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자야. 법정스님, 길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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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수집자료

/// 백석, 자야. 법정스님, 길상사 ///


 


백석·설정식·이호우..탄생 100주년 문학제


통영 사람이 아니면서도 가장 통영 사람을 닮은 사람이 바로 백석이다.
백석의 통영 사랑은 각별하다.
그의 시에는 <창원도>, <고성가도>, <삼천포> 마지막으로 <통영>까지 남쪽지방의 지역명이 많이 나온다.



옛날에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의 처녀들에겐

아직 옛날이 가지 않은 천희라는 이름이 많다

미역오리 같이 말라서 굴껍질처럼 말없이 죽는다는

이 천희의 하나를 나는 어느 오랜 객주집의

생선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저문 유월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등이 불그레한 마당에 김냄새 나는 비가 나렸다

(백석, <통영1> 전문)


유월의 바다에 내리는 비는 쓸쓸하다.
특히 옛날에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의 천희라는 이름을 지닌 처녀들에겐 더욱 그렇다.
쓸쓸함은 ‘미역오리 같이 말라서 굴껍질처럼 말없이 죽는다’는 표현에서 더욱 배가된다.
백석은 아직도 만나지 못한 통영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아직 백석에게 있어 통영은 마른 굴껍질이었고 ‘생선가시가 있는 마루방’이었고 ‘김냄새 가는 비가 내리는’ 곳이었고 ‘낡은 항구’였던 셈이다.

백석은 1935년 6월 통영을 직접 방문한다.
그 당시 같은 직장(조선일보)에 다니던 친구 신중현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그 자리에서 백석은 영원한 연인이 된 통영처녀를 만나 첫눈에 반해 버린다.
그녀가 바로 ‘난’이다.

당연히 통영을 그리는 백석의 언어도 달라진다.
이제 통영은 백석에게 비가 내리는 쓸쓸한 풍경이 아니라 북소리가 들리고 뱃고동이 우는, 살아있는 풍경으로 다가온다.
당연히 그것은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그리움의 다른 표현이리라.
백석은 그 해 겨울 두 번째로 통영을 방문한다.
시 내용을 볼 때 구마산 선창에서 배를 타고 통영항으로 가는 여정이었으리라.
사랑하는 사람이 살고 있는 통영은 이미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 되어 있었다.
차가운 겨울바다의 바람도 백석의 마음을 가로막지 못했다.




산 너머로 가는 길 돌각담에 갸웃하는 처녀는 금(錦)이라든 이 같고

내가 들은 마산(馬山) 객주집의 어린 딸은 난(蘭)이라는 이 같고


난이라는 이는 명정(明井)골에 산다는데

명정골은 산을 넘어 동백나무 푸르른 감로 같은 물이 솟는 명정 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긴 토시 끼고 큰머리 얹고 오불고불 넘엣거리로 가는 여인은 평안도서 오신 듯한데 동백꽃이 피는 철이 그 언제요


옛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어서 나는 이 저녁 울듯 울듯 한산도 바다에 뱃사공이 되어가며

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

(백석, <통영2> 부분)




하지만 이 방문에서 백석은 사랑하는 여인 ‘난’을 만나지 못한다.
명정골에 살았던 ‘난’이는 개학 준비를 하느라 서울로 떠나버리고 없었다.
그래도 백석은 그녀가 사는 명정골을 찾아간다.
명정골은 지금의 통영시 명정동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러하듯이 백석도 그녀가 사는 곳이 어디인지 궁금했을 것이며 그녀가 사는 마을이 보고 싶어 찾았을 게다.

결국 백석은 ‘옛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어서’
‘울듯 한산도 바다에 뱃사공이 되어’ 어긋나 버린 길 끝자락에서
그저 ‘손방아만 찧다’ 돌아서야 했다.

어쩌면 백석은 이미 ‘난’이와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예상한 것인지도 모른다.
시에서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다고 표현했다.

결국 백석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조선일보에서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직장을 옮긴 백석은 1936년 12월 자신의 사랑하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난’의 부모를 찾아가 ‘난’과의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말하지만 끝내 거절당하고 만다. 뒤이어 ‘난’은 파혼상태였던 친구 신중현과 결혼을 해 버린다.


통영장 낫대들었다


갓 한닢 쓰고 건시 한 접 사고 홍공단 댕기 함감 끊고 술 한 병 받어들고

화륜선 만저보려 선창 갔다


오다 가수내 들어가는 주막 앞에

문둥이 품바타령 듣다가


열이레 달이 올라서

나루배 타고 판데목 지나간다 간다

(백석, <통영(統營)-남행시초2> 전문)




청혼을 했으나 거절당하고,
자신의 절친한 친구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백석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런 마음을 통영에서 서울로 가는 길에 남긴 백석의 시 <통영(統營)-남행시초2>에서 짐작하는 것은 무리일까?

큰 장이었던 통영장을 구경하면서도, 품바타령을 들으면서도 그는 열이레 달을 보면서 ‘판데목’을 조용히 지나간다.
통영장의 흥청거림도 품바타령의 흥겨움 앞에서도 백석은 그냥 관찰자일 뿐이다.
같은 남행시초에서 보여주었던 찬사
‘승냥이 줄레줄레 달고가며 / 덕신덕신 이야기하고 싶은 길이다’(창원도),
‘어쩐지 당홍치마 노란저고리 입은 새악시들이 /
웃고 살을 것만 같은 마을이다’(고성가도),
‘아 모도들 따사로히 가난하니’(삼천포)
와는 달리 전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안으로 삭이는 엄청난 절제.
어쩌면 그 절제 속에서 백석의 울음은 더욱 절절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명정골의 우물은 맑디맑음을 자랑하지만 명정동 산복도로가 나는 바람에 충렬사와 명정 우물 사이가 떨어져 버렸다. 하지만 새로 난 도로를 사이에 두고 그 세월만큼이나 오래도록 백석은 충렬사 그 돌계단 위에 앉아서 사랑하는 여인 ‘난’이가 명정골 우물에서 빨래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물터로 향했다.
일정(日井)과 월정(月井)이라는 이름을 지닌 두 개의 우물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사용하지 않아 몇 개의 쓰레기가 보이긴 했으나 우물물은 여전히 맑았다.
그 옆에는 빨래터였을 법한 공터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통영 사람들은 절대로 이 길로 상여를 보내지 않는다고 했다.
상여가 지나가면 우물물이 흐려지고 그 해 흉년이 든다는 것이다.

충렬사 앞으로는 네거리가 위태롭게 만들어져 있다.
아마도 충렬사로 인해 네거리를 반듯하게 정리하지 못한 듯하다.
충렬사 계단에 앉아 잠시 상상에 빠졌다.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아파했던 백석의 마음이 가슴 한켠으로 밀려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아픔이 담긴 시를 다시 읽었다.




그렇건만 나는 하이얀 자리 우에서 마른 팔뚝의

새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내가 오래 그려오든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내가 살튼하든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백석, <내가 생각하는 것은> 부분)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지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아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 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부분)

자야의 연인 백석, 한국 서정시의 학교





1938년 백석은 다시 서울로 돌아오지만 1940년 만주로 떠난다.  그 사이에 ‘자야’라는 기생과 뜨거운 사랑에 빠진다.  통영 처녀 난이와의 사랑에 실패한 백석은 함흥 영생여고 교사들 회식 장소에서 기생이었던 진향(자야)을 만났다. 진향의 미모와 총명함에 반한 그는 바로 옆자리에 앉히고 손을 꼭 잡고 속삭였다.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에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

함흥에서의 운명적 만남, 그리고 사랑, 이별과 해후의 반복, 사랑을 위한 현실 외적인 도피. 그때 그의 나이 스물여섯이었다. 그는 퇴근하면 으레 진향의 하숙집으로 가 밤을 지새곤 했다.

그는 진향이 사들고 온 《당시선집》을 뒤적이다가 이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를 발견하고는 그녀에게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지어주었다.  그는 자야를 따라 함흥에서 서울로 올라와 청진동에서 살림을 차렸다. 혼례만 치르지 않았을 뿐 부부와 똑같았다. 두 사람의 사랑은 뜨거웠지만 시대 환경은 어렵고 차가웠다. 고향의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그를 자야에게서 떼어놓을 심사로 결혼을 시키기로 했다.

그는 부모의 강요에 의해 고향으로 내려가 부모가 정한 여자와 혼인을 하지만 손목 한번 잡아보지 않고 도망쳐 나와 자야 품으로 돌아왔다. 이런 식으로 강제 결혼을 하고 다시 도망치기를 세 차례. 자식으로서 부모에 대한 효와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고 싶은 열망 사이에서 그는 괴로워하고 갈등했다.

그는 봉건적 관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야에게 만주로 같이 도피 하자고 설득하지만 자야는 이를 거절했다. 그는 만주로 떠나는데 그것이 그녀와의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그는 완전히 잊혀져 1988년 해금되기 전까지 우리 문학사에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은 인사가 되고 만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전문)





38. 김영한(길상화) 보살

여기서는 실명이 좋겠다

그녀가 사랑한 남자는 백석白石이고

백석이 사랑했던 여자는 김영한金英韓이라고
  

한데 백석은 그녀를 자야子夜라고 불렀지

이들이 만난 것은 20대 초

백석은 시 쓰는 영어 선생이었고

자야는 춤추고 노래하는 기생이었다
  

그들은 죽자사자 사랑한 후

백석은 만주땅을 헤매다 북한에서 죽었고

자야는 남한에서 무진 돈을 벌어

길상사에 시주했다
  

자야가 죽기 열흘 전

기운 없이 누워 있는 노령의 여사에게

젊은 기자가 이렇게 물었다
  

천억을 내놓고 후회되지 않으세요?

무슨 후회?
  

그 사람 생각 언제 많이 하셨나요?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때가 있나?
  

기자는 어리둥절했다

천금을 내놨으니 이제 만복을 받으셔야죠 ‘그게 무슨 소용있어’

기자는 또 한번 어리둥절했다

다시 태어나신다면?

‘어디서? 한국에서?

에 한국?

나 한국에서 태어나기 싫어

영국쯤에서 태어나서 문학 할 거야’
  

그 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요?

‘1000억이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 쓸 거야’

이번엔 내가 어리둥절했다
  

사랑을 간직하는데 시밖에 없다는 말에

시 쓰는 내가 어리둥절했다


(이생진, <그 사람을 사랑한 이유(백석의 여인1-자야의 사랑)> 전문)


대원각 소유주였던 자야(본명 김영한)는 16살 때 조선권번에서 궁중아악과 가무를 가르친 금하 하규일의 문하에 들어가 진향이라는 이름의 기생이 됐다.

백석이 떠나고 한국전쟁 이후인 1953년 중앙대 영문과를 졸업해
‘백석, 내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내 사랑 백석’ 등의 책을 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가 지금의 길상사 자리를 사들여 운영하던 청암장이라는 한식당은 제3공화국 시절 대형 요정 대원각이 됐다. 자야와 법정스님의 인연은 19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큰 감명을 받은 김씨는 1987년 미국에 체류할 당시 설법 차 로스앤젤레스에 들른 법정스님을 만나 대원각 7천여평(당시 시가 1천억원)을 시주하겠으니 절로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법정스님은 줄곧 시주를 받을 수 없다고 사양하다가 1995년 마침내 청을 받아들여 법정스님의 출가본사인 송광사 말사로 조계종에 ‘대법사’를 등록한다.
이후 1997년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이름을 바꿔 12월14일 창건법회를 갖는다.

길상사 창건법회 날 김영한씨는 법정스님으로부터 염주 하나와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받았다.
당시 그는 수천 대중 앞에서
“저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그 사람 생각 언제 많이 하셨나요?”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때가 있나?”

“그 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요?”

“1000억이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 쓸 거야.”

마음이 마음으로 달려온다.
욕망이 지배하는 2010년 현재, 우리가 깊이 새겨들어야할 대화이다.
김씨는 1999년 11월14일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날 목욕재계 후 절에 와서 참배하고 길상헌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고, 유골은 49재 후 유언대로 길상헌 뒤쪽 언덕에 뿌려졌다. 길상사는 유골이 뿌려진 자리에 조그만 돌로 소박한 공덕비를 세우고 매년 음력 10월7일 기재를 지낸다.

길상사의 시민모임 ‘맑고 향기롭게’는 ‘맑고 향기롭게 길상화 장학금’을 만들어 매년 고교생들에게 학비를 지원하고 있다. 법정스님은 오랜 시간 길상사에서 법문을 했고 2010년 3월 11일, 법정스님이 길상사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입적하셨다.


 


법정스님 입적--설법하는 법정스님

(서울신문 변형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