰는게 아니고 곧, 아니면 이것은 그렇게 해석을 하는게 좋고 그렇지 않으면 영어의 be동사 있죠. 이다,아니다 하는 그것과같이 해석을 해도 관계가 없읍니다. 그럴 때에는 한문으로 할爲자 있죠. 위할위자 하는것. 그 글자하고 같이보면 틀림이 없읍니다. 그래서 그 글자는 ‘이’하고 ‘이 -이다’ 이렇게 하면 안됩니다. 그건 관형사가 되기 때문에  이⋅그⋅저는 관형사거든요. 이것⋅그것⋅저것하는건 관형사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그⋅저가 관형사인데 그냥 ‘이 마권속이요’, 이렇게 해석하면 안되죠. ‘곧, 마구니의 권속이요’ 하던지 아니면 그것을 해석하지 말고 ‘마구니의 권속이요’ 이렇게 해버리면 된단 말씀이죠. 그렇지않으면 좀더 뜻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은’ ‘곧, 이것은’ ‘이렇게 하는 그 짓은 마구니의 권속 밖에 되지않고‘ 이렇게 해석을 해야지 ‘이 마구니의 권속’ 이렇게 하면 그건 틀린겁니다. 이것은 마구니의 권속. 권속이라 하는건 무리다 이 말씀입니다.
우리가 족속이라 그러잖아요. 또 종류. 마구니의 종류. 魔는 마라의 준말인데  殺者. 죽일살자. 놈자라. 惡者. 악할악자 놈자라 그렇게 번역을
했는데 전에는 마자를 음표이기 때문에 이것도 음표기입니다.‘마라’라는 범어를 음표기한 글자인데 양무제 이전에는 이 글자를 삼마(麻) 밑에다가 귀신귀자(鬼)를 하지 않았다고 그러죠. 음표이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표기만 하면 되니까, 그랬는데 양무제가 불교를 좋아하고 또 불교공부를 많이 한 임금이죠. 그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범어에 마라라고 하는것은 다른 사람한테 나쁘게, 남의 공부를 방해하고 다른 사람을 나쁜곳으로 인도하는 그런걸 ‘마’라고 하니 거기에다가 귀신 귀자를 붙이자 이렇게해서 양무제 이후에 ‘마’를 삼마麻 밑에다 ‘귀신 귀(鬼)’字를 붙였다. 그렇게
말합니다. 어쨌건 마의 종류가 되고, 마의 종족이 되고

「慈悲布施는」
반대로 자비로 보시하는 것은

「是法王子니라」
원래 법왕자는 문수사리 법왕자하듯이 보살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법왕은 부처님을 가리키는데, 부처님은 법에 대해서 깨달음에 대해서 가장 으뜸가는 분이다해서 부처님을 법왕이라 그럽니다. 법화경에는 我爲法王하야 於法에 自在라. 나는 법으로 왕이 되어 가지고 모든 법에 자재 하다 이런 말씀이 있어서 부처님을 법왕이라.또 공에대한이치.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공했다고 하는 空의 이치를 누구보도
잘 말씀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부처님을 空王이라 하기도 하는데, 法王은 부처님을 가리키고 법왕의 아들은 바로 보살이라 그 말씀이죠.흔히 문수菩薩이나 미륵菩薩을 법왕자라 그렇게 하는데 여기서는 그런 뜻이 아니고, 菩薩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법왕의 제자. 곧 佛子라는 의미입니다. 곧 법왕의 아들입니다. 그러면 부처님의올바른 제자가 되고, 자비보시하는 것은 부처님의 제자가 되고 욕심내고 아끼고 이렇게 하느 것은 바로 마의권속이 된다.

「高嶽峩巖은 智人所居요」
높은산입니다. 고악아암. 아주 험한 산 있죠.
고악은 높은 산을 말하고 아암 하는 데는 아주 험한데 인적이 드문 곳을 말하죠. 그러니까 곧 조용한 산중을 말하는데, 경전에서나 율장에서는 여기 나오는 고악아암은 阿蘭若(aranya)즉 寂靜處,空閑處,無靜處를 말합니다. 고악아암은 지인소거요.  지혜있는 사람이 살 곳이요. 그 所居의 所자는 장소를 말합니다. 살 곳이요. 살 장소요.

「碧松深谷은 行者所棲니라」
벽송과 깊은산 골짜기는.
행자는 지금 남행자 여행자하는 행자를 말하는게 아닙니다.
수행자의 준말이고 智人은 그대로 지혜있는 사람. 공부가 상당히 깊어진 사람 여기의 지인 이라하는 말은 공부가 상당히 깊어진 사람. 수도를 해서 어느정도 불교 공부가 깊어진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고, 여기 행자는 수행자입니다. 수행자의 살 곳입니다. 棲라고 하는게 산다는 그 말씀입니다. 곧 산중에 들어가서 수도를 하는 것이 훨씬 좋다는 말씀이고, 수도를 할 때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겁니다.

「飢餐木果하야 慰其飢腸하고」
기찬목과입니다. 주림에는 나무 열매를 따 먹어서, 먹을 찬자. 먹어서. 동사가 됩니다. 반찬찬자가 아닙니다. 먹을 찬자죠. 그렇게 해가지고 주린 창자를 위로하고, 달래고. 산 속에서 수도 생활하니까. 좋은 음식을 먹고 그렇게 수행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못되니까. 그저 배가 고프면 과일이니 따먹고

「渴飮流水하야」
목이 마를 때는 흘러가는 물을 떠 마셔서, 손으로 움켜마셔서

「息其渴情이니라」
그 목마른 생각을 쉴지니라.
모든 번거로운 생활은 다 줄여버리고, 그저 배가 고프면 공부를 한참 하다가 배가 고프면 나무 열매 따먹고, 목이 마르면 흘러가는 냇물 떠서 마시고,얼마나 간단해요. 그렇게 생활을 하라.
 좌계현랑 스님이 영가현각스님한테 보낸 편지를 답한 내용이 계초심학인문 내에 인용이 되어 있다.그런 말씀을 했는데 그것도 <문법자차에 여리박빙 ~ 불람사발까지> 그렇다고하는 말씀을 했는데 그 편지에 보면 참 좋은 내용이 나오는데 ‘서두(鋤頭)로 當枕하고 細草로 爲氈호라.’ 호밋자루로 가지고, 혼자 생활을 해야 되니까. 깊은 산 속에서 말이예요. 그러니까 직접 채소도 심고 이렇게 해 가지고 생활을 하는데 호미를 가지고 밭을 매고 채소 가꾸고 하다가 피곤하면 그냥 호미자루 베고 거기서 잠깐 쉰단 말씀이에요. 그러니까 {<서두(鋤頭)로 당침(當枕)하고:호미자루로 베개를 삼고> <세초(細草)로 위전(爲氈)호라:이불이니 뭐니 그런걸 만들 것도 없고 풀을 이리저리 베어서 그것 말려가지고 깔고 자니까 그게 바로 이불이 된다.>} 그렇게 해가지고 여기가 경치가 기가 막히게 좋으니까 나하고 같이 와서 수도하는게 어떻겠오? 그걸 글이 나오는데 여기에 나오는 이런 내용이 바로 그런 생활을 의미하죠. 

「喫甘愛養하야도 此身은 定壞요」
맛좋은 음식을 먹여서 내가 먹는게 아니고 먹여준다 이 말입니다.
먹는다 그러면 자동사입니다. 먹여준다 이러면 타동사지요.
단 것을 먹여서 사랑해 길러도, 내 몸을 그런단 말이죠. (   )음식을 먹여가지고 (   )애양하야도 차신은 정괴요. 이 몸은 결정코 무너질 것이요. 그렇죠. 아무리 잘 먹는다고 안 늙습니까? 전하는 말에는 진시황이 6국을 통일했읍니다. 중국의 진시황이 어려서 자랄때는 무척 고생을 한 사람인데 진시황이라. 나중에 20살이 되어 임금이 되어서 분열되었던 중국 천지를 통일을 합니다. 다 평정하고 보니까 몸이 자꾸 쇠약해 진단 말이죠. 그래서 이래서는 안되겠구나해서 삼천 사람을 외국으로 보내 가지고 내가 영원히 살고 죽지 않는 약을 구해오라해서 그 사람들이 제주도로 와가지고 그만 표류를 하다가 왔다 하는 그게 있다고 그랬는데 ,어쨌건 오래살려 했는데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 가지고 아방궁이라는 궁을 건립해 놓고 중국 천지를 호령하며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고 그러죠. 그러더니 나중에 죽었어요. 죽어 능을 만드는데도, 뒤에 사람들이 혹시 자기 능을 도굴을 하거나 파괴 시킬까봐 외국을 자꾸 정벌을 해놓으니까 외국 사람들이 미워 할게 아닙니까? 그러니 혹시 외국 군대가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이 그 능를  좀 훼손시킬까 싶어서 능을 파기만 파면은 저절로 폭탄이 터져가지고 죽도록 그렇게 만들어 놨었다.그런 글을 한번 읽어 본적이 있는데, 어쨌건 아무리 오래 살고 싶어해도 정해진 목숨은어찌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잘 먹여줘 봤자 언젠가는 죽어서 없어질 몸이다. 여기 나오는 말씀은 몸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몸에 너무 마음을 쓰거나 내 몸을 위해 살다보면 정작 해야 될 일을 못한단 말이지, 이게 뭐 내가 언젠가는 죽을 테니까 그만 아무렇게나 살다가 죽으면 되지 이건 맞지가 않죠.

「着柔守護하야도 命必有終이니라」
부드러운 옷. 좋은 옷입니다. 이것은 비단처럼 아주 좋은옷 좋은 옷은 부드럽단 말씀이죠. 부드러운 옷을 입혀서 수호해도 위에 애양하고 마찬가지죠. 수호하더라도 명필유종이니라.나의 목숨은 반드시 마침이 있는 것이니라.
終은 끝난단 말씀이죠. 그러니까 내 몸에 너무 애착을 가지고 그저 몸이나 치장하고 또 건강이나 생각하고 이렇게 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다. 그 말씀이죠. 수도하는데

 助響巖穴로 爲念佛堂하고 哀鳴鴨鳥로 爲歡心友니라. 拜瑟이 如氷이라도 無戀火心하며 餓膓이 如切이라도 無求食念이니라.

「助響巖穴로 爲念佛堂하고」
메아리를 돕는 암굴로, 바위 틈을 말합니다. 염불당을 삼고

「哀鳴鴨鳥로 爲歡心友니라」
새들 가지고, 슬피우는 오리나 새로, 내 마음을 즐겁게 해 주는 벗을
삼을 지니라. 사는 장소는 바위 틈이요, 벗이라는 건 혼자 사니까 새 뿐이다. 그 말씀이죠.

「拜膝이 如氷이라도 無戀火心하며」
절 하는 무릎이 얼음처럼 차지더라도, 이제 절을 하니까 부처님
명호를 부르면서 절을 하는 데 불을 안 때니까, 그렇게 해가지고 얼음처럼 차지더라도 불을 그리워 하는 마음을 없이 하며

「我腸이 如切이라도」
좋은 음식을 못 먹으니까 과일이나 좀 먹고흘러가는 물을 마시니까 배가 자주 고플 것 아니요? 또 거기다가 절을 자꾸 하고 하니까 더 배가 고파 가지고 나중에 배가 고프면은 아닌게 아니라 배가 끊어질 듯이 그렇게 배가 고파 진단 말씀이죠. 그렇게 배가 몹시 고프더라도

「無求食念이니라」
밥을 구하는 생각을 없이 할지니라. 

 忽至百年이어늘 云何不學이며 一生이 幾何관대 不修放逸고 離心中愛를 是明沙門이요 不戀世俗을 是名出家니라.

「忽至百年이어늘 云何不學이며」
홀연히 100년에 이르거늘, 이렇게 해석을 해야지  “백년이 이르거늘” 그러면 안됩니다.
‘무엇무엇에 이른다’는 말씀이지 ‘무엇무엇이 이른다’ 그렇게 해석을 하면 안돼요. 홀연히, 문득 100년에 이르거늘 운하불학이며. 운하는 如何하고 마찬가집니다. 같을如자. 어찌何자. “어떻게”입니다.이 때는 이를云자가 아니라요. 두 글자가 합해 가지고. 왜⋅무엇⋅어찌⋅어떻게, 이렇게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어떻게 배우지 아니할 것이며

「一生이 幾何관대」
일생이 얼마나 되관대

「不修放逸고」
방일을 잘못하면. 방일을 닦지 않는가 이렇게 되는데 그러면안되죠.
不修하고. 수도하지 아니하고 놀기만 하느냐. 방일은 해태의 다른 뜻입니다. 게으름. 그 일자는 놀일자입니다. 논다는 뜻으로.수도하지 아니하고 방일하는고

「離心中愛를 是名沙門이요」
마음 가운데 애정을 버려버린 것을 여의는 것이 아니고 버린다. 버릴리자. 마음 가운데 모든 애정을 버린 것을 또 한가지는 ‘끊는다’ 그 말씀이죠.끊는 것을 사문이라 이름하고. ‘이름할 명(名)’字입니다. 이름 붙일명자. 이름붙이고. 사문은 스님네라. 수도인을 사문이라 그래요.

「不戀世俗을 是名出家니라」
세속을 생각하지 않는 것을 출가라고
한다. 그러면 스님네는 마음 가운데 애정, 곧 모든 번뇌를 없앤 사람을
진짜 스님이라 하고, 출가는 세속 생각이 일체 없어진 그런 상태를 출가라고 한다. 사문과 출가의 정의지요. 자, 이제 어려운 글귀가 나옵니다.

 行者羅網은 狗被象皮요 道人戀懷는 蝟入鼠宮이니라 雖有才智나 居邑家者는 諸佛이 是人에 生悲憂心하시고 設無道行이나 住山室者는 衆聖이 是人에 生歡喜心하나니라.

「行者羅網은 狗被象皮요」
제가 초발심자경문 번역된 책을
여러종류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이 구절을 낱낱이 대조를 해 보니까 상당히 이해하기 어렵게 해석을 해 놨더라구요. 자, 여기에 나오는 ‘행자’는 수행자의 준말이요. ‘라’는 그물라字가 아니고 얽힐라,만날라, 무슨글자하고 같은가하면 罹, 이게 걸릴리자입니다.이 글자나 난조지상의 遭자. 이 글자하고 같은 의미로 해석을 해야 됩니다.
뒤에 펴면 “忽有羅網之殃이요” ‘홀연히 그물에 걸리는 재앙이 있게되고’, 그때라자도 그물라자가 아니고 얽힌다, 걸린다, 만난다, 당한다. 그런 뜻이 됩니다.
 라망은 그대로 해석하면 그물에 걸린다. 이걸 그물라자나 비단라자로 해석하면 뜻이 맞지를 않습니다. 망은 그물인데 무슨 그물이냐 愛欲網의 준말입니다. 애욕망. 또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五欲網. 오욕은 마치 그물과 같아서 새가 그물속에 들어가면 빠져나오기가 어렵단 말씀이죠. 그래서 오욕을 그물에다 비유를 해서 한 말씀입니다. 그렇게 해석을 해야 됩니다. 그러니, 수행자가 오욕망에 걸리는 것은 구피상피요. 개가 큰 코끼리의 가죽을 덮어쓴 것과 같고, 피자는 덮인다. 그말이죠. 덮인 것과 같다. 무슨 말씀인가하면 개는 작습니다. 짐승가운데 코끼리가 큽니다. 지구상에 남아있는 동물 가운데 지상에 있는 동물은 코끼리가 제일 크다고 그럽니다.
적은 개에게 개가 아무리 크다해도 코끼리에 비교할 수가 없죠.큰 코끼리의 가죽을 덮어 쓰게 되면 꼼짝을 못합니다. 벗어날래야 벗어날수가 없어, 그래서 수행하는 사람이 애욕을 벗어나지 못하고 거기에 걸려 있으면 곧, 애욕을 벗어나지 못하면 해탈을 하기 어렵다고하는 비유의 말씀입니다.

「道人戀懷는」
수도인이. 여기의 도인은 우리가 말씀하는 도를
깨달은 분이 아니고 수도인의 준말입니다. 그러면 앞에 나오는 행자하고 마찬가지죠. 뒤에 나오는 도인도 역시 그렇게 해석을 해야됩니다. 도를 깨달은 분 그렇게 보면 안맞죠. 자, 연자가 문제인데 戀 보통 그리워할연. 회는 여기서는 품을 회 하면 안됩니다. 어제 공부한 허회의 회로 해석해야 됩니다. 그러면 그게 바로 마음心자하고 같습니다. 心懷. 그러니까 곧 마음이다. 연은 그리워할연이 아니고 생각할연자 입니다. 그 다음에 생각한다는 말을 불교에서는 뭐라고 하는가하면 ‘분별’이라고 그럽니다. 거기다가 마음心자를 붙이면 분별심이 됩니다.
분별심은 번뇌망상의 다른 표현입니다. 번뇌 망상의 다른 표현이 분별입니다. 다 같은  뜻이예요. 번뇌나 분별심이나 또 망상이나 표현이 달라 그렇지 의미는 같습니다. 글 그대로 해석하면 심회에 생각한다. 심회를. 마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심회에 생각한다. 이렇게 되는데 그건 뜻이 분명하지 않으니까 마음속에 분별심을 내면,
지금까지 이 귀절을 저 처럼 이렇게  해석해 놓은 데는 보지를 못했읍니다. 제가 잘 한다는게 아니라 원효스님의 이 글귀를 우리가 어떻게 가깝게 이해를 하는가가 중요하잖아요. 수도인이 수도하는 사람이 마음에 분별심을 내면 마음 가운데 번뇌망상을 끊지 못할 것 같으면 이렇게 해석을 해야 됩니다. 그것을 만일 그리움을 끊는다던지 또 어떤 책에 보면 (   )라 그랬단 말이죠. 회자를 이게(객정)하고 마찬가진데 나그네가 혼자 있으니까 쓸쓸한 마음이 생기는 것을 (    )라 하는데 그 회자를 (    )라 해석했는데 이건 그 의미가 통하지를 않습니다.
연자는 그리워하는 것 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읍니다. 생각한다는건데 불교에서 생각한다는 말을 뭐라고 하느냐. 바로 분별심이다. 그렇게 한단 말씀이죠. 해서 수도하는 사람이 수행하는 수행자가 마음 속에, 회자를 쓴 의미가 바로 심중이다 하는 겁니다. 마음 가운데에 분별심을 끊지 못하고 항상 분별심을 내서 이리저리 어지럽게 마음이 움직이게 되면

 「蝟入鼠宮이니라」
고슴도치가 서궁은 쥐구멍입니다.
원래 궁이라고 하는것은 일반집을 궁이라고 그랬어요.그 후에 진나라 이후부터 임금이 사는 집을 궁이라고 쓰도록 그렇게 임금이 명령을 내렸고 그 이후로 일반 가정은 궁이라는 명칭을붙이지 못했어요. 만일 명칭을 붙일 것 같으면 붙들려 가지고 매를 맞던지 안그러면 임금을 모독했다고 해서 죽게 되도록 그렇게 조치를 했는데, 원효스님은 그런 것하고 아무 관계가 없는 분이고, 또 그것을, 쥐구멍을 아름답게 표현하느라고 서궁이라고 그랬죠. 쥐구멍입니다.
고슴도치가 쥐구멍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이것도 비유의 말씀인데 고슴도치는 가시가 이렇게 많이 났읍니다. 들어갈 때는 가시가 누으니까 들어가기 쉽죠. 그러나 뒷걸음질 해 나오기는 어렵죠. 그러면 이것도 해탈을 못한다고 하는, 부자유스럽고 꼼짝못한다고 하는 비유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서궁이나 지금 앞에 나오는 상피 두글자는 바로 무엇을 상징하는가하면 앞에 나오는 화택, 곧 삼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비유로 하신 말씀입니다.또 다른 의미로 보면 상피나 서궁은 생사에다가 비유한 것이다.
생사 해탈은 하기가 어려운것이다. 그래서 앞에 행자라망은 애욕을 끊어야만 상피. 곧 생사를 해탈할 수 있고,그 다음에 연회 그 귀절은 분별심을 끊어야만 열반을 증득해서 영원히 생사하고는 이별을 하게 된다.하는 비유로 해석을 해야 됩니다. 그걸 그대로 다시 해석을 하겠읍니다.
‘수행자가 애욕망에 걸리는 것은 개가 코끼리 가죽을 입은 것과 같고’ 그렇게 봐도 되고 덮어씌운 것과 같고, 이렇게 해도 되고, ‘수도하는 사람이 마음 가운데 분별심을 내는 것은 고슴도치가 쥐구멍 속으로 들어간 것과 같음이니라.’ 해탈을 못한단 말씀입니다.

 雖有才學이나 無戒行者는 如寶所導而不起行이요 雖有勤行이나 無智慧者는 欲往東方而向西行이니라. 有智人의 所行은 蒸米作飯이요 無智人의 所行은 蒸沙作飯이니라. 共知喫食而慰飢膓하되 不知學法而改癡心이니라 行智具備는 如車二輪이요 自利利他는 如鳥兩翼이니라

「雖有才智나 居邑家者는」
비록 재주와 지혜는 있지만 도회지에 사는 사람은, 읍가는 도회지입니다. 도회지에 사는 사람은

「諸佛이 是人에 生悲憂心하시고」
모든 부처님께서 이 사람에게,  是자는 이 사람입니다. 누군가하면 읍가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비우심. 슬퍼하고 조심하는 마음을 내시고 저러다가 잘못하면 아버지 법 배우게 되니까. 반연이 많으니까 잘못하면 속가에 환속하기 쉽다 그말이죠. 그러니 그걸 걱정하시게 되고

「設無道行이나」
가령, 베풀설자가 아니고 만일설자입니다.
‘설사’ 하는거 있죠. 가정을 나타내는, 가령. 도행은 없지만, 도는 닦지 않지만

「住山室者는」
산실은 산중과 마찬가지입니다. 앞에는 산수라 그랬죠. 같은 표현을 쓰기가 어려우니까, 곤란하니까 여기는 산실이라 그랬읍니다. 산 속이라 그 말씀이죠.
산을 마치 하나의 집처럼 생각해서 산실이라 그랬읍니다. 산실에 사는 사람은

「衆聖이 是人에 生歎喜心하나니라」
여러 성인들이. 곧 성현은
불보살입니다. 불보살이 이 사람에게 환희심을 내신다. 반연이 적어지니까, 수도에 전념하게 되고 수도에 전념하면 언젠가는 도인이 될 수 있으니까 부처님께서 기뻐하신다.

「雖有才學이나」
비록 재주와 배움은 있지만은

「無戒行者는」
아는 건 많고 배운 것도 많은데, 재주도 있고, 배운 것이 많이 있지만 계행이 없는 사람. 戒라고 하는 것은 범어에 시라(sila,saia)라고 하는데 깨끗하다는 의미입니다. 戒는 실천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戒行 그래요. 계행이 없는 사람은

「如寶所導호대 而不起行이요」
보배있는 장소로 인도호대 <이불기행이요.> 가자고 아무리 권해도 일어나서 가지 않는 것과 같고

「雖有勤行이나 無智慧者는」
실천은 있는데
부지런한 실천은 있지만은, 무지혜자는:지혜가 없는 사람은. 자 앞에는 재주는 있는데 실천이 없는 사람  여기는 또 실천은 있는데 반대로 지혜가 없단 말씀이죠. 반대 입니다.

「欲往東方하면서 而向西行이니라」
동방으로 가고자 하면서 서쪽으로 향해서 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니 지혜가 없어도 안되고 또 실천이 없어도 안된다.
그러니

「有智人의 所行은 蒸米作飯이요」
지혜있는 사람의 행동은
쌀을 쪄서 밥을 짓는 것과 같고 그렇잖아요. 쌀은 밥을 만들수 있는 자료가 되니까 능엄경에도 이 비슷한 말씀이 나오는데

「無智人의 所行은 蒸沙作飯이니라」
지혜없는 사람의 하는 일은 모래를 쪄서 밥을 짓는 것과 같음이니라. 모래를 아무리 삶아 봤자 나중에 뜨거운 모래 밖에 안된단 말이죠. 왜 그런가하면, 모래는 밥을 만드는 자료가 안되기 때문에 그렇다.  능엄경에서는 이런 말씀을 했읍니다. 만약에 마음속에 음심을 끊지 못하고 이성을 그리워하는 그 생각을 철저하게 끊지 못하고 선정을 닦으면 마치 모래나 돌을 쪄가지고 밥을 만들려고 하는 것과 같다. 아무리 오래오래 시간을. 불을 때고 공을 들인다 하더라도 끝내 밥은 되지않고 뜨거운 모래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何以放요. 그랬읍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밥이될 자료를 가지고 밥을 만든 것이 아니고, 근본이 틀렸기 때문에 그렇다 이런 말씀이 나오는데 어쨌건 수행하는 사람은 지혜도 있어야 되고 부지런히 실천도 해야된다. 그냥 눈먼 말이 요령 소리 듣고 따라간다는 식으로 남 하는데로 하다보면 제가 어떻게 되는 줄도 모른다.
여기는 지혜와 실천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그래 거듭 말씀드리지만 <행자라망 구피상피 도인회 위입서궁.> 상당히 어려운 내용입니다. 그러니 잘 기억 해 주십시요.

「共知喫食하야 而慰飮膓호대」
공은 함께 ‘다 개(皆)’字의 뜻입니다. 함께 안다. 무엇을 아는가 하면 밥을 먹어서 이위기장호대
주린 위장을 위로 할줄을 알되, 밥을 먹어서 배를 불릴 줄은 알지만은

「不知學法하야 而改癡心하나니」
알지못한다. 무엇을 모르는가하면 법을
배워서 어리석은 마음을 고칠줄 모르나니 이 글은 유향이라고 하는 사람이 쓴 說苑(설원또는 세원이라고도 하는데) 說은 세가지로 발음합니다. 말한다 할 때는 설, 연설한다고 할 때는 세, 그 다음에 기쁘다할 때는 열이라고 발음하는데  여하튼 이런 책에 뭐라고 그랬는가 하면은 人皆知, 원효스님은 皆자를 共자로 고쳤읍니다. 사람들이 다 아는데 무엇을 아는가 하면 以食愈飮 사람들은 모두 밥으로써 주린 위장을 치료하는 줄 알면서 不知以學愈愚. 자, 뜻이 똑같죠. 사람들은 모두 밥으로써 주린 위장은 달랠줄 알면서 곧 밥을 먹어서 허기는 면할 줄을 알면서 부지이학유우라 학문으로써 배움으로써 어리석은 것은 치료할 줄 알지 못한다. 뜻이 같은 겁니다. 여기에서 내용을 불교식으로 바꾸어 가지고 쓴 글이다. 법을 배워서 그 법을 불교지요. 불법을 배워서 어리석은 마음을어리석은 마음.그러니까 설원에 나오는 유우의 어리석음같은거죠.고칠줄 알지 못하나니

「行智具備는 如車二輪이요」
수행과 행을 실천입니다.
지는 지혜요, 수행과 지혜가 구비한 것은 여거이륜이요,수레의  두바퀴와 같고

「自利利他는 如鳥兩翼이니라」
자기 자신을 이롭게 하고
수행을 철저히 해서 도인이 되는것. 곧 성불하는 것을 自利라 그럽니다.
利他는 중생제도하는걸 말합니다. 초심에 나오는 還度衆는 이타요. 見自心性. 그것이 自利입니다. 자신을 이롭게하고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은 새의 두 날개와 같음이니라. 날개가 두개가 달려야 날아 갈 수 있지 하나 가지고는 안되잖아요.

 得粥祝願하되 不解其意하면 亦不檀越에 應羞恥乎며 得食唱唄하되 不達其趣하면 亦不賢聖에 應懺愧乎아 人惡尾蟲이 不辨淨穢ㄴ달하야 聖憎沙門이 不辨淨穢니라. 棄世間喧하고 乘空天上은 戒爲善梯니 是故로 破戒하고 爲他福田은 如折翼鳥가 負龜翔空이라.

「得粥祝願호대」
앞에도 말씀 드렸는데 초기에는 부처님께서 생각하시기를 이 사람들이 밥을 많이 먹으면 게을러지게 되고 정신도 맑지 못하니까 하루 한끼만 먹도록 하자.
그 후에 인연이 닿아가지고 라후라가 출가했는데 그때 나이가 9세라. 사미율의 에도 나오죠. 정반왕의 손자니까 어려움을 모르고 살았단 말씀이죠. 그래가지고 배고픔을 못참고 자꾸 우는 거라. 부처님이 너무 애처러워가지고 죽을 끓여 먹는데, 시간은 새벽에 샛별이 돋아나기 전이요. 죽은 얼마나 묽게 끓여놨던지 글씨를 써도 글씨가 안쓰여지도록 해라. 죽을 빡빡하게 쑤면 거기에 글씨를 쓸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걸 그어서 그냥 합해지면 자취가 없잖아요. 그렇게 묽게 쑤어가지고 먹도록 해라. 그렇게 조치를 하셨읍니다.
나중에는 그게 그만 아주 법이 되어가지고 그래 早粥午飯입니다. 아침에는 죽이요. 점심에는 밥을 잡수셨는데, 그것도 모자라가지고 저녁도 잡수시고 또 그것도 모자라서 간식도 하고 그렇게 하니까 음식을 함부로 먹기 때문에 보조스님은 비시주식하야 망작무애지행. 함부로 행동하면 안되는 것이다. 이런 말씀까지 하게 됐죠. 어쨌건 여기에는 아침의 죽입니다. 얻는다 하는 것은 여기서는 받을 득자입니다. 죽을 받아가지고 축원호대. 小病小惱하고,건강하고 근심 걱정이 적고 하는일이 뜻대로 성취되십시요하는 그런 내용이 축원이죠.

「不解其意하면」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면, 왜 죽을
먹고, 죽을 받아가지고 우리가 법공양한다고 해서 심경을 외우죠. 불생가비라에서부터 회인전과부재념. 일체중생획신통. 그걸 외우면서 그걸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고 그 의미를 잘 모른다 할 것 같으면

「亦不檀越에 應羞恥乎며」
여기의 역자는 참으로 하는겁니다. 참으로.
역불. 참으로, 단월은 시주를 말합니다. 檀은 단나의 준말이요. 월은
중국의 글자를 붙여서 두나라 말을 합해서 한 용어로 만들었읍니다. dāna(檀那) 단은 보시라고 하는 의미를 가진 檀那를 줄여서 한 말이고, 월은 보시를 하므로 해서 고통세계를 벗어나서 좋은 곳으로 가 주십시오.  그런 의미로 越자를 썼읍니다. 곧 시주를  뜻합니다.
참으로 시주에게 응수치호하며 반드시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것이며, 부끄럽지 않느냐 이 말씀이죠.
乎자를 뒤에 붙여 가지고 의문화. 의문이 아니고 반문을 만들었읍니다. 반문 네가 하지 않았니? 이렇게 하는게 반문이죠. 반문을 만들었읍니다.

「得食唱唄호대」
이것은 사시공양이죠. 唱唄가 우리의 심경하는 거죠. 밥을 받아서 창패호대

「不達其趣하면」
그 뜻을 알지 못하면
알달자입니다. 도달한다는 ‘이를 도(到)’字의 뜻이 아니고 안다는 말씀이죠.깨닫지 못하면

「亦不賢聖에 應慙愧乎아」
단월은 시주니까
곧 세속 사람을 말하고 여기의 현성은 스님네와 그 다음에 보살과 부처님을 지칭합니다.참으로 현성에게 반드시 참괴. 부끄러울, 부끄럽다. 우리말로는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냐. 앞에 수치를 썼기 때문에 밑에는 참괴라 그랬읍니다. 부끄러울 참 부끄러울 괴자. 자, 그런데 상해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부끄러운 줄을 모르면, 부끄러워할 줄 모르면, 곧 염치가 없다. 수치스러움을 못느끼면 그것은 사람답지 못하다. 그런말을 했읍니다. 해서 불교에서는 부끄럽다.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된다. 자기 자신이 잘못을 아니까 부끄러운 줄 알고, 부끄러운줄 알면 참회를 하게 되니 참회를 하면 깨끗해진다해서 항상 부끄러움이라든지 참괴라는 말씀을 많이 쓰는데 아닌게 아니라 그렇습니다. 厚顔無恥 해가지고 얼굴 두껍기가 그냥 쇠를 가지고 깔아 놓은것처럼 그렇게 뻔뻔스러우면, 자기 잘못을 못느끼게 됩니다. 그렇게되면 그냥 함부로 살아 그리되는데 함부로 살게 되면 어떠한 결과를 가져 오는가하면 우리는 똑같은 제복에 머리도 비슷합니다. 머리를 깎고 이렇게 사는데, 얘기가 좀 길어지지만은 부처님이 규정하기를 손톱은 반드시 짧게 깎고, 그렇다고해 가지고 박살이 나오도록 그렇게 깎으라는 말씀이 아니고, 손톱이 긴 것, 머리가 긴 것, 그 다음에 옷에 때가 많이 묻어서 다른 사람이 혐오감을 느낄 정도 되는 것은 곧 불교에 이익이 없을 뿐더러, 불교를 다른사람들로 하여금 혐오감을 느끼도록하니까 절대 그런 짓을 하지 말라.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그래서, 우리 스님네는 항상 단정한 모습이 되어야지 스님답지 아니하면 어떻게 될건가. 그렇게 가르쳤는데, 하다보니 사람이기 때문에 잘못을 할 수 있는데 그렇잖아요. 우리는 완전한 성인이 아니니까 잘못을 할 수 있는데 잘못을 하면 부끄러운줄 알고, 부끄러운줄 알면 참회를 하고, 참회를 하면 그걸 고쳐야 된다. 해서 금년 봄에 입적하신 慈자 雲자 자운 노스님은 한때 常慙愧僧. 그랬읍니다. 항상 부끄러워하면서 사는 스님 아무개 이렇게 발문(跋文)에다가 쓴 책이 있다구요.
참 그냥 범상하게 읽어서 넘길 내용이 아닙니다. 요즈음에는 지구상에 사람이 너무 많고 특히 또 우리나라는 좁은데 사람이 참 많이 삽니다. 그리되다 보니까 별별 사람도 많고 또 그렇게 해가지고 자기 식대로 사는 경우가 있단 말이죠. 자기 식대로. 그것은 불교에서는 용납이 안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省己知非하야 常須遠離’라 그랬잖아요. 나는 혹시 잘못이 없는가 시시 때때로 살펴가지고 스님네의 몸가짐 스님네의 생각, 스님네의 말씨에 벗어나지 않도록 해라. 그겁니다.

「人惡尾蟲이」
악이라고 읽지 않습니다.
싫어한다, 미워한다. 그러면 오로 읽습니다. 나쁘다 그러면 악이요. 그 다음에 병을 말할때 오슬오슬 떨리고 춥고하는걸 惡寒이라 그럽니다. 악한이라 안하고 오한이라고 합니다. 그 때는 ‘오’라고 읽는데, 미워할오, 싫어할오자 입니다. 사람이 미워한다. 뭐를 미워하느냐  그 미자는 꼬리미자가 아니고 끝미자입니다.그러면 무슨글자하고 마찬가지냐하면 末자하고 마찬가지입니다. 벌레, 곤충 가운데 가장 끄트머리 벌레다 그 말씀인데 서열을 따져서 끝이라고 하는 그런게 아닙니다. 여기 나오는 미충은 파리를 가리키는데 이 파리는 대소변을 가릴 줄도 모르고, 사람이 싫어하는지 좋아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여기의 미충을 제일 말자. 제일 끄트머리의 벌레다.
그럼 제일 끄트머리 벌레는 뭐냐. 파리라는 겁니다. 대소변도 가릴줄 모르고 남의 음식을 잘 차려 놓으면 음식도 구정물도 모르고 그러잖아요. 그래 제가 앉고 싶으면 앉는단 말씀이죠. 그렇게해서 尾는 末자로 봐야되고, 그럼 末蟲하고 마찬가지죠. 그 다음에 그건 파리를 가리키는데, 백장스님어록,대혜스님어록. 그 다음에 영명연수선사가 쓴 신부주하는 책이 있읍니다. ‘주신부’하기도 하는데, 신부주, 그런데 보면은 똑같은 내용이 나오는데 譬如태(벌래충변에 클태) 말(벌래충변에 끝말)蟲 이게 바로 파리를 가리킵니다. 處處能泊호대 파리는 어디 안가는 안앉는 데가 없잖아요. 심지어는 요즈음 ‘대통령’ 그래봐야 우리가 뭐 그리 무서워 안하는데 옛날 ‘임금’ 그러면 우리는 감히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해요. 당장 끌려가서 치도곤을 맞거나 아니면 잘못하면 불경스럽다 그래가지고 그만 죽게 된단 말씀이죠. 그런 지엄하신 임금님 얼굴에도 앉는게 파리올시다. 그래놓으니까 제일 말자라 그래가지고 왜 사람 못된 이를 人間末子라 그러잖아요. 제가 표현을 좀 나쁘게해서 죄송합니다.
그래 태말충이라 그랬단 말씀이죠. 그러니 처처능박입니다. 어디든지 가앉는데 而不能泊火焰之上이라. 불에는 못앉는단 말이죠. 불에 앉았다 하면 타죽잖아요.  그렇듯이 衆生도 亦爾하야. 우리 중생도 또한 그러해서 處處에 能緣호대. 무엇이든지 다 생각하고 보고 한단 말씀이지요. 그런데 而不能緣於般若之上하나니 지혜의 위에는 지혜에는 반연하지 못한다. 해서 어제 말씀 드렸죠. 염라대왕의 사자가 스님을 붙들러 일주일 후에 와보니까 사람은 있는데 보이지를 않더라. 왜 그런가하면 그 스님은 삼매에 들어가지고 무심해지니까 우리 눈으로는 보이지 않듯이 반야에 반연하지 못한다는 얘기가 바로 그 뜻이 됩니다. 그래서 여기의 미충은 말충으로,그 尾자는 末로 해석하고 파리로 보는것이 옳다. 왜냐하면, 그 밑에

「不辨淨穢」
변은 구분한다하는 뜻이죠.또 가린다. 구분한다. 그것인데 정은
깨끗한 것이고 예는 나쁜 것이죠. 더러운 것이죠. 파리는 대소변을 못가린는데 다른 것이야 말씀할게 없잖아요. 그래 사람은 파리가 깨끗하고 더러운 것을 가리지 못하는 것을 미워는 것과 같애서

「聖憎沙門이 不辨淨穢니라.
성인들은 불보살을 가리킵니다. 불보살은 사문이, 출가사문입니다.  정은 淨行입니다. 穢行 예행 그것을 무엇이라 하는가하면 不淨行입니다. 부정행. 不淨行 하기도하고 非梵行하기도 하는데, 곧 계율을 지키지않는 것을 부정행이라고도 하고 비범행이라 그럽니다. 함부로 산다 이겁니다. 그걸 穢라 그랬읍니다. 다른 말씀으로 표현하면 淨은 계행을 철저하게 지키고 수도를 잘 하는 것이고 穢는 파계를 하고 수도를 안하면서 사는 것이다. 그래서 불보살은 출가한 스님네가 정예 가리지 못하는것을 미워하나니라.

「棄世間喧하고 乘空天上은」
세간의 시끄러운 것을 버리고, 喧은
두가지로 해석할 수 있읍니다. 번뇌로 해석할 수도 있고, 죄악으로 해석할 수도 있읍니다. 그것보다는 번뇌로 해석하는것이 더 맞지요. 세간은 세상과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시끄러운것 번뇌를 버리고 승공천상. 공천상은 바로 하늘입니다.글자 수를 맞추기 위해 가지고 그렇게 썼을 뿐입니다. 빈 하늘이 아니고 그대로 하늘입니다. 천상에 오르려 하는 것은 세간의 모든 시끄러운것. 번뇌를 버리고 하늘나라에 태어나려고 하는 것은 번뇌로 봐도 되겠지만, 여기에서는 세간을 살아가는것은 복잡하고, 또 죄를 짓게 마련이니까 복잡하다 죄악이다. 이렇게 해석을 해도 틀리지는 않죠. 乘은 오른다. 차 타는걸 승차. 배타는걸 승선 그러죠. 그렇듯이 올라간다는 뜻입니다.  천상에 올라가는 것은 왜 空자를 썼는가하면, 하늘은 텅 비었잖아요.공기층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덮은것 같지만 올라가도 올라가도 끝이 없다그러죠.그래서 텅비었다. 하늘은.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죠. 그래 비었다해서 空天上 그랬는데 공에는 별의미가 없구요. 천상은 그대로 천상입니다. 천상에 오르려고하는 것은

「戒爲善梯니」
五戒十善은
生天因이다. 5계와 십선을 닦는 것은 5계를 잘 지키고 십선행을 닦는 것은 천상에 태어나는 원인이 된다. 여기의 말씀이 바로 그겁니다. 戒를 지켜야 된단 말씀이죠. 좋은 사다리가 됨이니, 이 爲자는 된다는 뜻입니다. 잘 구분하십시요. 어떤 것이 변해서 다른 것으로 나타날 때 爲자를 되는 것으로. 된다고 해석을 해야 됩니다. 가령 어린아이가 어른이 된다 학생이 된다. 승려가된다. 부처가 된다.조사가 된다. 다 모양이 달라지죠. 나무가 타서 재가 된다. 그러면 재하고 나무하고는 다르잖아요. 그러니까 갑이 변해서 다른 모습으로 되어 을로 나타날 때에 그때는 ‘된다’고 한다. 이건 되는 겁니다. 계위선제니. 계가 좋은 사다리가 되는 것이니

「是故로 破戒하고 爲他福田은」
이런 까닭에, 이러므로입니다. 이것은 이러므로. 이렇기 때문에.파계하고. 계를 지키지 않고 위타복전은 다른 사람의 복전이 되는 것은. 복전은 앞의 대복전의 복전하고 같습니다.

「如折翼鳥가 負龜翔空이라」
날개 부러진 새가 거북을 짊어지고 허공으로 날아가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니라. 
비유의 말씀입니다. 날개부러진 새가. 온전하지 못한. 자신이 온전하지 못하면 남에게 이익을 줄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새에다가 비유한 말씀입니다. 그러잖아요.
새가 자기도 하늘을 날지 못하는데 어떻게 무거운 거북이를 업고 하늘로 날 수 있겠냐 그 말씀이죠. 그러니까 자기 자신이 계행을 잘 지켜서 수도를 철저히 해야만 자기를 구제 할 수 있는데, 항차 다른 사람을 어떻게 이익을 줄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을 제도할 수 있겠느냐. 그러니까

 自罪를 未脫하면 他罪를 不贖이니라. 然하니 豈無戒行하고 受他供給이리요. 無行空身은 養無利益이요 無常浮命은 愛惜不保니라. 望龍象德하야 能忍長苦하고 期獅子坐하야 永背欲樂이니라.


「自罪도 未脫하면」
자기의 죄를 벗어나지 못하면

「他罪를 不贖이니라」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해 줄 수가
없느니라.  속(贖)이라고 하는 것은 돈을 주고 그 죄를 용서받도록 해주는 것인데 여기서는 용서 받는다 그렇게 해석을 하면 괜찮지요.

「然이나」
이건 반대입니다. 그러나

「豈無戒行하고 受他供給이리요」
어찌 계행이 없이
다른사람의. 공급은 供養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無戒食施
하면, 계행이 없이 신도의 시물을 받아먹으면, 아주 무서운 말씀인데. 死入太山하야. 죽어서 태산지옥에 들어가가지고 융동관인(融銅灌咽)하리니. 그냥 펄펄 끓는 구리물을 목구멍에다가 붓는다. 그리되면 어찌 되겠읍니까?  뜨거운 물을 마셔도 잘못하면 위장이 탈이 나게 되는데 펄펄 끓는 구리물을 말입니다. 마시게 되면 어떻게 돼요?
그러니 지금여기 나오는 말입니다. 자기가 공부를 안하고 어떻게 다른 사람의 시물을 받겠느냐. 그리고, 신도의 시물이라는게 참 무서운겁니다. 지난번에 10원을 부처님 앞에 올리면 자기가 원하는 것은 100원 어치다. 이런 말씀을 드렸었는데 아닌게 아니라 그런 말씀들이 많이 나옵니다. 나와서 入道不通理하면 불교에 들어와가지고 도를 깨닫지 못하면, 道는 불교입니다 불통리. 도를 깨닫지 못하면, 復身還信施하나니. 長者子 八十一에 其樹不生耳라. 그런 법문이 나옵니다.
이것은 인도 28조가운데 15조 가나제바 존자라고하는 유명한 도인이 계셨읍니다. 그분 신도가 범마정덕이라고하는 신도가 있었는데 아주 큰 부자죠. 요즈음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재벌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아주 가나제바존자한테 그렇게 정성을 다해모시고 했는데
하루는 범마정덕이 가나제바존자를 초청을 했읍니다. “스님 우리집에 와서 공양을 드십시요.” 가나제바가 제자들을 데리고 범마정덕 집으로 갔읍니다. 가서 공양을 하고 스님네가 공양초대를 받으면 반드시 그 집에 가서 법문을 하게 되어 있읍니다. 그래 법문을 다 마치고 그랬는데 그러고 나니까 또 신도가 의심나는걸 묻기도하고 그랬던 모양이죠. ‘스님, 제 말씀을 좀 들어보실랍니까?’ 말씀해 보시요. 그랬겠죠. 그래하는 말씀이 요즈음 우리집 앞에는 이상한 일이 생겼읍니다. 무언고 하면 우리집 정원에 버섯이 얼마전부터 돋기 시작했는데 그 버섯은 맛도 이 세상에는 맛볼수 없는 그 진기한 맛일 뿐더러 이상하게도 저하고 저의 둘째 아들만이 그 버섯을 따오지 다른 식구들은 가봐야 그 버섯을 발견하지 못해서 따오지를 못합니다. 그러더란 말씀입니다.
그래 참 이상하다해서 아무 말씀도 안하시고 선정에 들어서 그 원인을 한번 살펴 봤읍니다. 무엇 때문에 범마정덕하고 그 둘째 아들만 버섯을 따올 수 있고 또 그 맛이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기차게 맛있는가. 이상하다.
왜 그럴까. 그래 관찰을 해보니 아하! 불행하게도 그 버섯의 주인공은 과거에 범마정덕의 밥만 먹고 공부를 안한 비구스님이더라.그래도 또 사실대로 얘기를 해놓으면, “아, 저것은 스님이니 따 먹지 마시오”이렇게 하기도 그렇잖아요. 그 내용을 다 얘기하면 신도의 신심을 떨어트릴 염려도 있고 그래서, “아, 처사님 금년에 연세가 얼마지요?”“예, 저 금년에 79올시다” “그래요. 그러면 한 3년만 따 자시면 끝나겠네요. “그래서, 長者八十一에 당신나이 81살에 其樹不生耳라. 그 나무에 버섯이 나지 않는다. 그래 入道不通理입니다. 불교에 들어와 가지고를 도를 통하지 못하면. 이치를. 이치.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復身還信施라. 자기의 몸을 회복해 가지고 믿음있는 신도의 시주를 갚는다.
자기 몸으로 갚아. 그 버섯이 바로 비구의 몸이라. 살이라. 그 얼마나 끔찍한 얘기입니까.
옛날 스님네 법문에 그런 말씀이 자주 있읍니다. 그러니 기무계행하고 수타공급이리요. 자기 수행이 없이 특히 계를 잘 지키지 않으면서 어떻게 신도의 시물을, 공거라고 해가지고, 이 세상에 공거는(   )없죠.공거라고 해가지고 어렵지않게 쉽게 (          ). 우리는 사업을 하지않는 대신 농사를 짓지 않는대신에 열심히 공부하는것이 우리의 직업이다.
그러니까 ‘도업’ 그랬잖아요. 도닦는게 바로 업이라. 우리는 다른건 할게 없단 말씀이죠.

「無行空身은 養無利益이요」
행이 없는, 실천이 없는 허망한 몸. 이 공자는 빈게 아니고 부질없는 몸. 쓸데 없는 몸이다. 그 말씀입니다.
빌 공자가 아닙니다. 덧없는 몸. 여기의 空자는 덧없다. 가치가 없는 것을 의미하죠. 덧없는 몸은 양무이익이요. 길러도 이익이 없고

「無常浮命은 愛惜不保니라」
무상한 덧없는
목숨은, 부명은 앞의 공자하고 같은 의미죠. 애석불보니라. 사랑해서
아껴도 오래 산다는 보증을 하지 못함이니라. 그러니까 열심히 공부를 해야 된다.

「望龍象德하야」
용상은 큰스님을 말하는데 바다에 사는 동물
중에는 용이 가장 크고 또 용은 아주 신비로운 조화를 부린다. 상상의 동물이긴 하지만은, 그리고 지구상에는 육지에 사는 동물 가운데는 코끼리가 가장 몸집도 클 뿐더러 점잖고, 또 전쟁을 할 때는 그 코끼리를 잘 길들여 가지고 앞장 세워서 그렇게, 요즈음 전차처럼 사용하고 그랬대요. 그러니 용상이라하는 말은, 덕이 있고 도가 높고, 덕이 있는 스님네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용상의 덕을 바래서

「能忍長苦하고」
능히 오랜 고통을 참고

「期獅子座하야」
사자의 자리를 기약해서 사자좌는 부처님이 앉는 자리입니다.

「永背欲樂이니라」
영원히 욕락을 등질지니라.

 行者心淨하면 諸天이 共讚하고 道人이 戀色하면 善神이 捨離하나리라. 四大 忽散이라 不保久住니 今日夕矣라. 頗行朝哉ㄴ저 世樂이 後苦어늘 何貪着哉며 一忍이 長樂이어늘 何不修哉리요 道人貪은 是行者羞恥요 出家富는 是君子所笑니라.

「行者心淨하면 諸天이 共讚하고」
수행자가 여기의 행자는 수행자입니다. 수행자가
마음이 깨끗해지면 모든 하늘이 함께 칭찬하고

「道人이 戀色하면 善神이 捨離하나니라」
수도하는 사람이 여기 도인도 또 수도인입니다.
수도하는 사람이 여자를 그 色은 여자입니다. 여자를 생각하면
선신이. 착한 외호신이 버려서 떠나나니라. 싫어한단 말이죠.

「四大忽散하야 不保久住니」
사대. 우리 몸뚱이가 ‘홀산’이니까. 숨만 떨어지면
오래지 않아서. 딱딱한 뼈는 땅기운으로 돌아가고 피는 물기운으로 돌아가고, 따뜻한 몸의 우리 체온은 불기운으로 돌아가고, 그 다음에 움직이는 기운은 몸의 기운 있잖아요. 기운은 바람 기운으로 돌아가면 각각 흔적도 없어진다.그런데 그게 뭐 언제 몇월 몇칠 몇시에 당신은 세상을 떠나겠소. 그렇게 약속 받아온게 아니잖아요.그러니까 인연다하면 갑자기 세상 떠나죠.그래 불보구주입니다. 오래 산다는 보증을 하지 못하니

「今日夕矣라」
오늘도 벌써 저녁이 되어버렸구나. 금일도 석의라. 오늘도 벌써 저녁이
되었다. 하루가 갔다 이 말씀입니다.

「頗行朝哉ㄴ저」
그 파자는 별뜻이 없읍니다. ‘자못 파’ 그러면 ‘크게’ 이런 뜻이 있는데
그건 그렇게 안새겨도 됩니다. 아침에 실천을 할진저 해야 된다.

「世樂이 復苦어늘」
세상의 쾌락이 후에는 괴로움이 되거늘.

「何貪着哉며」
어찌 탐착할 것이며. 착은 어조사입니다. 어떤 동사나 형용사 밑에 붙어서 그 뜻을 강조하는 글자입니다. 우리가 어디 가는 걸 도착. 그러죠.
불교에서는 또 ‘집착’이라는 말을 쓰죠. 집착, 도착했다. 이 탐착의 착도 마찬가집니다. 어찌 탐착할 것이며,

「一忍長樂이어늘」
한번 참는 것이 길이 즐거운 것이어늘

「何不修哉리요」
어찌 닦지 아니하리요.
인을. 참는 인을. 인욕을 닦지 않겠느냐.

「道人貪은 是行者羞恥요」
수도인이 탐욕을 내는 것은, 是는 어조사고. 행자의 수치요. 수행자의 부끄러운 일이요. 우리는 돈이나 명예나 무슨 지위를 위해서 출가한 게 아니란 말씀예요. 부끄러운 일이요.

「出家富는 是君子의 所笑니라」
출가한 부자는 군자들에게 소소. 비웃음을 받음이니라. 앞에 나오는 소전, 얽힌바다. 애욕소전의 소자하고 같습니다. 스님네가 다른 사람한테 자신을 지칭할때 뭐라고 하는가 하면 빈도(貧道) 그럽니다.  왜 빈도라 하는가 하면 나는 물질적인것 보다는 도가 다른 사람하고 비교해 볼 때 아직 참 모자라기 짝이 없어서 매우 부끄러운 사람이 올시다. 그래서 빈도라 그럽니다.
도가 다른 사람보다 앞서지 못했다 해가지고 곧 아는것, 깨달음이 깊지 못하다고 해서 자칭 빈도라고까지 했는데, 하물며 재산을 모은다던지 명예에 집착한다든지 할것 같으면 스님의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속 사람들한테 비웃음을 받아 마땅하다.한데, 전에도 잠시 말씀드렸듯이 고려 시대에 불교가 음으로 양으로, 정부나 권력자, 심지어는 사회 지도층으로부터 보호를 받다보니까 너무 편안해졌고 또 경제력이 풍부해져서 자연히 수도에 전념하기 보다는 재산이나 늘이려 하고, 경제력이 있으니까 그것을 이용해가지고 자기의 명예나 낼려고 하는 폐단이 있었읍니다. 그래 가지고 고려 후기에는 사회 지식층으로부텨 불교는 본래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왜 이렇게 되었나 하는 비판을 받아오다가 급기야는 조선시대에서는 배척을 받게 된다. 우리는 불교를 가까이 하다 보면 잘못하면 정권유지하는데 큰 어려움에 봉착하게 될 것이 분명하니 의식적으로 배척해야되겠다 해서 철저하게 배불 정책을 하게 되었는데, 그 원인은 전부 스님네들한테서 나왔다 이겁니다.
스님네가 스님네다운 행동을 안해 가지고 결국 지도층으로부터 서서히 의심을 받기 시작하고 비판을 받기 시작하다가 그런 끔찍한 결과를 가져왔는데, 조선시대에 한때는 서울가면은 동대문 서대문 북대문. 지금 북대문은 없읍니다. 다른건 남대문은 있죠. 우리나라 국보입니다.그 다음에 동대문 있죠. 서대문은 있단 말씀이죠. 명칭도 그대로 있고 그것을 도성이라 했읍니다. 도성 안에 남의 집의 심부름하는 사람을 불행하게도 종이라고 했는데, 종까지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고 심지어는 죄를 지은사람. 밥을 빌어먹는 거지까지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었는데, 스님네는 동서남북 사대문 안에 일체 발걸음을 할 수 없다. 하고 출입 금지령을 내렸읍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원인을 누가 만들었나 스님네가 스스로 부채질 했다. 그러니 여기 나오는 말씀이 글자는 얼마 안되지만은 참 우리가 명심하고 늘 우리스님네는 사회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도록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또 스님네는 나하나 이렇게해서 무엇하랴 그게 아니란 말씀이죠. 一魚濁水격으로, 고기 한마리 때문에 물전체가 흐려지듯이 스님 한 분 잘못하면 전체의 스님네한테 영향을 준다.
그래서 송나라때 운문종의 宗賾이라고하는 초심 시간에도 제가 말씀을 드렸는데,스님이 귀경문이라고 하는글을 썼는데, 거기에보면 龜鏡文僧重則法重하고,스님네가 사회로부터 존경을 받으면 불법도 존경을 받게되고 僧輕則法輕하나니,스님네가 사회사람으로부터 업신여김을 받으면 불교도 따라서 업신여김을 받게된다.內護旣嚴이라야. 안으로 스님네의 살림살이가 엄격해야만 外護必謹하리니, 밖으로 불교를 보호하는 것도 반드시 삼가하게 된다. 그런 말씀을 해 놨읍니다.
여기에 나오는 내용도 그렇습니다. 해서, 여러분들이 앞으로 살아갈 때 절 안에서나 절 밖에서나 항상 나는 스님이기 때문에 스님네의 몸가짐, 스님네의 말씨, 스님의 생각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씀이죠. 그것을 못하고 하기 싫으면 아버지법 배우러 가야 마땅하단 말씀이죠. 안 그래요?  그래 출가한 부자는 군자들에게 비웃음을 여기의 笑자는 비웃을소자입니다. 비웃음을 받음이니라.

 遮言이 不盡이어늘 貪着不已하며 第二無盡이어늘 不斷愛着하며 此事無限이어늘 世事不捨하며 披謀無際어늘 絶心不起로다. 今日不進이어늘 造惡日多하며 明日無盡이어늘 作善日少하며 今年不盡이어늘 無限煩惱하며 來年無盡이어늘 不進菩提로다.

「遮言이 不盡이어늘」
이것은 ‘막는다’ 하면 ‘차’로 읽고 ‘이’ 그러면 ‘자’로 읽습니다.
글자가 ‘이자’하는 글자가 또 따로 있는데, 말씀언변에 책받침 하면 이 這자지요. 이 글자하고 같이 읽는 경우도 있고, 그 다음에 지범개차의 차는 막을 차자잖아요. 하지말아라. 금지하는 뜻. 그런데 이것은 ‘자’라고 읽어야 됩니다.이것도 해석을 여러가지로 합니다만은. 큰 그것은 아니니까.이 말이. 그 자는 무엇을 가리키느냐 부제불제불에서부터 지금까지 수도는 어떻게 해야 되고 우리마음 가짐은 어떻게 해야 되고 그런게 쭈욱 나오잖아요.
곧 수행자의 상을 말씀했단 말예요. 또 수도를 할 때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된다 하는 말씀이 자세히 나오잖아요. 그러니 바로 자언. 이 말씀이란 말이죠.이 말씀이 다함이 없거늘

「貪着不已하며」
탐착해서 마지 않으며, 그 已자는
그칠지자하고 마찬가집니다. 그치지 아니하며 말已자인데  그만 둔다는 말씀이죠. 그러니까 곧 그친다. 탐착해서 그치지 아니하며

「第二無盡이어늘」
제2. 다음번 다음번 하는것이 다함이 없거늘 자, 이것은 잘못했읍니다. 이건만 하고 다음엔 말아야지. 그래도 또 그치지 못하고 그 다음에 가서도 또 이번만하고 다음에는 잘해야지. 자꾸 이번만, 이번만, 하다보니까 제2가. 다음번에, 다음번에는 잘한다 하는 것이 그만 죽을 때까지 그렇게 하다가 만다. 제2가, 두번째가 다함이 없거늘

「不斷愛着하며」
애착을 끊지 못하며, 자꾸 미루다가 만다는 말씀이죠.

「此事無限이어늘」
차사는 선종의 표현으로는 一大事라 그럽니다.
일대사. 곧 수도와 불교의 공부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할 일이라는 것은 바로 수도하는 일입니다. 이일이 무한이라. 성불해야 끝이 나는데 그러기전에는 할 일이 태산같이 많다. 시간적으로 따지면 3아승지 라고하는 셀래야 셀 수가 없는 그런 오랜 기간이더라. 그러니 그 과정에 우리가 거쳐야 되는 일이 얼마나 많으냐 그래 이 일이 곧 불교의 수도하는 일에 한정이 없거늘

「世事不捨하며」
세상일. 곧 세속적인 일입니다. 세상 일을 버리지 못하며. 않는게 아니라 못하는 겁니다.
이것은 그렇죠. 안하는 것은 할 수 있는데도 일부러 안하는 것이죠.못하는 것은 힘이 없어서 못하는 거죠. 들지 못한다⋅먹지 못한다, 하면 자기가 못하는 거지 안하는게 아니 잖아요. 그러니, 여기서는 못한다. 그래야죠.

「彼謀無際어늘」
여기의 모자는 속일 모자입니다. 속는다 그말이죠.
다른 사람 꾀에 빠져 속아 가지고 자기가 잘못된다 하는 의미입니다.
우리 ‘속는다’ 그러잖아요. 그게 본래는 ‘꾀 모자’인데 꾀에 속는 것이, 그렇게 해석 하면 되죠.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꾀에 빠지는 것이, 저(피:彼)라 하는 것은 세속을 가리킵니다. 세속의 속는 것이 다함이 없거늘

「絶心不起로다」
끊을 마음을 일으키지 아니함이로다. 곧 그렇게 해석을 해야 되는데 彼자는 곧 바깥 경계로 봐도 되고 세속적인 것으로 봐도 됩니다. 자, 여기까지는 출가해서 도를 닦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또 불교 공부에만 전념 해야지. 수도에만 전념을 해야지. 그러니까, 제목도 발심수행장이잖아요. 다른 일을 해서는 안된다하는 말씀이고,
그 밑에서부터는 시간이 금쪽보다도 귀하다는 말씀을 합니다.

「今日不盡이어늘」
오늘 다하지 못했거늘

「造惡日多하며」
오늘날 부진은 공부를 다해 가지고 해탈을 못했기 때문에 내가 다해야 될 일을 끝내지 못했단 말씀이죠. 오늘날 다하지 못했거늘 악 짓는 날이 많으며,

「明日無盡이어늘」
내일 내일 하는 것도 무진이거늘, 다함이 없거늘

「作善日少하며」
착함을 짓는 날이 적으며

「今年不盡이어늘」
금년도 다하지 아니 했거늘 [금년 금년하는 것이 다함이 없거늘]

「無限煩惱하며」
한량없이 번뇌를 일으키며

「來年無盡이어늘 不進菩提로다」
내년 내년 하는 것이 다함이 없거늘
보리에 나아가지 못함이로다. 그 진자는 ‘깨닫는다’하는 뜻입니다.

 時時移移하야 速經日夜하며 日日移移하야 速經月晦하며 月月移移하야 忽來年至하며 年年移移하야 暫到死門하나니 破車不幸이요. 老人不修라. 臥生懈怠하고 坐起亂識이니라

「時時移移하야」
때때로 옮기고 옮겨서, 시간이 자꾸자꾸 가가지고

「速經日夜하며」
속히 일야를 지내며. 왜, 우리가 지나가는 것을 경과한다.
그러잖아요. 그리고 또 길을 가는데, 어디 들려 가지고 가게 되면 경유라
그러잖아요. 지날經이죠. 일야를 지내며,  

「日日移移하여」
그렇죠. 시간 시간이 자꾸 모이면 하루가 되고, 그말씀입니다. 일일이이하야 하루 하루가 지나가서

「速經月晦하며」
속히 월회를 지내며, 월회는
그믐입니다. 그믐이 되고, 그 다음에 한사간 두시간이 모여서 하루가 되고 하루하루 가다보면 한 달이 되고, 그 다음에

「月月移移하여」
한달 한달이 자꾸가다보면

「忽來年至하며」
홀연히 일년이 되며, 속히 일년이 되며,

「年年移移하야」
또 한해 두해가 자꾸자꾸 가 가지고

「暫到死門하나니」
잠깐, 잠깐 사이에 죽는데 도달하게 되나니, 죽게 되어 버린단 말씀이죠. 시간이 참 빠른 것이다. 出曜經이라고 하는 경전이 있읍니다. 거기에 보면은 是日已過하면 오늘날이 이미 지나가면 命亦隨滅이라. 목숨도 또한 따라서 줄어들게 된다. 그렇잖아요. 그만큼, 내가 지낸만큼 줄게 되잖아요.
시일이라 명역 수감. 오늘날이 이미 지나감에 목숨도 또한 따라서 줄어든다. 하루만큼 우리한테는 못 살게 되니까. 如少水魚이니 줄어드는 물의 고기와 같거니 斯有何樂이리요. 여기에 무슨 즐거움이 있겠느냐! 사유하락입니다. 무슨 즐거움이 있겠느냐.이건 出曜經 제 1권에 나오는 말씀인데 경전에는 이렇게 설명했읍니다.
가뭄이 들어 가지고 못이 말라 드는데 물고기 세마리가 있다가 ‘자! 우리 이러지 말고 물이 많은 바다로 가자. 그렇지 않으면 물이 말라서 우리가 죽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해서 각자 어떻게 하든지 바다로 가기로 약속을 했읍니다. 그래서, 한마리가 껑충 뛰어 가지고 배를 타고 바다로 갔읍니다. 또 한마리는 껑충 뛰어서 다른 물건에 붙어서 바다로 갔읍니다. 또 한마리는 마지막 있는 힘을 다해서 말라가는 못에서 뛰긴 뛰었는데 기운이 다해 가지고 그만 바다에 가지 못하고 그 못에서 말라 죽는 신세가 되었다.
 그걸 보시고 부처님께서 이런 게송을 지은겁니다. 시일이 과하면, 오늘날이 이미 지나가면 명역수감이라. 그렇잖아요. 말라드는 연못에 사는 고기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하루 지나간 만큼 고기는 빨리 죽게 되니까 오늘날이 이미 지나가면 목숨도 또한 따라서 줄어든다. 여소수어니, 줄어드는 줄어드는 못의 물고기와 같기는 사유하락이리요. 여기에서, 이 세상 살이 하는데서 무슨 즐거움이 있겠느냐. 중국스님네는 예불을 할 때 그 뒤에다가 衆等은 常念無常하야, 대중스님들은 항상 무상한 것을 생각해서 아! 當勤精進하야, 如救頭燃하고, 마땅히 부지런히 정진해서 如救頭燃 하고, 머리가 타는 것을 끄는 것과같이 하고, 但念無常하야, 다만 무상을 생각해서 愼勿放逸 하소서,
삼가 방일, 게으르지 마십시오. 그런 내용을 저녁 예불 때는 꼭 합니다.
선원청규에도 이 글이 나오는데, 어쨌건 시간이 자꾸 가가지고 하루가 되고 하루가 자꾸 가게 되면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자꾸 가게되면 일년이 되고 그것이 몇년 가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호호백발이 되고, 어느덧 죽게된다. 시간이 그만큼 무상하다 해서 시간을 갖다가 無常殺鬼라. 무서운 아주 우리를 잡아가는 귀신과 같은 것이라. 해서 죽일살자하고 귀신귀자를 씁니다.

「破車不行이요 老人不修라」
망가진 수레는 갈 수가 없고
이 귀절을 봐가지고 원효스님이 비교적 연세가 들었을 때 쓴 글일 것이다. 이렇게 짐작할 수 있죠. 밑에 노인불수라. 아! 늙어 보지도 않은 사람이 노인 얘기를 하겠어요? 앞에 말씀은 비유요. 비유죠. 망가진 수레. 자동차도 그렇잖아요. 고장난 차가 어떻게 갈 수 있나요 마찬가지지. 고장난 차가 가지 못하듯이 늙어진 사람은 수도를 못한다. 망가진 차는 가지 못함이요. 노인은, 늙은 사람은 닦지 못함이라.

「臥生懈怠하고」
누으면 해태심만 내고, 그렇지 뭐 기운이 없는데 무순
공부를 할래야 할 수 있나요. 하고 싶은건 그저 편안하게 누워서 지내는 것 밖에 없단 말씀이죠. 다른건 할 수도 없는데,

「坐起亂識이니라」
누워서 게으름만 부리게 되고 좌기란식이니라. 일어나면 어지러운 분별만 난식. 어지러운 분별만 일으킴이니라. 그러니까 노인이 되면 자꾸 잔소리나 하고, 누우려고 하고 아프다고 하고 그것 밖에 못한단 말이죠. 그러니까 젊어서 부지런히 부지런히 수행을 하시요.

幾生不修어늘 虛過日夜하며 幾活空身이어늘 一生不修오 身必有終하리니 後身은 何乎아 莫急乎며 莫速急乎아.

「幾生을 不修어늘」
여러생을 닦지 아니했거늘
그렇잖아요. 우리가, 그렇기 때문에 지금 중생이라는 소리를 듣고 아직까지도 번뇌속에서 허우적 거리는 신세가 되었더라.

「虛過日夜하며」
부질없이 일야를. 일야. 시간을 보내고

「幾活空身호려하야」
얼마나 허망한 몸. 앞에 공신 나오죠. 허만한 몸을 살리려 하여

「一生不修오」
일생동안 수도하지 않는고.

「身必有終하리니」
몸은 반드시 마칠 때가 있으리니 종은 끝난단 말씀이죠. 그러니 우리 죽어갈 때를 ‘臨終’ 그러쟎아요

「後身은 何乎아」
자. 사람이 태어날 때 벌써
‘너는 몇년 동안 사시오’ 하고 언도를 받아 났읍니다. 그것이 이른바 목숨이죠.
명이라. 그것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읍니다. 그러면 이미 이제 사형 선고를 받은 거라. 지금은 우리가 사는건 어느 기간인가 하면 유예 기간입니다.
猶豫期間. 집행 유예를 지금받아 가지고 이렇게 그냥 정신없이 살고 있죠. 그런데, 금생에 수도를 잘 해서 해탈을 하면 다음에는 죽음 하고는 관계가 없으니까. 그래 부처님이 성불 하시고 나서 我生而意하고 不受後身이라. 뒷몸을 받지 않는다. 그런 말씀을 하셨다 그러죠 그런데 우리는 수도를 해 가지고 도를 깨닫지 못하면 뒤에 몸을 다시 받아야 됩니다. 그 때는 무엇이 될지 몰라요. 아무도 보증해 줄 수도 없고, 그러니 뒷 몸이 두렵지 않느냐 이겁니다. 後身은 何乎아. 뒷 몸은 어떻게 감당할 것이냐.

「莫速急乎며 莫速急乎다」
어찌 급하지 아니하며 어찌
급하지 아니한다. 그 莫자는 참으로. 참으로 급하지 아니하며 참으로 급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러니 그 두 귀절은 반복했지요. 반복했는데 속히 수도를 해서, 발심 수행해 가지고 성불한 다음에 모든 은혜 받은이에게 은혜를 갚도록 하십시요. 이것으로 이제 발심수행장이 끝났읍니다.
 끝났는데, 자, 그러면 발심 수행. 발보리심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서 그것이 상구보리 하화중생 그런 의미를 가졌다 그랬죠. 그 다음에 수도를 하도록 권하는 글이라 했는데 그러면 이 요지는 뭐라고 하는 것이 좋겠느냐 제 나름대로 또 정리를 한 번 해 봤읍니다.
자, 發 그러니까 낸다는 뜻이죠. 그냥 心 그랬는데 큰大자를 붙이고 마음心자. 發大心이 바로 上求菩提 下化衆生 하겠다고 하는 굳은 마음입니다.
그렇게 한 다음에, 지금 여기에 나온 대로만 수행할것 같으면, 도인이 되죠. 그러니 발대심하여, 큰 마음을 내 가지고 悟菩提하라. 도를 깨달으라 이겁니다. 도를 깨달을것 같으면 자기 마음냈던걸 다성취할 수 있으니까. 보리가 도입니다. 이것이 발심수행장 요점입니다.
發大心하야. 큰 마음을 내어가지고 위로는 부처님이 되겠다고 하는 마음. 밑으로는 모든 중생까지를 구제해서 제도를 해 가지고 우리가 사는 이 넓은 온 세상이 다 부처님 국토가 되도록 하겠다고 하는마음이 바로 발대심입니다. 그런 다음에 도를 깨닫는다. 보리라고 하는게 도니까 도를 깨달으시요.이렇게 하는 것이 발심수행장의 요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