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불교

[불교사상가] 17. 백장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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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사상가]  17. 백장선사

 

선종 수행 규범 담은 청규 도입해 조사선 기틀 마련

 

중국 선종사에서 백장회해(749~814)는 남악회양과 마조도일의 조사선 선풍을 계승.발전시킨 인물이다. 마조도일의 선법을 계승한 백장은 선문에 청규를 도입.제정시킴으로써 조사선 형성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특히 백장의 선법은 위산영우(771~853)와 황벽희운에게 전해짐으로써 법계상에 있어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위산은 그의 제자 앙산혜적(807~883)과 더불어 선종 오가(五家) 중에 위앙종을 창시하게 되고, 황벽의 선법은 임제의현에게 전해져 임제종이 만들어지게 된다.

 
특히 백장청규는 선종의 생활문화와 수행생활의 규범 의례를 살펴보는데 있어 중요한 부분이다. 중국에 선법이 전래된 이후로 중국선종은 독자적인 교단을 형성하지 못하다가 백장의 청규제정을 계기로 새로운 방향을 모색케 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 생애와 저술 

 

독자적 중국 선종 교단 형성 모태

 

달마 이후의 선법 성찰 종지 규명

 

“마음 바탕인 자성은 ‘본래 청정’”

 


백장은 자신의 반생(半生)을 백장산에 머물며 지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백장선사라 일컫는다. 백장의 휘는 회해로 태원왕씨이며 복주 장락현 출신이다. 백장의 출가와 수계의 시기에 대해서 ‘탑명’에는 ‘서산혜조화상으로부터 삭발하고 형성법조율사로부터 구족계를 수지했다’고 전한다. ‘탑명’에는 백장이 66세에 시적하고 법납은 47년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백장이 구족계를 수지한 시기를 19세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백장은 구족계를 받은 후 기뻐서 말하기를 “장차 망령된 근원을 씻어 반드시 법의 바다에 들어가겠다. 오직 마음 깨닫기를 원하는데 언전(言詮)을 빌리겠는가”라고 다짐하고 드디어 려강(廬江)의 부차사(浮寺)에서 경장을 수년간 열람하였다고 한다. 려강(廬江)은 현재의 안휘성(安徽省) 려강현(廬江縣)으로 그곳에 부차사가 있다고 전한다.

 
백장사 뒤 바위 위에 새겨진 ‘천하청규’는 송대 명필 유공권이 쓴 것으로 천하에 제일가는 청규란 뜻이다.

 

백장은 마조도일(709~788)로부터 법을 전해 받는다. ‘탑명’에 ‘대적을 스승으로 모시고 심인을 증득했다’고 한다. 그러나 백장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대적을 만나 수학했는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송고승전〉에는 ‘대적이 남강에서부터 교화함을 듣고 마음을 의지해 종장이 되었다’라고 밝히고 있으며, 〈조당집〉에서는 대적을 법회에서 만나 한 번 보고 입실했다고 한다. 또한 〈사가어록〉의 ‘백장어록’에는 “마조가 강서에서 교화를 펴고 있을 때 찾아가 마음을 의지해 가르침을 받았다”고 해 강서는 남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백장은 강서성 남창부 봉신현의 백장산(百丈山)에서 머물면서 시적할 때까지 19년간을 백장산에서 선법을 펼쳤다. 이 기간에 위산과 황벽을 비롯한 장경대안(長慶大安)과 석상성공(石霜性空)등 걸출한 禪僧이 배출되게 된다. 백장은 원화9년(814)에 원적하였으며 세수 66세 법납은 47세로 탑명에 기록되어있다.


백장은 백장청규를 제정하여 선종교단의 기틀을 마련한 점에 큰 의의가 있다. 백장의 선사상적 측면을 알 수 있는 문헌으로 〈사가어록〉 중에 ‘백장어록’과 ‘백장광록’이 있고, 〈고존숙어록〉에도 〈백장어록〉과 〈백장광록〉이 있으나 내용상에는 큰 차이는 없다. 그리고 〈조당집〉에는 ‘백장록’ 및 〈백장광어〉가 게재되어 있다. 특히 〈백장광어〉는 북송 초기에 법안문하의 백장상선사(百丈常禪師)에 의해 재편되어지고 각범혜홍(覺範惠洪)이 제서(題序)를 썼다. 이 자료의 내용은 북종(北宗)으로부터 대주혜해의 〈돈오요문〉에 이르는 선문헌의 영향을 받았고, 마조의 즉심즉불 도불용수(卽心卽佛 道不用修)의 가르침을 계승하였다.

 


# 영향 

 

율원에서 선원 독립

 

위앙종 임제종 탄생

 

사자상승 전통 확립

 


백장이 중국 선종사에 끼친 영향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선종의 율장인 백장청규를 제정하여 선원을 율원으로부터 독립시켜 선종의 토대를 마련한 점이고 둘째는 남악회양.마조도일로 이어지는 남악계의 선법을 위앙과 황벽에게 전함으로서 당대 오가 중 위앙종과 임제종을 탄생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셋째는 선종의 사자상승의 전통을 확립한 부분이다.


이러한 점을 볼 때, 백장은 조사선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킨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백장은 단지 청규의 제정자로서 너무 큰 위치를 차지하다보니, 사상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소홀한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백장 또한 자신의 사상적 토대 없이 청규제정이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백장이 어떠한 선사상적인 면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백장의 선사상을 일구(句)로써 나타낸다면 우리의 마음을 ‘체로진상(體露眞常)’의 모습으로 나타나면서 심성은 ‘무염’이고 깨달음의 모습은 ‘돈오’로 나타내었다.


우리의 마음은 본래 청정하며 참되고 항상 그대로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 마음속의 망령된 인연을 쉬면 그대로가 바로 부처의 모습인 것이다. 이처럼 백장은 자신의 선사상적 바탕위에 실천적 수행의 모습을 청규의 제정을 통해 구체화 했으며, 조사선 사상을 더욱 꽃피우는 원동력이 되어 중국의 새로운 선불교의 모습을 발전시킨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 사상


백장 선사상 특징은 마조의 조사선 정신과 수행방법을 계승하면서 자신의 사고와 수행방법을 집대성해 당말 오가의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특히 백장의 설법형식을 담고 있는 〈백장광록〉의 특징은 초기경전에서부터 대승경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경전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백장 자신이 려강의 부차사 경실에서 수년간 경문을 본 영향이라고 본다. 초기의 선 문헌은 단순히 경전 명을 밝히고 그것을 논거로 자신의 법을 증명하려는 모습이 나타났다. 이것은 단지 경전의 내용을 증명하려는 형태였다. 그러나 백장 이후가 되면 경전의 내용은 내면에 담겨있고 자유롭게 밖으로 드러나지는 않으면서 조사의 언어가 중요하게 다뤄지게 됐다.


백장의 돈오 사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대승돈오법요’의 견해는 〈조당집〉.〈전등록〉.〈사가어록〉.〈천성광등록〉 등에서 일치하여 언급된다. 이것은 선종의 돈오적 입장을 계승하면서 자신의 사상을 완전히 정착시키는 계기가 됐다. 또한 마조와 백장은 시중의 원리를 일상화하는 것에서 점차적으로 발전해 선문답 기연의 모습이 다양하게 나타나게 됐다.


백장은 자신의 어록에서 경전뿐만 아니라 조사들의 가르침을 자주 인용하고 있는데, 달마와 승찬의 〈신심명〉의 인용은 백장의 설법에 나타난 두드러진 특징이다. 이것은 달마 이래의 선법을 성찰함으로 해서 자신의 종지를 규명하려고 했던 점에 있어서 의미가 있다. 이와 같이 백장의 선사상은 다양한 경전과 어록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선적 견해를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백장의 심성에 대한 견해는 본래 마음자리는 원만하며 단지 망상번뇌에 물들지 않으면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백장은 자신의 〈어록〉에서 “신령스런 빛이 홀로 밝아 멀리 육근 육진을 벗어났고, 그 본체는 진실하여 영원히 드러난다. 문자에 얽매이지 않아서 심성은 물듦이 없고 본래 스스로 원만히 이루어진다. 다만 망령된 인연을 여의면 즉 여여불이다”라고 했다. 이 문구는 백장의 상당법어로서 선가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여기서 우리의 마음자리는 본래 스스로 고요하며 이 세상을 두루 비추고 있다고 보았다. 이것은 마음의 체용을 나타내는 말로 ‘체로진상(體露眞常)’의 일구는 바로 마음의 바탕이며, 언제나 참되며 항상 그대로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 뜻은 우리 본래의 마음 바탕인 자성은 어떤 것에도 물듦이 없이 본래 청정하다는 것을 강조한 말로 이런 청정한 마음자리에 오염심을 버리면 본래 모습이 나타난다. 백장이 ‘다만 망령된 인연을 여의면 바로 여여불이다’라고 말한 것은 우리의 자성적 본질을 밝힌 것이다. 또한 백장은 항상 제자들에게 불교의 가장 수승한 수행법문인 ‘무소구(無所求)’를 주장했다. 〈백장광록〉에서 “구하고 얻을 것이 있어 마음을 내고 생각을 움직였다 하면 여우라고 하였다” 또한 “마음속에 모두 구하는 바가 없고 모두 얻는 바도 없어야 이 사람은 바로 대시주이며 사자후다”라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백장의 심성설은 마음의 본성을 본래 청정한 마음자성에 바탕을 두고 그 본래심이 번뇌에 물들지 말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마조의 사상을 계승하면서 후에 황벽의 선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마조의 제자인 대주혜해 〈돈오입도요문론〉에서 돈오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말하고 있다.


묻기를, 어떤 법을 닦아야 바로 깨달을 수 있습니까? 답하길, 오직 돈오의 일문으로 바로 해탈 할 수 있다. 어떤 것을 돈오라고 합니까? 대답하길, 돈은 망념을 단박에 제거하는 것이요. 오는 얻은 바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


망념을 단박에 제거하고 얻은 바 없음을 깨닫는 돈오의 개념에 대해 백장도 ‘대승입돈오법문’에서 돈오의 개념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백장 수행법문의 핵심이며 선법의 진수라 할 수 있다. 여러 문헌상 약간의 차이는 보이나 그 내용을 담고 있는 뜻은 비슷하다.

 

〈사가어록〉의 ‘백장광록’ 3권에 제자가 “어떤 것이 대승돈오의 법요입니까?” 라고 묻자, 백장은 “너는 먼저 모든 인연을 쉬어라. 만사를 쉬고 선과 불선 세간과 출세간 일체 모든 현상을 아울러 다 놓아 버려라. 기억하지 말라. 반연하지 말고 생각하지 말라. 신심을 놓아 버리고 오로지 지금 자재하여라. 마음이 목석과 같고 입은 변재가 없어야 하며 마음은 행하는 바가 없고 심지는 허공과 같아야 지혜의 빛이 스스로 나타나 구름이 일출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라고 했으며, 이와 비슷한 구절이 〈조당집〉에도 보인다.


백장은 입도하는 돈오의 법요를 불착의 종으로 삼고 무구를 심요로 삼았다. 그래서 모든 것에 대해 집착하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자신과 관계되는 관계되지 않는 모든 일들에 대해 자유자재한 마음을 갖으면서 마음을 단단히 단련해 모든 것에 대해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백장은 일상생활의 규범인 백장청규를 제정해 수행적 체계를 세웠다. 백장은 〈선문규식〉에서 당시의 선원을 율원으로부터 독립시켰다. 특히 불전을 두지 말고 법당을 중심으로 장노는 방장에 거주하면서 상당설법을 하는 것이 일상화됐다. 스승이 제자에게 설법과 문답의 형식을 통한 시중의 원리를 일상화하면서 여러 가지의 기연문답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선원에서 가장 중요시 되는 부분은 설법과 문답에 의한 수행의 구체적인 모습이었다.


신공스님 / 동국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