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불교사

중국불교사 개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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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불교사


 


 

1.  불교유입 이전 

 

불교사 속에서 중국불교가 갖는 의미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불교는  근본 가르침의 정신으로부터 점차 이탈되어져 가는 경향이 강했다.  철저한 대중성을 잃고 논리적 사변으로 빠져 들어가 관념적 지배 이데올로기로 전락하기도 한다.  특히 불교가  중국을 거치면서부터는 부처님의 근본 사상은 급격하게 그 성격을 전환시키게 된다.   불교  유입 당시의 중국은 고대국가가 통합되던 시기였으므로 지배자들에 의한 지배 이데올로기의 요구와 기층민중들에 의한 요구의 결과로 보다 체계적이고 고차원적인 사상체계를 요구하게 된다.  이것이 인도에서 중국으로 불교가  유입된 요인이 된다. 중국은 한반도에 불교를 전파하는 데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정치.  문화면에 미친 불교의 영향도 컸지만 불교 또한 중국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인도에서의 이슬람 군대의 침입으로 산스크리트어로  쓰여진 소중한 대승경전이 소실된 지금, 그나마 한문으로 번역된 중국경전이 있었기에 불타의 가르침이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중국의 전래사상과 불교가 융합하면서 새로 일어난 종파불교와 선불교의 양대 세력이 우리 나라 불교의 흐름을 전반적으로 지배하여 왔음을  볼 때도 중국불교가 불교사 전체 흐름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큼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불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도불교와 함께  중국의 불교, 즉 중국화되고 한문화된 불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매우 중요하다 하겠다.   이에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어떻게 중국으로 들어왔는지 개괄해보고 인도의 불교가 중국으로 넘어오면서 어떠한 변용을 거쳤는가, 그리고 우리 나라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를 알아보도록 한다.

 

 

중국으로의  불교전파와 특성

 

 불교는 그 사상의 보편성으로 인하여 국경의 장애를  허물고 세계각국으로 전파되었다.  불교의 전파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중국, 한국, 일본 등에서는 대승불교가, 동남아시아에서는 상좌불교가 뿌리를 내리게 된다.   남방불교 쪽에서 원시교단의 모습을 고수하는 것은 계율과 형식을 중시하는 상좌부의 불교가 전래된 까닭도 있지만, 당시의 동남아문화가 인도문화보다 열악한 것이었기에 인도의 문화적 특성까지도 수용, 전수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반면  당시의 중국은 인도와 문화적 수준이 거의 대등하였다.  제자백가의 사상을 통하여 나름대로 정립되어 사상체계와 문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는 중국의 문자와 문화에 의해 역경, 재해석되었고 유교, 도교 등과 대립,  투쟁, 상호침투를 하면서 많은 변용을 낳는 한편, 중국 특유의 불교체계로 전환케 하였다. 불교가 중국에 등장하기 전에는 유교와  도교가 민중들을 효과적으로 지배하는  사상적 기둥이었다.  유교는 봉건적 지배질서를 합리화시켜 주었으며, 도교는 지배체제에 장애가 되는 정적이나 반봉건적인 지식인들을 탈 현실화시키는데 일조하고 있었다.  봉건왕조는 자신들이 지배구조를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 도교를 활용하였으며 민중에게 유교적 지배질서를 강요하였다.그러므로 봉건왕조는 불교를 유교나 도교의 성격으로 변용 시켜야 했다.  봉건왕조는 탁월한 철학적 깊이를 지닌 불교를  수용하는 한편, 봉건질서에 위배되는 불교의 핵심사상을 유교와 도교를 통하여 파괴, 희석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불교가 이를 극복하고 민중적 기반을 확보해 나갈 때 봉건왕조는 가차없는 탄압으로 민중적 기반을 파괴하게 된다. 이로부터 중국에서의 새로운 불교운동은 봉건세력과 그에 유착하여 지배 이데올로기화하는 종단에 대하여, 불교사상을 올바로 계승하고 민중의 고통에 동참하여 봉건체제에 대항하는 역사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불교 유입이전의 중국역사

 

 불교는 중국이라는 역사적 조건 속에서 발생된 종교가 아니기 때문에 먼저 중국의 전반적인 역사 흐름을 살펴보고 그 속에서 불교가  중국화 되어 가는 과정을 보기로 하자. 

 옛날부터 중국의 역사는 삼황, 오제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통례이다.  삼황은 복희씨, 수인씨, 신농씨로 기록되어있고,  오제란 다섯 명의 제왕-황제, 전욱, 제곡, 제요, 제순을 말한다.  오제의 시대가 끝나고 첫 세습왕조인 하왕조가 끝나고 우임금에 의해 성립하였다.  그러나 472년만에 은의 탕왕에게 멸망하였다.  근래 역사학자 가운데는 은나라를 가공의 역사로 알고 있었지만 19C 에 은나라  수도인 은허의 발굴로 인하여, 처음으로 역사적 유무에 의한 검증이 이루어졌다.  은의 뒤를 이어 무왕이 주나라를 세워 봉건제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정전제와 가부장제도 등의 체제가 확고히 잡히어 명실상부한 하나의 통일국가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주나라 왕실의 세력이 후대에 내려 가면서는 점점 약해지면서 주를 중심으로 한 3백여 개의 제후국들에  대한 주도권이 상실되어지고, 대신 강력한 제후들이 서로 패권을 다투기 시작했는데 이 시대를 춘추시대라고 한다.  이들 가운데 특히 유력한 강대국이 춘추5패로 압축되었고 그러다 B.C 400년경에 들어 서면서는 전국시대로 바뀐다. 춘추시대에는 독립국을 인정한  채 블록 형식으로 패권국가를  형성했지만 전국시대에는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집어삼키는 약육강식의 과정을 거치면서 300여개였던 나라가  7개의 나라가 된다. 전국 7웅 중 진이 가장 강한 정세  밑에서, 소진은 진을 제외한 6나라가 단결해서 진에 대항해야 한다는 합종설을 폈고, 이에 대항해서 장의는 진을 중심으로  해서 전부 통합해야 한다는 연형설을 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춘추전국시대는  철기문명이 급속하게 보급되는 시기였고 정치, 경제적으로는 굉장히 혼란기였다.   이 시대는 인도와 비교할 때 부처님이 탄생하시던 연대와 비슷하고 사회적 조건도 비슷하다.  따라서 이 시대에 중국에서도 수많은 성인이 출현하게 된다.  제자백가라 불리 우는 각양각색의 사상을 가진 학자들이 혼란된 사회를 안정시키고 부국강병하는 이론들을 연구하고 토론하게 된다.   이때의 유명한 인재로서는 공자, 맹자, 순자  중심의 유가와, 노자, 장자 중심의 도가와  묵자 중심의 묵가, 이사 중심의 법가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B.C 221년경에는 진의 시황제가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를 형성하게 된다.   진왕은 스스로  권위와 지배적 지위를 확립하기 위해서 '나는 삼황의 덕과 오제의 공덕을 다 갖추었다' 고 하여 황제란 칭호를 사용케 했다.  만리장성, 아방궁, 36년에 걸친 시황제 무덤-여산릉 대공사가 모두 이 때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통치에 편리한   법가사상을 중심으로  하여 통치하고, 자신의 정책을 비판하는 여타의 세력사상은  모두 탄압하여 책을  전부 불태우는 분서갱유를 단행한다.  그러나 치적 또한 많이 쌓았는데 중국이 진나라 이후 하나의 통일국가를  성립할  수 있는 모체를 마련했고 문자와 도량형을 통일시켰으며 운하개발과 소금, 철의 전매를 국가 재정수입으로 잡기도 했다.

그러나 노력동원과 무거운 세금부과로 쌓여있던 대중들의 불만이 시황제가 죽자마자 반란으로 표출되어 결국 진은 망하고 그후 항우와 유방이 천하를 다투다가 유방이 이겨서 한나라를 일으키게 된다.  이때부터 유가사상이 치세의 사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전한은 200년 지속되다가 외척 왕망에 의해서 망하고 신나라를 세웠으나 광무제 유수에 의해 후한이 건설된다.

 

 

 

 2.  불교의 전래

 

후한 명제 10년, 최초의 절  백마사

 

 중국에 최초로 불교가 전래된 시기에 대한 자료는 많으나 어느 것이 정설인가에 대해서는 불확실하다.  여러 가지 이설 중에는 목왕시대에  '문수, 목련이 서쪽에 와서 왕을 교화하니 왕이 이를 위해서 사원을 건립하고 불상을 조성하였다 ' 고 하는 기록이 있으나 인정하지 않고 있다. 또 진시황제 4년에 서역의 사문 18명이 불경을 가져와서 교화하니 황제가 이를 수상히 여겨 투옥시켰다는 설도 있고, 실크로드를 개척한 전한의 장건 때에 전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외에 불경이 처음 전래된  근거로 많이 인정하고 있는 설은 전한의 애제 원수 원년에  경노가 대월씨국의 사신인 이존으로부터  [부도경] 이라는  불교경전을 직접 이야기로써 전해 들었다는 기록이다. 그러나 불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기록은 이와는 다르다.    " 후한 명제 영평  10년 (A.D 67) 어느 날 밤에 금인이 서방으로부터 방광을 하면서 왕궁에    하강하는 꿈을 꾸고, 서방에 불교가 있음을 알고 채음, 진경 등 18명을 인도에 파견하여 불교를  알아보게 하였다.  그들은 중도에서  백마에 불상을 싣고 동행하는 섭마등과 축법란을 만나    함께 중국으로 갈 것을 권유했다.  마등은 불교를 알리려는 강한 염원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고생을 무릅쓰고 사막을 건너서 낙양에 도착했다.  명제는 기쁘게 환영하여 낙양문밖에 백마사를 짓고 그곳에 거주케  하였다.  이것이 중국에 사문이 들어온 시초이다."  이로써 중국에 최초로 지어진 절은 낙양 옹관 서쪽 백마사가 되고, 중국에서 최초로 불교경전을 번역한 것은  섭마등이라 하겠다.

 중국에 처음 불교가 전래된 시기인 A.  D 67년은 인도에서 불교가 발생하고 약 500년이 지난 후였다.  이때의 인도  상황은 아직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  유지되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대승불교라는 새로운 움직임  흥기 되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러나 중국에 전래된 불교는 소승경전일 수밖에 없었다.  중국에 유입되는 통로는 히말라야를 넘어서 인도 간다라 지방을 거쳐서 들어오는 길이었으므로 당시 소승불교가 성행했던 간다라지방의 영향을 그대로 받았으리라 추측된다.   인도를 시발로 한 불교가 중국인의 종교로 정착하는 과정에서  볼 때 초기 불교신앙의 모습은 다음의 영평 8년 기록을 보면 짐작해 볼 수 있다. 

  "범왕은 황노의 심오한 가르침을 외우고, 부도의 인사를 존경하고 있다.  3개월간 계를 지키고 신에게 맹세했다."

 곧, 당시의 불교는 황제, 노자 ,불도를 함께 모시고 기도한 것으로 보아, 황, 노의 학과 대치되거나 모순되지 않는 종교였으며 부처는 단지 복을 비는 신 이상으로 인식되지 않은 듯 싶다.   후한 당시만 해도 신선설이 주로 유행되었고, 이와 함께 참위설, 태평도, 오두미도 등의 사상과 종교가 유행하고 있었다.  이 연장선 상에서 즉, 현세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신선과 같은 차원으로 불교를 이해하기 쉬웠고, 특히 장각이 만든 태평도- 황건적이라는 신앙단체는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불교에 노장의  은둔성이 유입되다.

 

 후한의 멸망 (A.  D 220)으로부터 위, 촉, 오 삼국시대가 전개되고, 다시 위나라가 통일하면서 바로 서진시대로 연결된다.  이때부터 현실 도피적인 노장사상이 귀족 사이에  광범위하게 유포되었다.  당시의 중국인들은 노장사상을 매개로 불교를 이해하였으며, 오히려 이를 계기로 불교는 노장사상화되어 수월하게 한족사회에 침투할 수 있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불전의 역경에도 노장의 개념이 이용되었으며, 이로 인해 중국에서는 불교가 지닌 본래의 진취적이고 능동적인 역동성을 상실하고 은둔적으로 변화하는 단초를 낳았다. 그러나 불교를 따르는 사회적 세력이 확대되면서 중국의 불교는 도교와의 논쟁을 치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3.  불교연구 시대의 도래

 

중국불교사에서 후한으로부터  동진 초까지는 이른바 불교가 유입되고 번역되기 시작한 전역시대라 할 수 있다.  그러다 동진 초부터는 불교가 급격히 발전하기  시작하여 남북조시대에 이르기까지 불교연구시대를 맞는다.   전역시대에는 불교의 연구가 일반대중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지지 못하다, 연구시대에 접어들면서 많은 역경승들에 의해 교의연구가 이루어지고 불교가 널리 알려지게 된다.   이에, 동진에서 남북조시대까지의 중국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서 이와 함께,  불교가 이 시대에 전기를 이루게 된 원인과 남북조시대  불교의 특성, 지배이데올로기화 하는 불교의 변용들을 알아본다.

 

 

 남북조시대의  사회적 상황

 

 북방의 유목민족인 흉노족이 호북 지방을 차지하고(316) 서진은 양자강 이남으로 쫓겨 내려가 동진을  세우게 된다.   서진의 멸망으로 중국의  북쪽에는 흉노, 선비,  갈, 저, 강 등 다섯 이민족이 약 130여년 간에 걸쳐 16개의 왕조를 세우게 되는데 이를 5호 16국시대라  한다.  이중 선비족의 북위가 점차 강력해지면서 주위의 여러나라를 정복하고 439년 다시 중국 북부를 통일시키기에 이른다.   중국의 남쪽에는 송의 유유가 동진을 멸망시키고 통일함으로써, 북부에는 북위가, 남부에는  송이 각각 차지하여 남북조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이후 남조는 송에서 제로,  제에서 양으로, 양에서 진으로 이루어지고 북조는 북위가 성위,도위로, 동위는 북제로, 서위는 후주로, 후주는 북제를 병합했다가 수로 이어지고 수는 다시 남조의 진을 병합함으로써 비로소 남북이 통일되는 왕조를 세우게 된다. 남북조시대에는 왕조의 교체가 빈번하여 따라서 사회의 혼란이 극심하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남북조 모두 불교가 융성했다는 사실은 중국 역사상 주목할 만한 일이다.  또, 이 시대의 문화도 육조 문화라 일컬어 문학에서는 도연명, 서도에서는 왕희지, 회화에서는 고개지 등의 유명한 이들이 배출되는 화려한 문화의 꽃을 피운 시기이기도 하다.

 

 

 사상적 혼란기와 불교의 지배이데올로기화

 

 불교는 중국 땅에 정착하는 데 많은 고난의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인도와는  토양이 다른 중국 속에서 불교는 상당기간 그 빛을 발하지도 못했고, 영향력조차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다.  상당기간을 중국의 역사 속에서 그냥 지속되다가  남북조시대의 혼란기, 즉 A.D 3-400년경에 들어오면서 불교가 중국사회에 급격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당시 상황이 유교를 중심으로 했던 한나라가  멸망하면서 혼란기에 접어들 무렵이라, 유교 중심으로 중국사회를 수습할 수 있는 형편이 못되었고, 또한 유교적인 토양에 뿌리 내리고 있지 못하던 북방의 제 국가들이 중국사회에 들어와서 자리를 잡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는 정치, 사회, 경제적 혼란과 아울러 사상적 혼란이 굉장히 심화되는 시기에 중국사회에서 급격하게 퍼져 나가게 되었다.   우리 나라에  불교가 전해진 시기도 바로 남북조시대였다.   고구려에 불교가 최초로 전래된 시기는 A.D 372년으로, 5호 16국 가운데 하나인 북조의 전진에서 순도에 의해서 였다.  백제에 불교가 최초로 전래된 시기도 A.D 384년으로,  동진을 거쳐 인도승 마라난타에 의해서 였다.    우리 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시점이 중국에서는 혼란기였음을 볼 때, 왕이 불교의 사신을 우리 나라에 파견했다고 하는 것은 그 국가의 지도체제가 불교를 수용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한 국가의 지도사상으로서 불교가 등장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불교가 정치지도자의 지도이념과 민중의 안심입명처로서 널리 전파되기 시작했음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유교가 유입된 한역경전들의 특성과 한계

 

 한편 불교철학이 중국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문제가 뒤따랐다.   인도에서 다른 스리랑카나 태국, 버어마 등지의 국가들에게 전파되었을 때는 그 문화적 수준의 차가 심해서, 팔리어로 집필된 인도경전을 자국어로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인도말로  불교공부를 해야만  했다.   그러나 중국에 불교가 들어올 당시 중국과 인도의 문화수준은 거의 대등하였다.  따라서 중국에서는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사상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새롭게 중국어로 의역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특히  A.D 3-400 년경에는 인도에서 전성기를 이뤘던 대승불교가 중국에 전래되면서 열성적으로 번역작업과 불교전파를 했던 사람들이 대승불교였다.  때문에 중국에서는 자연히  대승불교가 불교의 전체적인 모습으로   비추어지게 되었다.   또한 범어 원전과  한역 경전을 비교해보면 사상적 내용은 비교적 정확하나 생활과 관련된 내용은 많은 차이를 갖는다.   예를 들어 인도에서는 '어머니, 아버지'순으로 부르나  중국에서는  '아버지, 어머니'순으로 부르고 있고, 또 부처님께서는 ' 남편과 부인은 각자 맡은 바 일에 충실해야 한다 ' 고 하셨지만 중국에 들어와서는 ' 여자는 남자보다 먼저 일어나야  하고 남편을 존중해야 한다'로 바뀌는 등, 중국적 토양의 문화에 맞게끔 의역이 되고 있다.   또 불교 내에 여성차별이라는 봉건적 요소가 깊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는데 이도 또한 중국어로 번역되는 과정 속에서  유교철학이 가미된 것이라 볼 수 있다.    '효'의 문제에 있어서도, 즉 부모와 처자를 버리고 재산을 버리는 사문은 유교측의 입장에서 볼 때 가장 큰 불효를 저지르는 비판의 대상이었다.  인도에서 머리 깎고 수행하는 출가는 환영받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가정에 인간존재의 기반을 두는 유교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행위였고 결국 인력난을 고갈시켜 국가를 망치게 한다는 우려로 탄압을 가하게 된다.

 따라서 유교와의 융화에 기반을 두어 나오게 된 대표적인 경전이 [부모은중경]이며, 이로써 중국의 문화권에서  불교윤리는 중국적 보편성을 획득해 나갔다.  그러나 중국의 민간신앙과 불교가 결합하는 과정에서 불교의 근본사상에서 상당히 벗어난 경전들도 많이 만들어졌는데, 대표적으로 산왕경, 고왕경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원래 중국에는 음양오행의 철학이 있기는  했지만,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지다는 정도의 우주론과, 현실적인 정치문제나 윤리, 도덕 문제를 내포하는 유교사상이 보편적이었기 때문에 불교의 무한한 시간에 걸친 윤회사상, 우주론, 심오한 철학 등이 중국 사람들에게 전면적으로 받아들여지는데는 여러 가지 문제가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중국의 대중이나 지식인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가 않았고, 마치 유교사상을 공부하듯이 불교경전을 읽고 분석하여 학문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우리 나라에 천주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 대부분 천주학이라는 학문으로 받아들였듯이, 불교도 종교로서 보다는 하나의 학문으로 연구되어진 것이다.

 

 

 

4.  불교의 정착기(수,당의 불교)

 

구마라습과 불교의 교학체계 정립

 

 불교사상이 중국에 처음 전해지면서 경전의 내용과 유사한 중국사상을 연관시켜서 부처님의 경전을 각색하여 이해하게 되는데, 이를 격의불교라 한다.  초기  한역경전 자체가 노장철학을 이용하여 요해된 격의불교였으므로 이를 지양하고 불교의  교학체계를 정립하기 위한 번역사업이 다시금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런데 이 불경번역사업과 전파사업을 하는 데 있어서 중국의 불교는 왕실의 지원과 휘하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지금은 경전번역을 혼자서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 당시에는 불교에 정통한 사상가 즉 고승과 한문에 정통해있는  사람, 또 범어에 정통해 있는 사람들이 공동으로 모여 번역작업을 하였고 또 그 번역의 대표자로서 고승의 이름이 적혔던 시절이다.  이 역경사업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구마라습은 중국의 여러 종파를 형성하는 기반이 되는  번역작업을 하게 되었다.  번역된 용수의 [중론] [대지도론] 등의 저작은 격의불교를 극복하고 올바른 空觀을 정립하였고, [법화경] [열반경] 등은  공의 긍정적 표현인 불성의 논리를 통하여 일반 민중들에게 신앙의 힘을 북돋아주었고 불교교리의 정통한 이해를  돕기도 하였다. 또한 역경사업과 계율의 정비를 통하여 불교정착의 기반을 닦은 도안은 승려들의 성을 모두 석으로 통일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당시에 부분적으로 세속권력과 유착해 가는  승단의 청정성을 유지하고, 유교적 질서를 부정하며 승단 내의 결속을 통한 승가공동체의 순수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으로 보여진다.  그는 열렬한 미륵 신앙자로 민중들의 교화에 큰 역할을 했던 사람이다.

 

 

  백련사 운동과 민중불교정신

 

 한편 동진으로 남하한 도안의 제자 혜원은 철저한 계행과 함께 아미타불의 염불실천을 통한 선을 정립하여 민중 속으로 깊이 침투하였다.  그리고 그 신앙 중심의 결사체로서 백련사 운동을 낳았다.  왕권에 종속되지 않으면서 민중적 기반을 확보해 가는 데 불안을 느낀 지배세력은 승단을 왕권하에 복속 시키고자 하였다.  이에  혜원은 출가법과 세간법의 차이를 밝혀 사문은 국가권력에 대해 자유로움을 주장했는데 이를 계기로 불교는 왕권의 견제와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예를  들어 왕자불배론을 설해 극단적으로 권력을 배척하는 입장에 서기도 하였다.  사문이 왕에게 절을 해야 하는 문제를 놓고 승가와 왕실간의 마찰이 생겨났는데, 인도에서는 승려의 위치가 초자연적인 존재로서 인식되어 있었기에 지배자에게  예를 갖출  필요가 없었고 정치권력에  거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중국토양에서는  충,효 사상이 밑바탕에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체제에 대한 항의는 승가내에서 조차 이후로는 자연스럽게 사라져 갔다.

 

 

 남북조의 불교사조와 법난

 

 동진을 세운 이후 수나라가 통일할 때까지 중국불교는 남북으로 나뉘어, 화북의 호족과 강남의 한족이 갖는 정치권력의 차이와 도피적인 죽림칠현의 사상, 유교철학의 영향으로  서로 다른 상호 특색 있는 발전을 계속해 나간다. 남조는 중앙권력의 힘이 약하자 불교를 지원, 현학적인  귀족불교로 전환시키면서 불교를 지배 이데올로기화하여 지방 호족들을 융합하려 하였다.  이로 인하여 불교교학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수, 당의  여러 종파를 형성하는 기반을 닦았으나, 점차 관념화되어 가면서 민중성을 상실하였다.   북조는 중앙집권력이 강하였으므로 지배권력의  유지를 목적으로 불교를 지원하거나 탄압하였다.  이에 불교는 권력과 긴밀하게 유착하거나 다른 경우 민중 속으로 깊이 침투하는 양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전자는  철저하게 지배 이데올로기로 왕권에 봉사하며 사상적 타락을 낳고 부를 축적하여 민중의 지탄을 받았다.  후자는 승려의  기득권을 버리고 민중과 동참하였다.   북위의 폐불 이후 유교국가 체계를 확립한 북주 마저 폐불이 잇따르자 불교계에서는 강력히 반발하였다.  그러나 민중적 힘을 지니지 못한 채 취약한 조직적 기반으로 인하여  불교계는 강력한 대항마저 전개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승가의 타락에 대하여 계율의 연구가 진행되고, 선법이 유행하여 정토교가 성립되면서 민중 속  깊숙히 침투하는 새로운 흐름이  일어나게 된다.

 

 

 교학불교의  번영과 14 종파- ,

 

 남북조 시대는 모두 불교가 융성했지만 왕실이 부정부패가  심화되자 멸망하게 되었고 수가 새로이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어 근400년 동안 내려오던 대분열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수는 통일국가의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불교를 선택하였고,  특히 문제는 불교부흥정책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급한 중앙집권제  강화, 군부 중심의 통일로 인해 수 왕실 자체에 내분이 일어났고 더우기 3번에 걸친  고구려 원정의 실패로   결국 수나라는 39 년만에 망하고 당이 세워졌다. 당대에는 승려를 관직에까지 등용, 불교는  국가종교로서의 색채를 강하게 띄게 된다.   

수, 당대에는 승단의 사회적 지위가 확보된  것과  함께 교학이 발달하게 된다.  당시 인도경전의 막대한 양이 동시에 유입, 번역되자 중국에서는 경전이 성립된  시기와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우열을 가리는 교상판석을 낳았다.  따라서 인도에 있어서의 불교의 흐름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불교가 태동하게 될  계기가 된다. 이러한 불교의 번역, 해석, 연구가  결실을 맺음으로써 제 종파가 현란한 개화를 하기 시작하는데 이 시기에 남북조 시대의 수입불교의 형태를 벗어나 중국불교로서의 독특한 입장을 확립하게 된 것이다. 중국에서 발달한 종파는 모두  14개로 그 성격을 간락히 살피면, 삼론종, 성실종,  섭론종,  지론종은 대승불교의 논서를 연구하는 종파이고, 구사종은 소승불교의 논서를 연구하는 종파이다.  열반종은 [열반경]을 소의경전으로 하고, 천태종은 [법화경]을 소의경전으로 하고, 화엄종은 [화엄경]을  소의경전으로 한다.  법상종은 불교를 인식론적 학문으로 체계화한  종파이고, 율종은 계율 중심의 종파이며 진언종은 밀교의식을 계승했다.  정토종은 아미타불을 신앙하는 종파이고, 선종은 참선수행을 근본으로 하였다.

 

 

 중국왕조의 블교에 대한 이중정책

 

 이상과 같이 수, 당대에 있어서는 제종파로부터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고, 교판론과 경전연구는 불교의 교학체계를 세우는 데 많은 기여를 하여 실로 불교역사상 황금시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과 유리된 번쇄한 논리와 논쟁으로 일관하여 번역사업, 즉 문화사업에 치중하였고, 또한 왕실과의 결탁으로 사회적 지위를 굳건하게 차지한 승려들이 부를 축적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교단은 관료화되고 권위주의화  되었다. 역대 왕실의 불교에 대한 정책은 항상 보호와 탄압의 두 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불교의 보호는 신앙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다분히 불교에 의한 국가통일의 정책이었던 편이다.  그런데 당시 불교가 왕권에 완전히 복고되지 않은 채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는 데 대해 위협을 느낀 왕조는 불교의 타락을 빌미로 법난을 자행하고 지배 이데올로기로서의 한계를 느껴 도교와 함께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국교로 채택하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난다.

 

 

5.  새로운 불교운동(선불교)

 

새로운 종교개혁, 선불교

 

 대승불교 전문학자들에 의해서 각 경전이 번역, 연구되어 현학적이고 고도의 논리가 담긴 논서들이 속출하여 교학 중심으로 관념화와 이론화가 갈수록 정교해짐에 따라 일반대중들이 불교를 이해하기는 더더욱 어려워졌다.  당시의 문맹률은 95-6 %를 웃도는 수준이었다.   왕권과 결탁되고 절 짓고 탑 만드는데 치중하고 경전에 주석을 다는 학문 중심의 길을 걸음으로써 불교가 실천성을 상실하고 대중들을 외면하는 조류가 형성되자, 이제는 불타의 근본사상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자기반성 의식, 민중지향적 의식이 중국 땅에 다시 싹트게 되었다. 

 수, 당 이전에 이미 태동이 되기 시작한 것으로, 당시의 교판을 둘러싼 논쟁과 불교사상이 관념화하는데 대해 근본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면서 일어난 대표적 종파가 선종이고 보리달마를 시조로 한다.  즉 중국 선종은 양나라 때 달마가 중국에 도착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달마는 불교신봉자인 양무제와의 대화 속에서도 나타나듯 권력으로부터 비호받는 형식적인 종교활동을 부정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다른 스님들은 전륜성왕이라 칭송하는 무제의  "내 공덕이 이만하면 크지 않소?"  라는 질문에도 달마는  "무공덕" 이라 답을 한다.  이 문제로 크게 곤경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이후 국가권력의 보호 및 이용과는 완전히 단절된 채 산 속에 숨어서 법을 전수시켜 나갔다.  달마에게서 최초로 법을 전수받는 2조는 혜가이고, 3조 승찬, 4조 혜능에 이르러서는 널리 대중들에게 퍼져 나갔다. 선은 인도에서 발생했지만, 중국에 있어서 선종은 중국의 새로운 걸작품이라 할 수 있다.  원시불교에서 대승불교가 나오고 다시 밀교가 나온 것처럼, 교학불교에 대한 새로운 종교개혁으로 선불교가 등장한 것이다. 처음에는 교학불교에 비해서 아주 미미한 세력에 불과했던 선 세력이 당 초기에 선승들이 속속 배출되면서 당 말기에 이르면 제 종파가 쇠퇴하였으나 선종은 홀로 융성하여 그 후 중국불교는 선종이 대표하게 되었다.

 

 

 선불교의 성립배경과 특징

 

 선종은 不立文字 敎外別傳을 특색으로 하는 종파이다.  대승불교의 공사상은 부처님의 말씀을 결집한 [아함경]의 해석을 중심으로 하여 정당성을 주장한 것으로, 대승은 그러한 문자나 경구에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면서 등장했다, 그런데 그 대승불교마저도 시간이 흐르면서 경전과 문자, 언어에 집착하여 교판을 둘러싼 논쟁을 일삼고 불교사상을 관념화시키는 함정에 스스로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 선불교는 복잡한 한문을 다 익히고 다양한 경전을 다 암기한다 해서 깨달음이 열리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한문에 통달하지 않고는 경전을 읽을 수 없고, 따라서 불교의 사상이 대중들에게 전달되는 데 어려움이 컸던 당시의 상황에서, 선에서는 복잡한 문자를 모르고도 누구나 다 쉽게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모든 종파는 부처님께서 말씀으로써 가르치신 바-교()로서 그 근거를 확보하지만, 선종에서 교를 바라보는 입장은 부처님이 안타까움과 노파심에 부득이 말씀하신 것이지 진짜 알맹이는 문자를 세우지 않고 전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부처님은 문자를 세우지 않고서 어떻게 미한 중생을 건지시려는 것인가.  문자나 말로 가르치는 방편을 쓰지 않고 부처님 말씀밖에 따로 비밀리에 전한 것이 있다고 주장한다.  교외별전이라 하여 선법은 마음으로써 전하여져 왔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부처님이 전해주신 것인지 확인할 도리가 없고 견성성불에 대한 객관적 검증의 도구나 실험대가 없었다.  따라서 번창일로의 타종파, 불교의 대종을 형성하고 있던 기득권 계층의 입장에서 볼 대 자신들은 인도에서부터 법맥 내지는 경전적 근거를 갖고 있는데 선종은 교리체계에 의존하기는 거부하고 문자의 허상을 타파하면서 소의 경전마저 없자 지탄을 하고 부정시하게 된다.

 

 

 선종의 전통성 주장- 전등록

 

 선종이 다른 종파와 대응해서 우리도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통을 이어받았다는 사실을 주장하기 위해서 전등의 사실을 확립해 놓게 된다.   불조의 정통성을 갖고 있음을 주장하기 위하여 사상적 전등을 고대까지 소급시켰다.  즉 석가 세존으로부터 마하가섭이 법의 등불을 받았고 그로부터 서천28조가 보리달마라는 것이다. 

 [선가귀감]에도 보면  "세존께서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하신 것은 선지가 되고, 한 평생 말씀하신 것은 교문이 되었다.  그러므로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니라." 고 밝혀 놓았다.   이것이 이른바 가섭이 석가세존으로부터 세 곳에서 선의 등불을 받으신 삼처전심이라 말해진다. 

 그 세 곳이란, 다자탑 아래에서 자리를 절반 나누어 앉으심이 그 첫째이다.   어느날 부처님이 제자들을 모아놓고 설법을 하고 있는데 가섭이 누더기를 입은 초라한 모습으로 뒤늦게 참석하였으나 사람들이 선뜻 자리를 양보해주지 않았다.  이에 부처님이 설법을 하시던 중 앉으셨던 자리를 반으로 나누어주시면서 가섭에게 앉으라고 하셨다는 얘기이다.

둘째는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이심이다.어느 날 부처님이 영취산에서 대중들을 모아놓고 설법을 하시는데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  그 중에서 연꽃 한 송이를 들어 보이니 대중은 전부 의아해 하는데 가섭만 빙그레 웃었다.  이때 가섭에게   "나의 정법안장 열반묘심을 가섭, 너에게 부촉하노라" 고 선언하셨다 한다.

셋째는 사라쌍수 아래에서 관 속으로부터 두 발을 내어 보이심이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자 부처님의 시신을 베옷으로 싸고 몇 겹의 곽에 모셔두고 다비식을 하려고 준비해 두었는데 열반에 드신지 7일이 지난 후에 먼 곳에 갔다가 늦게 도착한 가섭은 부처님을 뵙고 싶어하는 마음에 세 번 돌고 세 번 절하자 곽 밖으로 부처님이 두 발을 내어 보이셨다는 것이다.

 

 

 선불교의 파격적인 수행법

 

 선종에서는 '직지인심 견성성불'을 종지로 한다.   자기 마음을 곧바로 가리켜서 자기 성품만 본다면 곧 부처를 이룰 수 있으며, 자기 존재의 근본을 꿰뚫어 주체를 회복하면 곧 부처가 된다는 것이다.  대승불교에서의 부처는 무량한 공덕을 갖고 전지전능한 힘을 가진 신격화된 존재이지만, 선에서는 자기부처를 보도록 한다.   그리고 부처님의 사상을 전달하는 방법으로서 수많은 경전의 문자를 통하지 않고 대화를 통하여 간단하게 도를 전달하는 새로운 방법이 이른바 선문답이다.   또한 선불교에서는 공안이라는 수행방법을 사용한다.  구체적인 인간의 삶과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는 불교는 무의미하다고 보았으며 그러한 삶에 대한 문제의식이 곧 공안이다. 선가에서는 고도의 논리적 교습보다는 일상의 살아가는 모습 속에서 그 삶의 본질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백장 회해선사는 인간의 노동을 중시하여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 등의 청규를 제정하여 수행의 목적과 현실의 삶이 분리되는 것을 막기도 했다. 

 

 

 삼계교의 민중불교운동

 

 선은 급속히 중국에 퍼져 나갔으면 많은 선사들이 대중 속으로 들어가 불교의 진면목을 전하였으나, 대개 귀족들에게 전해져서 주로 강남지방에 그 주축이 세워지게 된다.   그러한 가운데 민중들의 삶 자체 속에서 그들과 동참하여 불교의 근본사상인 인간평등사상을 전했던 것이 삼계교이다.  삼계교는 신행(540-594)에 의하여 주창된 것으로, 삼계는 불교의 전개를 시기에 따라 세 단계로 나누어 당시를 말법의 시대로 규정하였다.  신행은 당시의 교상판석이 갖는 비민중성을 비판하여 소의경전을 부정하고 인간을 불성불, 당래불, 여래장불로 예배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 보불보법의 사상이야말로 말법악세에 태어난 죄많은 범부가 구제받을 수 있는 민중불교라 설하고 개인적인 기복보다 집단적인 결사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신행은 민중과 함께 노동하고 고통을 나누면서 결사를 조직했을 뿐 아니라 사회적 실천으로서 무진장원을 통하여 경제적인 상호부조를 꾀하기도 하는 등 매우 사회적인 신앙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과 실천은 봉건지배자들의 입장에서 불안한 것이 아닐 수 없었으므로 삼계교의 역사는 그대로 탄압의 역사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6.  불교의 쇠퇴기

 

당대이후 귀족불교의 몰락 과정

 

 당이 쇠퇴하자 후양, 후당, 후진, 후한, 후주 5왕조가 10년 간격으로 번갈아 바뀌는 혼란기가 온다.  이 5대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송이 다시 중국을 통일한다.   유교는 한나라 때 발달되어 중국의 사상을 지배했지만 중심사상이 되지 못하다 이 5대 혼란기를 지나면서 불교의 영향을 받아 송대에 와서는 유교가 다시 철학적으로 바뀌어 주자학의 모습으로서 지배이데올로기로 재등장하게 되었다.

 한편 수, 당시대만 해도 주된 담당계층이었던 귀족들로부터 불교는 기피를 당하게 되었고, 반대로 민중들로부터는 다시금 환영을 받게 되었다.  당 이후의 불교특색은 전반적으로 교학적인 발전이 없이 현상을 유지했고 따라서 학문적인 불교를 대신하여 당 중엽부터 번성하게 된 선종과 정토교가 주류를 형성하게 되기 때문이다.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요소가 사라짐으로써 새로이 그들의 신앙으로서 다가가고 정착되어간 것이다. 송은 이후 북방의 거란족 요나라와 여진족 금나라의 침입으로 해서 남쪽으로 도읍하여 남송으로 명맥을 유지한다.  그러나 북방에서 새로 일어난 몽고의 원나라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요, 금, 원 시대에는 화엄과 밀교가 하나로 융합되고 북방 샤머니즘의 영향까지 받은 화엄밀교가 성행한다.  이 기간의 불교는 미신적인 요소를 습합하면서 민중의 해방의지를 담은 민중종교로서 그 성격이 변화되어갔다.  이를 대표하는 것이 백련교와 백운종이다.  특히 백련교는 민중봉기의 집결체가 되어 끊임없는 민중투쟁의 맥을 잇게 된다. 원이 망한 후 명이 세워지는 데 명(1368-1644)의 태조가 된 주원장은 백련교의 영향으로 민족의식과 계급의식을 자각하여 홍건군에 가담하였으며 그 세력을 바탕으로 원을 멸망시켰다.  그러나 종교의 결집력을 통한 민중의 힘을 알고 있는 그는 불교를 지배체제의 통치가능한 범위 내로 흡수하는 한편, 조직적인 민중기반을 갖고 있는 백련교, 백운종, 명존교 등을 모두 탄압하였다.  종교적 힘을 기반으로 했던 그가 도리어 종교탄압에 앞장서는 아이러니였다.   명은 다시 여진족의 침입으로 망하고 청(1616-1912)이 성립되었다.  청은 그들의 지배체제를 유지하고자 유교를 계승하였고 '태평천국의 난'을 통하여 종교의 민중결집력을 인식한 청조는 불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를 탄압하였다.   불교의 침체는 불교인의 철저한 반성을 촉구하였으며 승려와 거사들에 의한 불교재건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청은 막강한 세를 갖고 있었지만 후반기에 오면서 서구열강들의 침입으로 다시 혼란기를 거듭하다 오늘의 중화인민공화국이 형성되었다.

 

 민중불교의 대명사, 백련교와 백운교

 5대 10국 이후에는 불교가 몰락하였다고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불교가 민중과 가장 긴밀하게 밀착되었던 시기라고도 볼 수 있다.  선불교는 번쇄하고 비현실적인 논리에 문제를 제기하고 출발하였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자신 역시 비현실적이고 관념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지식층은 불교가 국가정책적으로 탄압을 받게 되자 대부분 불교를 외면하였다.  오로지 민중들에 기반을 둔 불교만이 살아남아서 민중들의 해방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민중지향적인 입장에서 투신하는 불교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 시기의 가장 대표적인 민중의 불교는 백련교와 백운교였다.  백련교는 여산혜원의 백련사 운동의 맥을 계승하였다고도 볼 수 있지만, 남송초기에 자조자원이 시작한 것으로 백련채라고도 부른다.  이는 정토신앙에 바탕을 한 종교결사로서 철저한 계행을 수행하는 염불결사이기도 하다.  교세가 번성하자 탄압을 당해 결사는 금지되고 자원은 유배되었다.   원대에도 백련교는 사교로 계속 금지되었으나 보도는 현정호법에 더욱 힘썼다.  명의 말기에는 미륵신앙이 혼합되면서부터 더욱 강화되어, 미륵의 하생을 선전하면서 민중들을 규합하여 홍건적이라고 불리는 반란군 세력으로 결집하기에 이른다.  청조에서도 백련교도들은 계속해서 반란의 주역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여 갔다.   백운교는 북송말에 공청각이 백운암에서 제창한 민중불교의 한 종파이다.  유,불, 도 삼교의 일치를 주장한 재가집단이었는데 전통적인 여러 종파에서 이단시되고 관헌으로부터도 탄압을 받았다.   이러한 불교의 민중구원의 실천은 오늘날 중국권에 의해서도 배척할 수 없는 힘으로 남아 불교 신앙의 자유를 인정받고 있다.

 

 

현재

 

1949년 10월 1일 중국에는 공산정권이 들어섭니다.  그러나 중국혁명을 수행했던 역사적 경험을 통해 혁명의 성공은 종교적 말살에 있지 않다고 느낀 공산정부는 종교적 신앙의 자유를 보장합니다.  물론 보수세력과 결합한 사원 불교세력은 철저히 분쇄하고 기생계급의 성향을 가진 승려들을 재교육시켰습니다.  지금의 새로운 중국은 대체로 불교를 신봉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중국이 불교를 존중하는 이유는 첫째, 불교가 고대 중국의 찬란한 문화유산을 남겼다는 점과 둘째, 불교를 신봉하고 있는 아시아의 여러민족과 유대를 강화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세 번째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중국의 민중들이 불교를 신앙하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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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학교 불교학부와 대한불교조계종 표준과정을 바탕으로 한 불교학 커리큘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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