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강 나는 누구인가 ― 초기불교의 인간관, 오온2: 수온
[개요]
느낌은 정서적인 측면 이다. 인식은 이지적인 번뇌[見惑=어리석음]와 느낌은 정서적인 번뇌[修惑=탐욕과 성냄]와 관계있다. 느낌은 단박에 정리되지 않는다.
느낌이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그러면 왜 느낌이라고 부르는가? 느낀다고 해서 느낌이라 한다. 그러면 무엇을 느끼는가? 즐거움도 느끼고 괴로움도 느끼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도 느낀다. 비구들이여, 이처럼 느낀다고 해서 느낌이라 한다.”(상윳따 니까야 삼켜버림 경(S22:79) §5)
“‘느낀다(vedayati)’는 것은 여기서 오직 느낌(vedanā va)이 느끼는 것이지 다른 중생(satta)이나 개아(puggala)가 느끼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느낌은 느끼는 특징을 가졌기(vedayita-lakkhaṇā) 때문에 토대와 대상을 반연하여(vatth-ārammaṇaṁ paṭicca) 느낌이 오직 느끼는 것이다. 이처럼 세존께서는 여기서도 [느낀다는] 느낌의 개별적 특징(paccatta-lakkhaṇa)을 분석하신 뒤에(bhājetvā) 설하셨다.”(SA.ī.292)
“비구들이여, [232] 그러면 어떤 것이 세 가지 느낌인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는 느낌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세 가지 느낌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다섯 가지 느낌인가? 육체적 즐거움의 기능[樂根], 육체적 괴로움의 기능[苦根], 정신적 즐거움의 기능[喜根], 정신적 괴로움의 기능[憂根], 평온의 기능[捨根]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다섯 가지 느낌이라 한다.”(상윳따 니까야 백팔 방편 경(S36:22) §§5~6)
느낌에 대한 관찰
“비구들이여, 즐거움을 느낄 때 탐욕의 잠재성향을 버려야 한다. 괴로움을 느낄 때 적의의 잠재성향을 버려야 한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의 경우 무명의 잠재성향을 버려야 한다.”(상윳따 니까야 버림 경(S36:3) §4)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화살에 꿰찔리고 연이어 두 번째 화살에 또다시 꿰찔리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 사람은 두 화살 때문에 오는 괴로움을 모두 다 겪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배우지 못한 범부는 육체적으로 괴로운 느낌을 겪을 때, 근심하고 상심하고 슬퍼하고 가슴을 치고 울부짖고 광란한다. 그래서 이중으로 느낌을 겪는다. 즉 육체적 느낌과 정신적 느낌이다.”(상윳따 니까야 화살 경(S36:6))
“비구들이여, 비구가 이처럼 마음챙겨, 분명히 알아차리며,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독려하며 머무는 중에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면 그는 이렇게 꿰뚫어 안다.
‘지금 나에게 괴로운 느낌이 일어났다. 이것은 조건 지워진 것이며, 조건 지워지지 않은 것이 아니다. 무엇에 의해 조건 지워졌는가? 바로 이 몸에 의해 조건 지워졌다. 그런데 이 몸은 참으로 무상하고 형성되었고[有爲] 조건에 의해서 생겨난 것[緣起, 緣已生]이다. 이렇듯 무상하고 형성되었고 조건발생인 몸에 조건 지워진 이 괴로운 느낌이 어찌 항상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몸에 대해 그리고 괴로운 느낌에 대해 무상을 관찰하며 머무르고, 사그라짐을 관찰하며 머무르고, 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하며 머무르고, 소멸을 관찰하며 머무르고, 놓아버림을 관찰하며 머무른다. 그가 몸에 대해 그리고 즐거운 느낌에 대해 무상을 관찰하며 머무르고, 사그라짐을 관찰하며 머무르고, 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하며 머무르고, 소멸을 관찰하며 머무르고, 놓아버림을 관찰하며 머물면 몸에 대한 그리고 괴로운 느낌에 대한 적의의 잠재성향이 사라진다.”(상윳따 니까야 간병실 경 1(S36:7) §7)
즐거운 느낌과 평온한 느낌에 대해서도 같은 방법으로 설하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