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해법인스님] 원願을 세우는 순간, 인연이 성숙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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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願을 세우는 순간, 인연이 성숙되는

 

각원사 조실 경해 법인 큰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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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 불국사가 있다면 천안에는 각원사가 있다고 한다. 여름 풀숲 사이로 들려오는 부처님 말씀. 청동아미타좌상을 향해 계단 계단 올라서니, 사바가 아래라! 단단하게 자리하신 아미타 부처님의 그윽한 미소에 어지러운 생각들이 그만 멎어버렸다. 부처님 곁에 얼마나 머물렀을까. 왼편으로 한폭 그림처럼 각원사 도량이 한눈에 들어온다. 어느새 발걸음이 빨라진다.

경해 법인스님. 스님을 뵙게 것은 생각지 못한 행운이었다. 후학들의 존경을 몸에 받는 불교학계의 귀감인 호진스님, 조계종 교육원장을 지낸 청화스님 이름만 들어도 고개가 숙여지는 스님들의 스승이시며, 인재양성 뿐만이 아니라 교학과 포교 그리고 통일발원 도량 각원사까지 일궈내신 시대의 어른이시다.

입구에서부터 조용한 미소로 안내해 주시는 주지스님을 뵈니 더욱 설렌다. 이런 분들의 스승님이라니 어떤 분이실까?

안녕하십니까스님의 복장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장삼과 오조가사, 그리고 108염주까지 두르고 계셨다. 탁발하실 때의 복장을 지금까지 평상복으로 입고 계신다는 설명에 낮은 탄성이 나온다. ! 초발심의 치열했던 열정을 간직하기 위함이리라. 스님의 말씀이 벌써 궁금하다.

 

- 스님, 출가하신 인연이 궁금합니다.

숙세의 인연이 아닌가 싶어요. 8·15 해방 이듬해에 아버지가 콜레라로 갑작스레 세상을 뜨셨어요. 아버지의 49재를 지내러 충무에 있는 도솔암에 갔는데, 주지스님이 출가하지 않으면 서른을 넘기기 어렵다고 그래요.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 때문인지, 이미 마음이 출가에 끌리고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탁발 오신 노스님께서, 출가를 하려거든 제대로 하고, 공부도 제대로 해야 한다고 조언해 주셨어요. 그래서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에 어머니 주무시고 계실 , 살짝 나와서 절에 들어갔지요. 그리고 포산 스님 계신 합천 해인사 백련암이 출가 본사가 되었어요.

난리통에 포산 스님을 스승으로 모실 기회는 적었지만, 돌이켜 보면, 평소 몸가짐이나 대인관계의 매너는 은사스님의 영향이 같아요. 호랑이같이 장대한 기골을 가지신 포산 스님께서 의젓한 기상으로 여러 대중들을 인격적으로 접하는 모습은 지금까지도 마음 깊이 각인되어 있어요. 스님께서는 법명과 계를 주시면서, 대자대비관세음보살 행주좌와어묵동정行住坐臥語默動靜간에 불러야 한다고 말씀을 주셨어요. 그때부터 대중과 함께 때를 제외하고는 관세음보살님 앞에 대자대비라고 반드시 넣어서 기도를 했어요.

당시에는 참선을 중요시하던 시기였는데, 나는 자꾸만 책이 보고 싶은 거예요.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 사람이 공부를 하지 않으면 금수와 다를 바가 없다 국민학교를 졸업한 나에게 열심히 공부하라던 말씀이 유언이 되어 버린 같아요.

 

 

- 각원사를 건립하시게 계기가 있으신지요?

강화 보문사에서 6·25사변을 만나서 걸어 걸어서 청암사와 수도암을 거쳐 길도 없는 산길을 헤쳐서 출가 본사인 해인사 백련암으로 갔어요. 그런데 하룻밤 자고 일어나니, 인민군들이 스님들을 군사훈련을 시킨다고 끌어가고 해인사가 비었어요. 백련암에는 혼자 남게 되었는데, 출가 본사고, 은사스님께서 주석하셔야 곳이니까 혼자서라도 백련암을 지켜야 했지요.

당시에 탁발해 쌀을 걸망에 지고 백련암까지 올라오면 공비들이 산에서 슬슬 내려와 안에 누구 있어?해요. 혼자서 어떻게 하겠어요? 안녕하시오그러면, , 젊은 스님 있었느냐고 좋아하면서, 쌀이고 간장이고 순식간에 가져간단 말이에요. 그리고 낮이 되면 군경들이 와서 지난밤 누가 왔느냐고 물으면 모르겠다고 하는 백련암에서의 생활이에요.

그러다 어느 , 경주 불국사 석굴암에 올라갔어요. 그때 석굴암 부처님 앞에서 동족끼리 서로 흘리고 고통 받는 국민과 나라를 위해 남북통일 기원 대성역을 이룩해야겠다는 서원을 세우게 되었어. 국민적 염원이 기도로 뭉쳐지면 통일로 발전되지 않겠어요?

그런 기회를 받는 데에는 인격도야가 없으면 불가능하지요. 해방되기 전까지 우리말을 배워서 국민학교 졸업할 때에도 정말 놓고 자도 몰랐으니, 자신의 그릇이 준비되어야 아니에요? 그래서 박사가 되어 큰일을 하겠다고 다짐했지요. 이후 삶이란, 서원을 성취하기 위한 땀과 정진의 나날이라고 보면 돼요.

 

- 어려운 시기에 어떻게 공부를 이어가셨는지요?

석굴암에서 서원을 세운 다음 해에 해인사에서 개원한 법보학원에 입학했는데, 바로 해산되어서 어쩔 없이 백련암으로 다시 올라가야 했어요. 그때 백련암을 지키겠다고 맹세하면서, 공부의 길을 개척할 있는 ·구학을 겸한 지도자를 만나게 해주십사 기도하고 기도했지요.

그러던 어느 , 가끔 백련암에 오시던 스님이 와서 그러세요. 법인 수좌, 내가 꿈을 꿨는데, 어느 유능한 분이 누더기를 입고 오더라.하시는 거예요. 정말로 일주일 뒤에 분이 오셨는데, 대강백 관응 스님이셨어요.

그날 이후로 기도하고 탁발하면서 틈틈이 관응 스님께 배우기 시작했어요. 고성 옥천사, 진주 연화사 등에 방부 들여 공양주·채공 소임을 살면서도 뒷방에서 사집·사교를 배웠어요. 공부하는 소리가 크다고 옆에서 방해하면, 들고 버릴 정도 였어요.

그러다 진주 연화사 포교사로 취임하신 관응 스님을 시봉하면서 경남대학 전신인 해인대학에도 입학했어요. 입산 9 만에 드디어 공부 길이 열린 거지요. 그렇지만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어서, 마산공업고등학교 야간부를 다녀야 했어요. 낮에는 해인대학, 저녁에는 교복으로 바꿔 입고 고등학교 다닌다고, 별명이 환속 후보 1호였어요. 하하하.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는 마산 서원골 근심바위에 매일 올라가 대자대비관세음보살 100 기도를 했어요. 해인대학 졸업하고는 해인사 백련암에 재입산 해서 3·7 묵언패黙言牌걸고 기도에 들어갔어요. 여기까지 인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계속 공부할 있게 주십시오.하는 마음으로 엎드려 자면서도 밤낮을 대자대비관세음보살을 소리 높여 기도 했어요.

회향하는 해인사 총무소임을 맡고 있던 사형스님이 올라오더니, 장경각 보수 공사 하는데 일년기도를 하면 어떻겠느냐고 하셨어요. 그런데 어제까지 교복 갈아입고 학교 다니던 이가 무슨 팔만대장경 기도를 하느냐면서 대중공사도 벌어지고 그랬어요. 결국은 하루 10시간 이상 일년기도가 시작됐고, 그러다 기도를 마치기기도 전에 인연이 생겼어요. 문교부 장관도 지냈던 분인데, 스님은 무슨 원을 세운 것이 있기에 그렇게 열심히 기도 하십니까?묻기에 서원은 우선 공부를 계속하는 것입니다.했더니, 서울에 올라오라는 약속이 나왔어요. 그래서 3 3 일년 기도 회향하고, 6 동국대 사학과에 학사편입해서 학생증을 받았으니, 어때요?

일본 유학 , 그때는 정부기관의 보증이 있어야만 여권이 나오는데, 아무것 없이도 결국 되는 거예요. 비행기 타고 가면서도 남북통일 성지를 이룩할 기회를 갖기 전에는 결코 귀국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는데, 이루어져요.

그러니깐 반드시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이루어지게 되어있어요. 원은 세우는 순간부터 인연이 성숙되거든요.

 

- 공부와 불사를 함께 오시면서, 원칙이 있으신지요?

버릴 알아야 해요. 서울에서 대학 다닐 , 거처를 번이나 옮기고 나서야, 아리랑 고개에 팔십 평짜리 문화주택을 어렵게 구해서 절을 하는데, 하루는 살림 사는 노보살님 앞으로 등기소에서 편지가 왔어요. 남의 것이라면 만져 보지도 않는데, 그날에는 왠지 봐야 같았어요. 봉투를 떼어 보는데, 절이 보살님 이름으로 되어 있어요. , 이건 인연이 아니올시다.하고 깨끗이 내버려두고 그날 당장 싸서 나왔어요.

그리고 화계사로 가서 소임 맡아 살면서, 많은 인연들을 만날 있었어요. 특히 야나세 유젠枊瀨有禪이라는 일본스님이 한국불교 성지를 참배하는 안내해 드렸는데, 인연으로 일본 유학 초청장을 보내주셔서, 공부길이 열린 거지요. 일본에 가서는 여기 각원사 대불을 시주하신 분들을 만나고……. 생각해보면 거기서 시시비비했으면 이런 인연들이 이어졌겠어요?

하나 , 언제 어느 때나 친절해야 해요. 배려심이 없는 세계가 어떻게 성불의 세계가 되겠어요? 일본에 자주 가는 식당에 요만한 글귀가 걸려 있어요. 우리말로 하면 오는 사람 부처님, 오는 사람도 부처님, 부처님은 복의 부처님이에요.

일본에 유학가서 13 맨션을 빌려서 해동선원 편액을 걸고 백일기도를 했어요. 그때 신도분들이 오시면, 공양주·채공 했던 경험을 발휘해서 김치 하나라도 직접 담아내고, 나물 하나 무쳐서 내고, 무릎 꿇고 정성스럽게 같이 기도 했어요. 회향하는 , 분이 백일동안 스님을 겪어보니 정말 좋습니다.하면서, 동경 전철역에 명월사明月寺가 시작된 거예요.

명월사를 지으면서도 조계종에 사찰·재산등록을 했어요. 그랬더니 지금 한국 불교계가 시끄러운데, 스님한테 마련해 드리는 것을 그렇게 한다고 시주한 분들이 와서 야단이 났어요. 그래서 나는 출가 , 집에서 보따리 하나 들고 나온 사람이고, 것이라고 챙길 것도 없다. 여기 명월사는 종교기관으로 등록되어, 재일 동포 불자님들 선영 모시고, 계속 부처님 말씀 듣는 장소가 되어야한다. 했어요.

그렇게 불쾌감으로 돌아갔는데, 이튿날 전화 목소리가 아주 부드러워요. 처음에는 세상물정 모르는 스님으로 생각했는데, 집에 가서 다시 생각해보니 욕심 없는 스님 뜻을 헤아렸다면서 지난밤에 광장에서 대불이 솟아오르는 현몽을 받았다는 거예요. 대불을 시주할 테니, 사고 사원 건립하는 것을 책임진다면 바로 진행하겠다고 해요. 진행하시겠습니까? 자신 있겠습니까?묻는데, 찬스예요. 그리해서 69 도일해서 6 , 75년에 산을 보러 왔어요. 그리고 각원사에 등기된 3만평을 고스란히 조계종에 등록했지요.

마음을 비우려면 이런 이야기들이 중요해요. 그런 인연이 오묘하거든요. 보통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다고 하지요? 그렇지만 오는 말이 설사 나쁘더라도 가는 말이 고우면 사람 되는 거예요.

 

 

 

- 마지막으로 말씀 부탁드립니다.

생각해보면, 생애 가장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이 기도예요. 의지와 판단력으로 감당할 없는 상황을 만나면 기도를 합니다. 기도하고, 기도하고, 기도하면 법력난사의法力難思議 도리가 정말 있어요.

은사 스님이 입적하신 해인사 강원에 방부를 거절당하고, 위봉사 극락암에 갔어요. 일주일간 잠을 자고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를 하고서 다시 보문사에서 기도를 시작했는데, 정말 말로 없는 법열이라든가 희열이 대단했지요. 지금도 부처님 앞에 서면 표현할 없는 법열을 느끼는데, 그때의 기도가 시작이 아닐까 생각해요.

요즘도 하루 일과가 새벽 3시에 샤워하고 장삼을 수하고, 주력을 하고서 4시에 대웅보전에 들어가요. 그리고 부처님 전에 합장반배하면서 이상 바라지 않겠습니다. 몸과 마음을 숙이겠습니다.그렇게 매일 매일 발원해요.

각원사는 참배객들이 끊이질 않는데, 태조산 전체가 그대로 법당이에요. 청동아미타좌상을 작품으로 작가들은 사진을 찍고, 화가들은 화폭에 담고, 문인들은 시를 짓고, 학생들은 감상문을 쓰지요. 대불 앞에서 개종을 결심한 이들도 있어요. 남북통일 기원 성역 불사를 하니, 포교도 되고, 교육도 되고, 중생교화도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불사한다고 무조건 사판승으로 보지 말아야 해요. 이사理事 구분한다고 법상에 올라 법문만 하고 목탁만 치는 아니라, 비록 간단한 불교의식이라도 정성들여 올리는 스님이 되세요. 거기에 부처님 좋은 말씀을 전해줄 있어야 해요. 그리해서 전공에 따라 화두를 들거나 주력을 해야지요. 반쪽짜리 스님으로 살지 말고 제대로 살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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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납 여든이 넘는 몸으로 장정 7명이 함께 쳐야 한다는 대종을 힘껏 치시며, 활달한 기개를 보여주신 스님은 바쁜 일정 속에서도 몸소 도량을 안내해 주셨다.

반세기 만에 빈손으로 일구어 60 청동대불과, 200 법당, 에밀레종보다 크다는 웅장한 범종……. 송이 연꽃으로 피워낸 대가람 불사에 동참한 200 명의 축원지를 모두 책으로 엮어 정갈하게 보관하시는 모습에 불연으로 맺어진 작은 인연까지도 정성을 다하시는 마음이 느껴졌고, 서원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얻었다. 이러한 스님의 덕화는 30년을 한결같이 곁에서 시봉해 왔다는 주지스님의 거울 같은 눈빛으로도 전해졌다.

살아보자며 어깨를 두드려주시는 스님의 손길에 대불 앞에서 멎었던 생각들이 새롭게 꿈틀거렸다. 성글었던 원력을 다시금 굳건하게 해주신 스님과의 만남. 범종각에 올라 타종하며 태조산 자락을 울리던 감동이 지금 순간까지도 깊고 잔잔하게 물결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