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보신문 연재 문수성지 오대산을 가다 1-8 [권오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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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연재 - 문수성지 오대산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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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은 신라 고승 자장 스님이 문수보살을 친견했던 곳일 뿐 아니라 이후 혜초 스님 등 수많은 한국 구법승들이 거쳐 갔던 곳입니다. 따라서 오대산을 순례한다는 것은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번 문수성지 중국 오대산 순례를 기획한 한진관광 마포총판 송기천〈사진〉 대표는 “오대산은 한국불교의 원류가 되는 곳”이라며 “오대산을 찾는 것은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한국 구법승들의 발자취를 찾고 의미를 되새겨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가 오대산 순례를 기획하게 된 것은 지난 2000년. 우연히 지도에서 중국에도 오대산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한국 오대산과 인연이 깊다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다. 그는 『삼국유사』 등 관련 자료를 검토하고 인연 있는 스님들을 통해 오대산의 유래와 의미에 대해 배웠고 이후 매년 오대산 순례 상품을 기획해 불자들과 함께 한국불교원류를 찾는 성지 순례를 실시해 왔다.

올해도 8월 20일부터 9월 1일까지 4차에 걸쳐 순례 계획을 마련했다. 특히 이번 순례에서는 오대산 수상사에서 수험생 합격기원 법회, 티베트 출신의 세계적 음악가 나왕 케촉과 함께 하는 명상캠프 등의 특별이벤트를 마련해 색다른 오대산 기행이 되도록 했다.

송 대표는 “오대산은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의 주석처로 학업에 지친 학생들이 순례를 통해 마음의 안정을 찾고 새롭게 정진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1.

신발이 다 닳고/ 발바닥이 피흘려도 올라갈 수 없어라.// 정강이로 오르고/무릎으로 오르고/가슴과 턱/ 이마로 올라가도 다다를 수 없어라.//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늘의 하늘 끝/ 마음으로 닿을 수 있는/ 마음의 마음 끝/ 어떻게도 이대로는/ 바라다볼 수 없는,// 그 음성 아득하게/ 내리시올 자비/ 커다랗게 허릴 굽혀/ 안아 올려 주실/ 그 정상 이마직서 홀로 울어라. -박두진 ‘지성산(至聖山)’

 

산은 마음의 고향이다. 산은 일상에 지친 몸과 마음에 마치 어미 품처럼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어준다. 그뿐인가, 산은 인생에 비유되기도 한다. 평탄한 길이 있는가 하면 금새 험준한 절벽이 앞을 가로막는다. 이런 까닭에 예부터 구도자들은 산을 수행처로 삼았고 그 속에서 위없는 깨달음을 찾았다.

지난 7월 4일부터 9일까지 문수성지 중국 오대산(五台山)을 순례했다. 문수신앙의 맥을 잇는 성지, 수천 년 동안 이어져오는 중국불교의 중심지였던 오대산의 기운과 정취를 느끼기 위해서였다.

중국 산서성 오대현 동북부에 위치한 오대산은 사방 500리에 걸쳐 뻗어있는 거대한 산이다. 해발 3000m에 달하는 취암봉, 망해봉, 금수봉, 계월봉, 엽두봉 등 다섯 개의 봉우리가 둘러싸고 있다고 해 이름도 ‘오대산’이 되었다. 이 다섯 봉우리 정상은 평평하고 수목이 없어 마치 형상이 흙으로 된 평원 같아 ‘오대(五台)’라 불렸다.

오대산이 불교성지로 자리 잡은 것은 5세기 경. 원래 오대산은 신선도(神仙道) 신도들의 신앙 중심지였지만 이후 『화엄경』에 나오는 문수보살이 거주했던 청량산이 바로 오대산이라 믿어진 후 서서히 불교성지로 바뀌었다. 당나라 때인 6∼7세기에는 360여개의 사찰이 창건될 정도로 오대산은 불교신앙이 성행했지만 현재는 대회진을 중심으로 50여개의 사찰만 남아있다.

오대산은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의 설법지는 물론이고 화엄 신앙의 원류가 되는 곳으로 일찍이 중국 당송 때부터 청량 징관 스님을 비롯해 인도, 몽골, 티베트 등 각국의 수많은 수행자들이 찾았던 명산이다. 특히 오대산은 신라 고승 자장이 문수보살을 친견했던 곳으로 한국불교의 원류가 되는 곳이다. 목숨을 건 구법여행을 떠났던 자장은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한 후 가사와 부처님 사리를 받고 돌아와 통도사와 평창 오대산 상원사에 봉안해 이후 우리나라 사리신앙의 기원을 만들기도 했다.

순례를 위해 오대산으로 향한 것은 중국 산서성의 수도인 태원시에서 1박을 하고 난 다음날이었다. 전날 문수성지를 순례한다는 설렘에 잠을 설친 탓인지 타향에서의 하룻밤은 그 어느 때보다 길게 느껴졌다. 서둘러 아침 식사를 마치고 오대산을 향해 첫 시동을 걸었다.

“여러분 아침 식사 맛있게 하셨습니까. 감사합니다.” 북한 사투리를 구사하는 중국 교포 허홍발 씨가 여행일정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북한에서 태어났지만 오랫동안 타향에서 생활한지라 그의 발음은 어색했다. 그렇지만 동포를 만났다는 생각에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정겹기 그지없다.

태원에서 오대산까지는 250km. 차로 달려 5시간은 족히 넘는 거리이다. 서울에서 대구까지의 거리보다 더 긴 거리가 같은 자치구역에 속한다니 중국 대륙의 광활함이 피부로 느껴지는 대목이다.

  

허 씨는 오대산은 미타성지 아미산(峨嵋山), 관음성지 보타산(普陀山), 지장성지 구화산(九華山)과 함께 오랫동안 중국 4대 불교성지로 불렸다고 소개했다. 그중 무엇보다 오대산은 수많은 전설이 연관돼 있어 전설의 산이라는 별명까지 있다고 했다.

그가 첫 번째로 전해준 이야기는 오대산에 처음으로 건립된 현봉사에 관한 전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900여 년 전. 하루는 한나라 명제가 꿈을 꿨다. 꿈속에 금빛 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나더니 동남쪽에 불교가 흥하니 그곳에 사람을 보내 불교를 배워 통치이념으로 삼으면 대대로 흥할 것이라고 일렀다. 꿈에서 깨어난 명제는 서둘러 사신을 그곳에 파견해 불경을 구해오라고 하니 사신은 천축국에서 섭마등 스님과 축법란 스님과 함께 돌아왔다. 이들은 우선 낙양에 백마사를 짓고 불교를 홍포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우연히 오대산을 찾은 두 고승은 오대산의 경치가 마치 부처님이 제자들을 모아 놓고 설법했던 영취산과 흡사한지라 명제에게 일러 이곳에 사찰을 짓게 했다. 이 때 지은 사찰이 오대산 첫 개산지인 현봉사이다. 어린 시절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듣던 옛날이야기가 새록새록 다시 떠오르는 느낌이다.

허 씨의 설명이 무르익을 무렵, 우리 일행을 실은 버스가 갑자기 멈춰 섰다. 영문을 몰라 창밖을 두리번거리자 허 씨는 “석탄 트럭이 넘어졌을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그렇지 않아도 오대산을 향하는 내내 석탄을 실은 거대한 트럭이 끊이질 않고 지나가고 있었다는 느낌이 있었다. 

산서성은 ‘석탄의 도시’라고 할 만큼 중국에서 가장 많은 석탄을 생산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생산된 석탄이 중국 산업화의 원동력이 된다. 도로가 좁고 교통질서를 잘 지키지 않는 운전습관으로 한번 사고가 나면 대형사고로 이어져 여행 목적지까지 2∼3일은 족히 걸릴 수도 있다고 한다. 이러다 문수성지에 발 한번 딛지도 못하고 돌아가야 한다는 걱정이 앞선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피였을까. 우리를 태운 버스는 용케 막힌 도로를 빠져나와 시원스럽게 오대산을 향해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계속되는 허 씨의 설명을 뒤로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옛날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 오대산 구법여행은 오직 자신의 두 발에 모든 걸 맡겼으리라. 수천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걸으며 구도자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목숨을 건 긴 여정은 누굴 위한 것일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문다. 그들이 험난한 여정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떠한 역경에도 굴하지 않겠다는 굳건한 신심(信心)때문이었을 것이다. 깨달음을 구하고 중생을 교화하겠다는 굳은 신심에서 발원된 서원이 없었다면 결코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얼마나 달렸을까. 드디어 차창 밖으로 오대산 전경이 눈앞으로 다가온다. 녹색의 푸름과 새파란 하늘이 한 폭의 수채화다. 책에서 보던, 말로만 듣던 문수성지 오대산에 드디어 첫발을 내딛었다.

 

 

2. 청량사

똬리를 튼 뱀처럼 ‘S'자로 굽어진 길을 따라 남대(南台) 정상으로 향했다.

  

듬성듬성 자리를 잡은 몇 그루 나무들이 자신들의 영역을 지키고 서 있는 듯하더니 어느새 끝간데 없이 푸른 초원이 넓게 펼쳐진다. 눈이 가물거리도록 광활한 대지와 쪽빛 하늘. 명산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눈앞에 펼쳐진 이런 광경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푸른 초원 멀리서 작은 바람이 일어난 듯 싶더니 어느새 다가와 옷자락을 흔들며 이마에 맺힌 7월의 열기를 한 순간에 식혀버린다. 자연이 빚어낸 예술작품에 감동도 잠시, 서둘러 카메라를 꺼내 눈에 맞췄다. 가슴 밑바닥에 솟구치는 환희를 오롯이 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말이 진실을 담기에 역부족이듯 카메라 또한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담기에는 불가항력이었다. 어느 예술가가 있어 조화옹(造化翁)의 경지를 뛰어넘을 것인가. 카메라를 놓고 자연이 빚어낸 아름다움을 넋 놓고 바라볼 밖에.

가슴 밑바닥에서 일어나는 잔잔한 감동에 숙연해진 일행은 첫 번째 방문지인 오대산 남대 인근 청량사(淸凉寺)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다가갈수록 절의 이름처럼 투명하면서도 시원한 공기가 점점 진해지는 것을 보니 옛 선인들의 지혜에 감탄사가 절로 난다.

청량사는 북위 효문제(재위 471∼499) 때 건립됐다. 오대산에서도 가장 오래된 도량이라고 하니 말하자면 오대산 불교의 시원이라고나 할까. 특히 문수보살에 얽힌 청량사의 창건 설화는 역사적 사실을 넘어 신비감마저 일게 한다.

지금부터 1500여 년 전 서역에서 지혜의 화신 문수보살은 동으로 순례의 길을 가고 있었다. 보살의 가슴에는 동쪽 세상 끝까지 불교를 전파하고자 하는 원력이 용솟음치고 있었다.

서역에서 동쪽 끝은 수 만리 길. 그러나 문수보살은 조금도 힘든 기색이 없이 추위와 더위, 밤과 낮이 바뀌는 거대한 대륙을 걷고 또 걸었다. 이렇게 한참을 걷던 보살의 눈에 오대산이 거대한 몸체를 드러냈다. 잠시 쉴 곳이 궁했던 보살은 한달음에 오대산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오대산에 가까울수록 사나워지는 폭풍우와 타는 듯한 더위가 달려들 듯이 다가왔다. 더욱 놀라운 것은 봇짐을 둘러맨 사람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오대산을 떠나는 것이 아닌가. 늙고 병든 노인으로 변장해, 그들에게 먹을 것을 구걸하자, 정신 없이 피난을 떠나는 와중에도 사람들은 자비의 화신인양 빵과 음식을 내 놓았다. 아름다운 마음씨에 감복한 문수보살은 오대산의 날씨를 바꿔, 이들에게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문수보살이 먼저 떠올린 것은 용왕의 청량석을 빌려오는 것이었다. 청량석이 날씨를 변화시키는 효험이 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노인으로 변장한 보살은 바다로 들어가 용왕에게 청량석을 빌려줄 것을 간곡하게 부탁했다. 그러나 용왕은 “내 그대의 청을 들어주고 싶으나 이 거대한 바위를 옮길 수 없으니 가져갈 수 있으면 그냥 가져가도 된다”고 했다. 용궁의 보물을 주기 싫었던 용왕은 노인이 이 돌을 옮길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용왕의 이런 속내를 모를 리 없었던 문수보살은 주문을 외워 이 거대한 바위를 주먹 크기의 조약돌로 바꿔 주머니에 담고 용궁을 나와 버렸다.

오대산으로 돌아오던 문수보살은 이 청량석을 과연 어디에 둘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런데 남대 정상을 지날 무렵 주머니에 있던 청량석이 갑자기 커지더니 다시 원래의 크기로 변하면서 땅에 떨어졌다. 순간 문수보살은 이 곳이 청량석을 둘 자리라고 판단하고 이 곳에 사찰을 짓게 했다. 이 절이 바로 청량사다. 이후 문수보살은 매년 이 곳 청량사를 찾아 청량석 위에서 대중들을 향해 설법하니 사람들은 이 청량석을 문수보살 바위라고 불렀다고 한다.

  

가이드 허홍발 씨의 설명이 끝날 무렵 멀리서 청량사 전경이 들어왔다. 동화 속에 나오는 성처럼 크고 작은 돌들을 쌓아올린 담 위에 서 있는 청량사는 굳이 이 소설 같은 창건 설화가 아닐지라도 신비스럽다. 좀처럼 무너질 것 같지 않은 단단한 외벽에 자주 빛의 전각들이 파란 하늘과 어울려 정갈하면서도 이색적이다.

청량사는 오대산에 있는 사찰 중 비교적 작은 편이다. 천왕문, 대웅전, 관음전을 기준으로 좌우에 지장전과 순치 황제의 영정을 모신 수호신전을 합쳐 모두 5개의 전각으로 구성돼 있다.

천왕문을 지나 대웅전에 이르자 앞서간 순례자들이 피워놓은 향으로 경내 곳곳이 희뿌연 연기로 덮여 있다. 중국의 향은 피워놓으면 가느다란 실타래가 풀리듯 가늘고 긴 연기를 내뿜는 우리의 것과는 달리 이슬에 젖은 낙엽을 태운 듯 희뿌연 연기를 뿜어낸다. 이러니 몇 개의 향만 피워도 금새 경내는 불이 난 듯 흰 연기로 자욱하다.

자욱한 아침 안개를 헤치듯 향 연기를 빠져 나오자 오대산 기후를 변화시켰다는 전설의 청량석이 시야에 나타났다. 이미 가이드로부터 청량석의 전설을 들은 탓이라 거무스레한 색깔의 이 바위가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가로 2m, 세로 4m 정도 크기의 청량석은 마치 거북이 등처럼 편안해 보였다. 신비함에 잠겨 청량석 주위를 맴돌자 허 씨는 청량석에 얽힌 또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 줬다. 청량석은 청나라 순치 황제가 불교에 귀의해 삭발 염의 했던 곳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비운의 임금 순치 황제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순치 황제는 청나라의 2대 황제인 태종이 1643년 갑자기 죽자 6살의 어린 나이로 황위에 올랐다. 그러나 너무 어린 나이에 황위에 오른지라 모든 실권은 숙부인 예친왕에 의해 이뤄졌고 이렇다보니 청 조정은 조용할 날이 없었다. 이런 황실의 분위기와는 달리 순치 황제는 어려서부터 불교경전 읽기를 좋아하고 덕망 높은 스님들로부터 불교에 대해 묻고 공부하는 것을 즐겨했다. 그렇게 어린 시절을 보낸 순치 황제는 자신을 둘러싼 끊임없는 권력 싸움이 계속되고, 여기에 사랑하던 후궁 동귀비가 돌연 죽자, 인생의 무상함과 삶에 대한 회의를 느꼈다. 이런 그에게 유독 마음의 안정을 준 것은 불교였다. 특히 어린 시절 스님들이 해준 석가모니 부처님의 출가 이야기를 떠올리며 불법에 귀의하겠다는 서원을 세웠다.

그는 과감히 황제 자리를 버리고 출가할 것을 결심했다. 이후 순치 황제는 청량사를 찾아 불법에 귀의하고 평생 무소유로 일관하며 생을 마감했다.

허 씨의 계속된 설명을 뒤로하고 불경스럽지만 청량석에 올랐다. 가부좌를 틀고 잠시 눈을 감았다. 청량한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청량석의 전설이 현실로 다가오는 듯 뜨거운 태양으로 타 들어간 몸과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 이국 땅을 찾았던 순례자도 이 곳 청량석에서 순례 여정의 고단함을 달랬으리라. 순간 구법을 위해 목숨 건 순례를 떠났던 그 옛날 구법승들의 고단함이 가슴 밑바닥에서 ‘몰록’ 솟아난다.

 

 

3.

열기로 달아올라야 할 7월 한 낮이건만 오대산은 선선하기만 하다. 마치 우리의 초가을을 옮겨다 놓은 듯 시원스런 살바람에 콧등에 맺힌 땀방울은 이내 자취를 감춰버렸다. 여름의 열기를 한 순간에 식히는 청량한 바람. 예로부터 오대산이 청량산(淸凉山)으로 불렸다는 옛 선인들의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님을 오대산에 발을 들이는 순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청량사를 나올 무렵, 해는 중천을 넘어섰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전설로 신이함이 가득한 청량사에서의 감동을 뒤로 하고 다음 순례지인 대라정(大螺頂)으로 향했다.

대라정은 오대산 중심부인 대회진(臺懷鎭)에 위치한 사찰로 동대, 서대, 중대, 남대, 북대의 다섯 문수보살을 모두 모아 놓은 곳으로 유명하다. 예로부터 대라정을 참배하면 오대의 문수보살을 모두 참배한 것으로 인정하는 풍습도 이래서 생긴 것이다.

대라정이 오대산의 참배지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 청나라 6대 황제에 등극한 젊은 건륭(재위 1735~95)이 이곳을 참배하면서부터다. 깊은 신심을 간직하고 있었던 건륭은 황제 등극과 함께 문수성지 오대산을 찾았다. 북경 자금성에서 오대산까지는 620여km의 거리. 족히 한두 달은 넘게 걸리는 긴 여정이다. 젊은 황제는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오대산을 향해 길을 떠났고, 결국 오대산 입구에 도착했다.

그러나 정작 오대산은 건륭 황제의 참배를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동대를 오르기 위해 발길을 옮기자 비바람이 몰아쳤고, 다시 중대를 오르려 하면 폭설을 퍼부어 황제의 발길이 꽁꽁 묶여 버린 것이다. 중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패기 넘친 황제였지만 자연의 힘 앞에는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기를 수차례. 더 이상 순례를 강행할 수 없었던 황제는 아쉽게도 자금성으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문수성지를 꼭 참배하겠다는 황제의 서원이 결코 식은 것은 아니었다. 이듬해 황제는 신하들을 이끌고 험난한 여정을 거쳐 다시 오대산과 마주했다. 반드시 오대를 참배하겠다는 마음에 황제는 한달음에 산을 올랐고 오대산의 중간 지점인 이 곳 대라정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멀쩡하던 날씨는 대라정을 뜨기가 무섭게 흐려지더니 폭풍우가 휘몰아쳤다. 설사가상으로 살을 에는 추위가 엄습했고 중대의 중턱에서 쏟아지는 눈 속에 그만 고립되고 말았다. 이제는 참배가 문제가 아니고, 생사가 오락가락하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갖은 노력 끝에 다시 대라정으로 돌아온 황제는 부랴부랴 오대산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황제가 떠난 자리에는 대라정 주지 스님의 깊은 번뇌와 고민이 오대산만큼이나 높은 크기로 남겨져 있었다. 황제는 그곳 주지 스님에게 “3년 뒤에 다시 돌아올 테니 꼭 오대의 문수보살을 모두 참배할 수 있게 해 달라”며 간곡한 부탁을 하고 떠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제의 부탁은 부탁이 아닌 명령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주지 스님의 목숨이 걸린. 황제의 부탁을 받은 주지 스님은 깊은 번민에 빠졌다. 황제의 명을 어길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날씨를 바꿀 수도 없고. 이를 화두삼아 몇날 며칠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스님은 급기야 시름시름 병까지 앓게 됐다. 그러나 스님의 화두는 이제 갓 출가한 동자승의 한마디에 말끔하게 날아가 버렸다. 동자승의 해법은 오대의 문수보살을 모두 대라정으로 옮겨오는 것.

주지 스님은 곧 동자승의 말에 따라 동, 서, 남, 북, 중대에 있는 다섯 분의 문수보살을 동일한 크기로 만들어 이곳 대라정에 봉안했다. 이후 건륭 황제는 매년 대라정에 올라 문수보살을 참배했고, 후대 사람들은 이를 두고 ‘작은 참배’라 불렀다고 한다.

 

설화 같은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일행의 눈앞에 대회진이 가득 들어왔다. 대회진은 대형 사리탑이 봉안돼 있는 탑원사를 비롯해 현통사, 광종사, 만불사, 대라정 등 크고 작은 사찰 10여 개가 모여 있는 오대 불교의 중심지. 더욱이 문수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수만 리 길을 마다 않고 오대산을 찾은 수행자들이 오대에 오르기 전 목을 축이며 숨을 고르던 곳이다. 말하자면 원활한 성지 순례를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베이스캠프 같은 곳이라고나 할까.

빡빡한 순례 일정에 숨조차 고르기 힘들었던 일행은 대라정을 오르기 전 에너지 충전을 위해 인근 음식점에 들렀다.

이곳은 강수량이 적고 물이 귀해 밥보다 밭농사로 얻은 채소를 주식으로 하는 곳이다. 짧은 기간이지만 기름기 넘치는 중국음식에 속이 메스꺼웠던 일행에게는 더없이 좋은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신선한 채소라도 먹으면 느끼해진 속을 달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에서였다. 그러나 이런 희망도 잠시. 식탁 위에 올려진 음식에 땅이 꺼지는 듯한 한숨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삶은 토마토에 기름 자글거리는 오이며 가지. 신선한 채소는 그야말로 그림속의 떡이었던 것이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오대산 지역은 워낙에 물이 귀하고 오염이 심해 날 것을 그대로 먹으면 탈이 날 수 있다고 한다. 때문에 이 곳 사람들은 부득이 모든 음식을 삶거나 익혀 먹는 것이다.

허기를 달랠 양으로 음식 몇 점을 마지못해 집어먹고 대라정으로 향했다. 대라정은 오대산 중심부의 비교적 낮은 봉우리에 위치해 있다. 

그러나 보기와는 달리 경사가 심해 오르는 길이 쉽지만은 않다. 이렇다보니 오대산 절경에 맞지 않게 스키장에서나 봤음직한 리프트가 산의 입구에서 대라정까지 늘어져 있는 기이한 풍경이 연출된다. 인간은 대자연의 부드러운 살갗을 생채기 내는 중금속과 다를 바 없는 또 하나의 오염원이라는 생각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결국 우리는 빠듯한 여정을 핑계로 리프트에 몸을 맞길 수밖에 없었다. 물론 불교 성지를 참배하는 불자의 한사람으로써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이 불경스런 일임을 잘 알고 있기에 마음속으로 죄송스런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안전장치가 허술해 보이는 리프트는 작은 바람에도 쉽게 요동쳤다. 그러나 잠시 뒤 리프트가 산 중턱을 향하자 시원하게 드러난 대회진의 전경과 살갑게 불어오는 바람에 잠시 심란했던 마음이 어느새 한가지로 모아진다.

탑원사 사리탑을 중심으로 목조 양식의 고졸한 사찰들이 옹기종기 모여 뿜어내는 고풍스런 아름다움에 막혀있던 가슴이 시원스럽게 뚫린다. 아마도 고래로 수많은 순례객들이 대라정에 오른 것도 이런 상쾌함 때문이리라.

일주문을 지나 경내에 들어서자 나이 지긋한 백송이 장대한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는 백송은 마치 문수성지를 지키는 수호신인양 근엄해 보이기까지 한다.

백송을 지나 고개를 들자 오대의 문수보살을 봉안한 문수전이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중대 유동 문수보살을 기준으로 좌로 북대 무구 문수보살, 서대 사자후 문수보살이 우로 남대 지혜문수보살, 동대 촉명 문수보살. 다섯 문수보살이 서로 다른 모양으로 자비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순례객을 반기고 있다.

다섯 분의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있으려니, 중생들에게 지혜를 주기 위해 그 때 그 때 마다 다른 모습으로 화현했을 문수보살의 대자대비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참배를 마치고 대라정 전망대로 향했다. 전망대 왼쪽으로 산비탈을 따라 꼬리를 물고 길게 내려앉은 계단이 눈에 가득 들어온다. 108번뇌에 10을 곱한 1080개의 계단. 한발 한발 가파른 계단을 위태롭게 오르는 순례객들이 흘리는 굵은 땀방울이 눈에 보이는 듯 아련하게 다가온다. 리프트라는 현대 문명을 거부하고 오직 자신의 두발만을 의지한 채 성지를 찾는 이들의 넘칠 듯 아름다운 신심(信心). 2천여 년을 이어져 온 중국불교의 전통이 다시 살아나는 듯 가슴 한 구석이 뭉클하다.

 

 

4.

서둘러 다음 목적지인 탑원사와 현통사로 향했다. 대라정에서의 감동이 진득이도 발길을 붙들었지만 빠듯한 일정에 떨어지지 않는 발을 재촉해 길을 나섰다. 내려오며 바라보는 오대산의 절경은 짧은 일별(一瞥)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뒤흔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대라정에서 버스로 불과 5분 거리에 위치한 탑원사와 현통사는 오대산 불교의 얼굴 격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절의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지만 사격도 오대산에 점점이 박힌 사찰 가운데 가장 크고 유물 또한 풍부하기 때문이다. 또 지금은 두개의 사찰로 나눠져 탑원사와 현통사로 불리고 있지만 명나라 이전만 해도 대현통사로 불리며 대가람을 이뤘던 곳이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두 절을 모두 한꺼번에 현통사라 지칭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현통사가 오대산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호불 황제였던 북위 효 문제(471~499)때이다. 당시 역대 어느 왕조보다 신심이 깊었던 효 문제는 불교를 국가적으로 장려했고, 곳곳에 대가람을 세워 황실의 안녕과 국가의 무운(武運)을 기원했는데 현통사는 이런 황제의 깊은 신심이 오대산 중턱을 깎아 가람을 세우는 기적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그러나 현통사의 운명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아니 중국왕조의 흥망성쇠에 따라 기구하게 변천해 온 것이 마치 사람의 지난(至難)한 인생을 보는 듯 파란만장하기만 하다. 어쩌면 효 문제가 8만평이 넘는 산을 깎아 대가람을 세운 뒤 어떤 이름을 지을 것인가를 두고 고민했던 것도 이 절의 운명을 예견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오대산에 유래가 없는 대규모 가람을 들인 이후 황제는 절의 이름을 놓고 크게 고민을 했다고 민초들의 입과 입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황실의 원찰이니 절의 이름도 황제가 짓는 것이 마땅한 터. 따라서 황제는 사찰의 이름을 놓고 며칠 밤낮을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깜박 잠에 빠진 황제의 꿈에 수많은 야생화와 그 속에 한 송이 연꽃이 수줍은 듯 고개를 들고 있는 장면이 등장했다. 꿈에서 깨어난 효 문제는 손으로 무릎을 치며 신화들을 불러 절의 이름을 화원사(花園寺)라 지으라 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번 핀 꽃도 언젠가는 시들어 떨어진다는 말이 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꽃처럼 화려하게 오대산에 등장한 화원사는 북위의 멸망과 함께 전쟁 속에서 폐허로 변해 버렸고, 얼마 뒤 화려한 역사를 뒤로 한 채 짧은 삶을 마감해야만 했다.

그 후로 수백 년이 흘렀다. 중국은 5호 16국의 혼란에 거쳤고, 다시 무수한 전쟁의 아수라를 겪으며 결국 수나라와 당나라로 통합이 이뤄졌다. 새롭게 나라를 정비한 당 태종은 불교에 귀의하며 중국 전역에 산재한 사찰을 정비했는데 이때 폐허가 된 화원사도 대대적인 중수를 거쳐 대화엄사(大華嚴寺)라는 이름으로 다시 반짝 역사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절은 다시 전쟁으로 폐허가 됐고, 또 다시 버려지는 신산의 아픔을 겪게 된다.

현통사가 오늘날의 모습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600년 전인 명나라 태조 때이다. 폐허로 변했던 가람은 다시 대대적인 중수를 거쳐 대현통사(大顯通寺)로 개칭됐는데, 이름처럼 크게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현통사가 탑원사와 두개의 가람으로 갈리게 된 것도 이즈음이다. 당시 명나라에 불교가 융성하자 서역에서 부처님 진신사리를 보내 명나라의 안녕을 기원했는데 이에 크게 기뻐한 명나라 황제는 현통사에 높이 50m가 넘는 그야말로 대형 불사리 탑을 조성하게 된다. 그러나 불사를 마치고 나서 황제는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부처님 진신사리와 본존불을 함께 모실 수는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황제가 깊은 고민으로 번민의 날을 보내자 현통사의 한 스님이 보다 못해 한 가지 해법을 제시하게 되는데, 현통사를 둘로 나누는 것이었다. 결국 황제는 스님의 뜻을 받아들여 불사리 탑을 기준으로 아래쪽은 탑원사로, 위쪽은 현통사로 구분을 하게 됐는데 이렇게 해서 하나의 가람이 두개의 사찰로 변하게 된 것이다.

현통사에 얽힌 사연들을 들으며 걷고 있는 사이 일행은 어느새 탑원사 입구 대탑 앞에 서 있었다. 쪽빛 하늘 한 가운데를 찌르고 서 있는 백색의 대탑으로 인해, 하늘이 파란 눈물을 흘리고 있는 듯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오랜 세월 험난한 풍파와 싸워온 탓에 지금은 병원신세(?)를 져야할 만큼 훼손이 진행돼 안타깝지만 거대한 몸체와 아름다운 조각들은 오대산을 지키는 수호 신장인양 당당하기만 하다. 몇 해 전부터 중국은 정부 차원에서 탑원사의 보수 작업과 함께 백색의 탑에 황금을 입혀 개금하는 불사를 진행하고 있는데 종교적인 신심보다는 좋은 관광자원으로만 생각하는 중국 관리들의 수준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온전한 대탑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안고 휘적휘적 경내로 들어섰다. 이내 눈 안 가득 밀교 양식의 건축들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오대산에 남아 있는 10여개의 밀교사찰 중 하나라더니, 그 명성 그대로 대형 윤장대, 120여개의 만리차, 라마교 양식의 불상들이 고풍스런 모습으로 일행을 맞이하고 있다. 특히 이 곳은 티베트 불교 형성에 막대한 영향력을 줬던 쫑카파 스님이 1410년경 설법을 했던 것을 인연으로 지금도 수많은 티베트 수행자들이 찾는 밀교의 성지라고 한다.

대탑 내부를 돌고 나오자 경내는 많은 순례객들로 붐비고 있다. 물론 관람을 목적으로 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지만 깊은 신심으로 절을 맑히는 이들도 적지 않게 눈에 띤다. 전각 한 구석에서 온몸을 던지는 오체투지로 업장을 소멸하는 이들이 얼핏 보인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쉼 없는 고행으로 굵은 땀방울은 얼굴과 목을 타고 바닥을 흥건히 적시고 있다. 순간 관광의 기분으로 들떠 있던 마음이 고요히 내려앉으며, 가람이 온통 성스러운 공간으로 되살아난다. 경건한 마음으로 대탑 옆 작은 문을 넘어서자 미로처럼 구불거리는 길을 따라 현통사 입구로 이어진다. 현통사는 대웅전, 무량전, 관음전, 문수전, 천불전, 동전, 장경각 등이 일직선상에 배치돼 정갈한 맛이 일품이었다. 특히 전각 하나 하나가 마치 각기 다른 시대 작품인양 느낌이 달랐다. 경내를 유유자적 걷던 일행이 유독 한 건축물 앞에서 일제히 걸음을 멈췄다. 마치 우리의 미륵사지 석탑과 닮은꼴의 대형 건물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명나라 때에 건축된 무량전이다. 무량전은 명나라 때 벽돌을 쌓아 만든 전탑양식의 보기 드문 건축물이라 한다. 순간 마음은 익산을 향하고 있다. 화원사가 폐허를 딛고 탑원사와 현통사로 거듭나듯, 폐허로 변해 황량하기 그지없는 미륵사 또한 어느 날 불현듯 옛 영화를 재현할 수 있으리라.

 

 

5.

 

8만평이 넘는 대가람인 탑원사와 현통사의 경내 참배를 마치자, 시나브로 시간은 흘러 기세를 잃은 태양이 서대(西臺) 끝에서 마지막 숨을 고르고 있다. 반나절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그러나 숨 고를 틈도 없이 대라정, 현통사, 탑원사 등 3곳의 대가람을 잇따라 참배한 일행의 몸은 천근만근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더위와 강행군에 지친 일행들 속에서 숙소로 돌아가 땀이라도 씻어내자는 웅성거림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허나 오대산 길잡이 허홍발 씨는 야속하게도 이런 분위기를 애써 무시하며 다음 목적지인 수상사로 묵묵히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잠시 후 심상치 않은 일행의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그는 일행을 향해 회심을 일격을 날린다.

“여러분 부처님은 성도(成道)후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해 250km가 넘는 거리를 걸어 가셨다고 합니다. 부처님을 닮고자하는 원력을 품고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이 이 정도 가지고 힘들어해서야 어찌 부처님의 제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웅성거림이 점차 세력을 더해 볼멘 소리로 전이되려는 순간 그의 말 한마디에 모두가 동시에 입을 닫았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서 불만이 있다한들 어찌 입을 열 수 있겠는가. 더구나 길에서 길로 포교에 나셨던 석가모니 부처님의 위대한 삶을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오대산을 향해 몸을 내 던졌을 이름 없는 구법승들의 삶을 생각한다면 일행의 여정은 사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잠시 나태해진 마음을 가다듬은 일행은 초심(初心)의 마음으로 오대산에서 가장 큰 문수보살이 봉안돼 있다는 수상사로 힘차게 발길을 옮겼다.

사실 수상사는 오대산에 있는 여느 사찰과 달리 천왕전, 문수전, 종루 등 5∼6개의 작은 전각들로 구성된 비교적 조촐한 가람이다. 우리로 치자면 산 속의 조그만 암자에 해당된다고나 할까. 그러나 수상사는 오대산 순례 여정에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이는 바로 9m가 넘는 거대한 규모의 문수보살이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중국인들은 수상사를 중국을 대표하는 문수 성지로 추앙하고 있다. 절 이름인 수상사도 문수보살상(文殊菩薩像)의 ‘수’와 ‘상’을 따 수상사로 불리게 됐다고 하니, 문수보살과의 뗄 수 없는 인연이 조금은 짐작이 간다.

내려오는 문헌에 따르면 수상사에 문수보살상이 조성된 것은 지금으로 1200여 년 전인 당나라 때라고 한다. 불교를 적극적으로 장려했던 당 황실은 당시 중국 대륙 곳곳에 거대한 사찰을 건립했고 오대산에도 황실 주도로 수많은 절들을 세웠다고 한다. 특히 당 황실은 오대산에 세상에서 가장 큰 문수보살상을 조성하려고 시도했는데, 이는 백성들의 신심을 돈독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황실의 뜻에 따라 진행된 불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고, 탑원사 바로 밑에 대형 문수보살상을 조성한 수상사가 건립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하던 불사는 보살의 상호 조성을 앞두고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청사자(靑獅子)를 타고 있는 문수보살상을 조성하기까지는 순조로웠지만, 그 누구도 보살의 상호를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얼굴이 문수보살의 상호일까?’ 불사의 총 책임을 맡았던 수상사 주지 스님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상사에 신이한 일이 일어난다. 공양주 보살이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 메밀가루를 반죽하던 중 하늘에서 난데없이 문수보살이 나타나 미소를 짓는 것이 아닌가. 한번도 문수보살을 본 적이 없던 공양주 보살은 다급한 마음에 허겁지겁 메밀반죽으로 보살상을 빚었고 이를 주지 스님께 올렸다. 스님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풀리지 않던 숙제를 일시에 해결한 주지 스님은 공양주가 빚은 메밀가루 반죽을 기초로 흙과 나무를 이용해 보살의 상호를 만들었다. 그러나 어찌된 연유인지 흙과 나무로 만든 문수보살 상호는 몸체 위에 올리면 얼마 되지 않아 땅으로 떨어져 파손돼 버렸다. 몇 번을 거듭했지만 역시 보살의 상호는 온전히 몸 위에 올려지지 않았다. 급기야 황제와 약속한 날은 시나브로 다가왔다. 깊은 번민에 쌓인 스님은 할 수 없이 처음 공양주 보살이 메밀 반죽으로 빚은 보살 상호를 그대로 몸체 위에 올리게 했다. 그러자 문수보살의 상호가 떨어지지 않고 온전하게 붙어 있는 것이 아닌가. 결국 수상사 문수보살은 메밀 반죽으로 빚은 상호를 그대로 간직한 채 완성이 될 수밖에 없었다. 1200여 년이 지난 오늘에도 문수보살상의 두상에 메밀가루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순례객들이 피워놓은 매캐한 향 연기 뚫고 문수전으로 향했다. 거대한 문수보살이 가로막 듯 시야에 들어왔다. 9m가 넘는 거대한 몸체로 인해 문수보살을 바로 쳐다보기란 쉽지 않았다. 고개를 한껏 젖히자 메밀반죽으로 빚었다는 문수보살이 자비로운 눈길로 순례객을 맞이했다. 손끝 하나 발끝 하나에도 마치 생명의 온기가 들어있는 듯한 모습이 조각품이 아니라 중생들과 함께 살아 숨쉬는 문수보살의 진신인 양 사실적이다. 일행은 짐을 부리고 그 자리에서 지극한 마음으로 삼배를 올렸다. 가슴속에서 밀려오는 싸한 느낌. 순간 문수보살 회상에서만 느낄 수 있는 안온하고, 편안한, 그러면서 감동적인 기운이 온 몸을 감싸 안는다.

수상사를 끝으로 하루의 일정을 마무리한 일행은 숙소에서 달콤한 휴식을 취한 후 이튿날 아침 서둘러 중대로 향했다. 중대는 오대산에서 북대 다음으로 높은 곳(해발 2936m)인데다 산새가 험해 서둘러 길을 나서지 않으면 하루 안에 일정을 소화하기 힘든 곳이기 때문이다. 특히 길이 좁고 험한 탓에 봉고를 개조한 미니 버스를 이용, 길을 올라야 하기 때문에 대형 사고의 위험이 지뢰처럼 도사리고 있다. 따라서 여유는 이번 여정에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곱게 포장된 도로에서의 안락함도 잠시, 숙소에서 출발하지 10여분만에 비포장 도로가 일행을 맞이한다. 본격적인 중대로의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손잡이를 꽉 붙들어야 사고를 막을 수 있다는 조언에도 불구하고, 몸은 이미 널뛰듯이 날뛰기 시작한다. 서로 어깨에 부딪치는 수준을 넘어 머리가 버스 천장까지 뛰어올라 기어코 커다란 혹을 만들고 만다. 그러나 하루에도 수 차례 이 길을 오르내렸을 중국인 운전수는 일행들의 고통에 찬 호소에도 불구하고 즐기듯 더욱 속도를 높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고통에 익숙해질 무렵, 이제는 뱃속에서 적색신호를 보낸다. 본격적인 멀미가 시작된 것이다. 이를 앙 다물고 참고 있자니,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지옥이 따로 없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지경에 내 몰릴 즈음, 버스는 드디어 중대 정상에 도착했고, 요동을 치던 버스도 잠잠해졌다. 메스꺼움에 답답한 속을 부여잡고 버스에서 내리자 넓게 트윈 초록의 평원이 파란 하늘과 함께 넓게 펼쳐져 있다.

시원스런 바람을 맞으며, 고요히 대 자연의 신비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잔뜩 꼬였던 뱃속도 화를 풀고 조금씩 잠잠해져 간다.

중대는 풀과 나무와 바람이 만들어 내는 안온한 기운으로 편안했다. 마치 부처님의 품안과 같다고나 할까. 정상에서 느긋하게 망중한을 즐기며 걷노라니, 부처님 사리를 봉안한 거대한 탑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고 이윽고 탑이 완전히 노출되자 헤아릴 수 없는 돌탑들이 따라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조약돌에서 대규모 돌탑까지 탑의 크기와 모양은 가지각색이었다. 이들 돌탑은 이곳을 다녀간 수많은 수행자들이 남긴 구법의 열정과 피와 땀의 흔적들이다. 순간 1400여 년 전 불법을 구하자고 목숨을 건 구법 여행 끝에 오대산에 도착했을 자장 스님의 모습이 불현듯 떠오른다. 스님도 깨달음과 중생 구제를 염원하며 이곳에 돌탑 하나를 쌓았을 터. 돌탑을 만지는 손끝에 스님의 원력이 묻어나는 듯 정겹기만 하다.

 

 

6.

중대의 기운이 서늘하게 변해 몸을 휘감는다. 7월의 한 낮이건만 열기는 오간 데 없고 겨울의 문턱에 다가선 듯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이 온몸을 오싹거리게 한다. 해발 3000m. “중대 정상을 오를 때는 체온을 보호할 옷을 준비하라”는 가이드의 조언을 무시한 결과로 몸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그러나 잠시 뒤 초록의 융단이 드리워진 구릉과 파란하늘. 초록과 파랑만의 원색으로 연출하는 장대한 중대 정상의 풍경에 몸을 움츠리게 했던 한기(寒氣)는 멀찌감치 밀려난다. 중대에 오르지 않고 오대산을 얘기할 수 없다는 옛말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 사실 오대산 다섯 봉우리 모두 저마다의 특색과 자연 풍경을 자랑하고 있지만 중대는 연꽃 모양의 다섯 봉우리 중심에 자리하고 있어 예사롭지 않은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이를테면 중대가 오대산의 주빈이라고나 할까.

풍경에 취해 한참을 서성거리는 동안 벌써 해가 중턱을 넘어섰다. 떨어지지 않는 발길이었지만 우리는 서둘러 다음 목적지인 태화지(太和池)로 향했다. 태화지는 이번 순례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코스. 통도사, 월정사 등 이른바 한국불교 5대 적멸보궁의 창건 배경이 될 뿐 아니라 한국불교 사리신앙의 뿌리가 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태화지가 한국불교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1400여 년 전. 신라의 구법승 자장 스님이 깨달음과 중생 구제의 서원을 세우고 오대산을 찾게 된 이후부터라고 한다. 문수보살이 화현했다는 오대산에서 지혜를 얻어 돌아가겠다는 발원을 세운 자장 스님은 중대 태화지에서 기도를 시작했다. 간절한 기도가 삼칠일에 이를 무렵, 꿈에 갑자기 한 도인이 나타나 네 구절의 게송을 일러주는 것이 아니가. 꿈에서 깨어난 자장 스님은 전날 도인에게 들은 게송이 생생했지만 범어(梵語)라 도무지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고민에 빠져 태화지 주변을 서성거리자 언제 나타났는지 가사와 발우, 부처님 사리를 가진 한 노승이 태화지에서 발을 씻으며 자장 스님에게 물었다. “그대가 고민하는 것이 무엇이요?” 그러자 자장 스님은 지난 밤 자신의 꿈 이야기를 노승에게 전해주며 그 의미를 몰라 그런다고 답했다. 그러자 노승은 자신이 갖고 있던 발우와 가사, 부처님 사리를 건네고는 그 의미를 하나하나 설명했다. 풀리지 않던 고민을 해결한 자장 스님은 뛸 듯이 기뻤다. 이에 스님은 감사의 인사를 전하려 다시 노승에게 시선을 돌리려 하자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순간 자장 스님은 이 노승이 바로 문수보살이었음을 직감했다. 그리고는 노승이 앉아 있던 태화지를 향해 삼배를 올리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통도사와 강원도 오대산 등지에 5대 적멸보궁을 세웠다고 한다.

자장 스님의 살가운 체취가 남아있는 유적지 태화지. 한국 불자들에겐 이곳이 오대산에서 가장 의미 있는 참배지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나 중대에서 태화지까지의 여정은 만만치 않다. 비록 5km 내외에 불과하지만 급경사를 깎아 만든 임시도로인지라, 미니버스를 이용할 수 없어 결국 걸어서 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행은 자장 스님의 따스한 숨결을 느끼고자 구불구불 험난한 길을 달팽이가 절벽을 오르듯 한발 한발 올라야만 했다. 대략 1시간가량 지났을까. 다리가 퍽퍽해지며 풀려갈 즈음 드디어 태화지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나 태화지에 다가갈수록 일행은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과 중국의 불교를 이어주는 특별한 성지라는 말이 무색하게 너무나도 초라한 형색이었기 때문이다. 쓰레기 더미가 곳곳에 널려 마치 쓰레기 처리장을 방불케 하는 곳에 내버려지듯 놓여있는 작은 연못. 문수보살이 발을 씻었다던 맑은 물은 간데없고 더러운 물에 수많은 벌레와 개구리들의 전용 놀이터인양 가득 들어 있었다. 참으로 실망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일행들 사이에서 불평과 비탄의 목소리가 새어나온 것은 동시의 일이었다. 실망감이 앞섰지만 일행은 문수보살을 모셨다는 법당에 들러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순간 머릿속에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떠올랐다. 깨끗했던 태화지가 이렇게 변한 것은 무상의 원리에 따른 것이다. 결국 다시 맑은 물로 되돌리는 것도 무상의 원리에 따른 우리의 몫 일터. 삼배를 올린 뒤 우리는 서둘러 태화지를 벗어났다.

오대산에서 일정을 마무리한 일행은 운강석굴을 향해 길을 나섰다. 운강석굴은 오대산에서 버스로 달려 4시간이나 떨어진 대동이라는 지역에 있다. 본래 오대산 순례를 목적으로 여정을 떠났던 우리에게는 보너스 코스라고나 할까. 산서성 중심부에서 서북부 지역에 있는 운강석굴은 용문석굴, 둔황의 막고굴과 함께 중국 3대 석굴 중 하나로 동서로 약 1km에 걸쳐 총 53개의 석굴로 구성된 세계 문화유산이다. 규모가 말해주듯 운강 석굴은 총 100여 년에 걸쳐 완성된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규모의 역사를 가진 문화재이다.

운강 석굴은 북위(386∼535) 시절 담요(曇曜) 스님에 의해 건립됐다. 불교를 배척했던 태무제(太武帝)의 뒤를 이어 북위의 4대 황제에 등극한 문성제(文成帝)는 나라가 급격히 위기에 빠지고 각종 전란으로 몸살을 앓게 되자 지금의 종교장관에 해당하는 사문통(沙門統) 담요 스님에게 위기를 극복할 방안을 물었다. 이에 담요 스님은 산천에 대규모의 석불을 조성해 부처님의 가피를 구해야 한다고 제안했고, 이후 문성제는 5년(460∼465)에 걸쳐 대규모의 석굴이 조성했는데 이른바 ‘담요 5굴’이라 불리는 제16동에서 제20동까지의 동굴이 이 때 만들어졌다. 문성제의 뒤를 이은 북위의 황제들은 선(先) 황제의 뜻을 이어 계속해서 석불 불사를 이었고 마침내 524년 총 53개의 석굴이 완성됐다.

어눌한 말투지만 역사소설을 이야기해 주듯 정감 있는 허홍발 씨의 설명이 끝날 무렵 우리는 이미 운강 석굴 입구에 도착했다. 때마침 내린 소나기에 하늘은 물론 대기 또한 각질하나 없이 맑기만 해 멀리 거대한 민둥산이 속살을 드러낸다. 폭탄 세례를 맞은 듯 곳곳에 구멍이 숭숭 뚫린 모습이 한눈에도 석굴임을 짐작케 한다. 조용히 발길을 옮겨 운강 석굴 내부로 들어섰다. 먼저 일행을 맞은 것은 눈을 의심하리 만큼 거대한 불상. 우리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폼이 너무나 위압적이다. 어두컴컴한 석굴 내부에서 장엄하게 아래를 굽어보는 불상은 거대한 몸체임에도 살아 숨쉬듯 역동적이다. 특히 거대한 몸체에도 불구하고 그 온화한 미소는 참배자들의 시름마저 덜어내는 듯 자비롭다.

벅찬 감동에 간간히 탄성을 쏟아냈지만, 외교관 석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감탄이 너무 빨랐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외교관 석불은 운강 석굴을 대표하는 불상으로 높이 17m, 가로 20m가 넘는 대형 좌불이다. 산에 굴을 파고 그 안에 어떻게 이렇게 거대한 불상을 조성할 수 있었는지 옛 사람들의 지극한 신심에 절로 가슴이 절절했다. 일행들 사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탄성이 저절로 터져 나온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대동 운강석굴을 마지막으로 오대산을 중심으로 한 중국 성지 순례는 끝을 맺었다. 지혜의 상징 문수보살의 자비로운 미소가 잡힐 듯이 묻어나는 옛 모습 그대로의 오대산. 그리고 웅장한 석불을 고스란히 간직한 운강 석굴. 세계 변방으로 밀려 있는 중국 불교를 다시 일깨울 풍경소리이자 죽비가 아닐까. 5박 6일의 짧은 순례 일정에도 불구하고 점차 긴 잠에서 깨어나고 있는 중국불교의 저력을 보는 것 같아 기쁘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