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람의 구조와 시대별 특징에 대하여

Extra Form

No Attached Image

                                           가람의 구조와 시대별 특징에 대하여



  Ⅰ. 서  론
      주제선정근거/목표
  
  Ⅱ. 본론
    1. 가람의 개념
      ① 가람의 어원
      ② 가람의 유형      
    2. 가람의 구조
      ① 가람의 전체적 구조
      ② 범종
      ③ 법당
      ④ 불전
      ⑤ 보살전
    3. 시대별 가람 배치
      ① 가람배치의 개념
      ② 삼국
       ㈀ 고구려
       ㈁ 백제
       ㈂ 신라
      ③ 통일신라
      ④ 고려·조선
  
  Ⅲ. 결론
         가람배치 연구의 의미

Ⅰ. 서  론
충남 지역 답사를 통해서 여러 곳의 사찰과 사지(寺地)를 경험하였다. 그 경험을 통해 시대별로 가람의 배치가 다르다는 것과, 그 차이를 통해서 유물의 시대관측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고, 또한 사전지식(가람의 구조,배치)없이 사찰 답사를 할 경 우 얻어 갈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래서 2003년도 추 계답사 보고서의 주제는 가람의 구조와 시대별 특징으로 하였다. 본론에서 가람의 어원과 정의, 구조별 특징에 대해 알아보고, 곧이어 가람배치의 시대별 특징(삼국∼ 조선)을 살펴보겠다. 그리고 결론으로 가람연구의 목적과 의미에 대한 것으로서 보 고서를 마칠까 한다.
  
Ⅱ. 본론
1. 가람의 개념
  ① 가람의 어원
사찰의 어원은 상가람마(Samgharama)이다. 불교 교단을 구성하는 비구(남자 승려), 비구니(여자 승려), 우바새(남자 신도), 우바이(여자 신도)의 사부대중(師父大衆) 이 모여사는 곳이라는 뜻이다. 중국인들은 이것을 바꾸어 가람(伽藍)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탑·금당(金堂)·강당(講堂) 등 사찰의 중심부를 형성하는 건물의 배치를 가리키며, 그 배치는 시대와 종파에 따라 다르다. 한국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삼국시대이다. 한문으로 승가람마(僧伽藍摩)로 표기되며, 승가란 중(衆)· 람마(藍摩)란 원(園)의 뜻으로 중원, 즉 여러 승려들이 한데 모여 불도를 닦는 곳이다. 이것을 후세에 절 가람(伽藍)이라 부르게 되었다. 불교가 처음 일어났던 때부터 사찰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불교교단을 후세에까지 존속시킬 수 있었던 최대 의 요인이 되었다.  


  ② 가람의 유형
사찰은 크게 평지가람형(平地伽藍型), 산지가람형(山地伽藍型), 석굴가람형(石窟伽 藍型)의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되고 발전하였다. 평지가람은 나라의 서울을 중심으로 넓은 사역(寺域)에 장엄한 건축물을 가지는 것이 보통이다. 산지가람은 신라 말기에 도입된 선종의 영향과 풍수지리설에 의거하여 수도 생활에 적합하도록 설계된 특징을 지닌다. 석굴가람은 천연 또는 인공의 석굴에 건립하는 사찰로서, 주로 기도 를 위한 도량으로 이용되었다. 이 석굴가람은 우리 나라보다는 인도나 중국에 많았던 유형이다.

2. 가람의 구조
  ① 가람의 전체적 구조
우리 나라에서는 삼문(三門)을 총칭하여 산문이라 하고, 입구의 문을 일주문(一柱 門), 가운데 문을 천왕문(天王門), 마지막 문을 불이문(不二門) 또는 해탈문으로 명 명하고 있다. 또 사찰에 따라서는 일주문과 천왕문 사이에 금강문(金剛門)을 따로 두는 경우도 있다. 일주문은 기둥이 한 줄로 늘어서 있다고 해서. 천왕문은 사천왕 을 모시고 있다고 해서 그렇게 이름 지어졌다.   사천왕은 네 방위와 관련지어져 있다. 동방지국천(持國天), 남방증장천(增長天), 서방광목천(廣目天), 북방다문천(多聞天)이 그것이다. 불이문은 불이의 진리로써 해탈을 이룰 수 있다고 하여 불이문 또 는 해탈문이라 불리는 것이다.


  ② 범종(梵鐘)
범종(梵鐘)은 범종각(閣)에 있지만, 그 집이 2층의 누각으로 형태를 바꿀 때에는 범종루(樓)라 한다. 범종각에는 범종만이 홀로 있기도 하지만, 규모있는 사찰에서는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板) 등이 범종과 합하여 '불전사물(佛殿四物)'이라는 이름 아래 함께 배치되기도 한다. 법고는 소가죽으로 만드는데 축생(畜生)의 제도를   위하여 친다. 운판은 처음에는 부엌 앞에 걸어 끼니때를 알리기도 하고, 구름이 화 재를 방지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고도 한다. 운판은 공중을 날아 다니는 중생 을 제도하고 허공을 헤매며 떠도는 영혼을 천도할 수 있다고 한다. 목어는 나무로 만든 물고기를 말하는데, 이것은 물 속에 사는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불교의 여러 의식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불구(佛具)인 목탁은 목어가 변 형되어 생겨난 것이다.


  ③ 법당(法堂)
법당(法堂)은 불교신앙의 대상이 되는 불상이나 보살상 등을 모신 전각이다. 이러 한 전각은 처음에는 금당(金堂)이라고 하였으나, 선종에서 법문을 설하는 장소를 법당이라고 하면서부터 혼용되기 시작했다.


  ④ 불전(佛殿)
불전으로는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寂滅寶宮 또는 舍利塔殿)을 비롯하여 석가모니를 모신 대웅전(大雄殿), 석가모니의 일생을 기리고 그 행적을 표출 시킨 영산전(靈山殿), 석가모니를 본존으로 모시면서도 그 제자들에 대한 신앙 세계를 함께 묘사한 응진전(應眞殿)과 나한전(羅漢殿), 진리의 몸 그자체인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大寂光殿), 극락정토의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極樂殿), 병든 중생을 해탈시켜 준다는 약사여래를 모신 약사전(藥師殿), 미래의 부처님인 미륵불을 모신 용화전(龍華殿), 불교의 시간관에서 볼 때 현재에 속하는 현겁(賢劫)의 모든 부처님을 모신 천불전(千佛殿) 등이 있다.

  
  ⑤ 보살전(菩薩殿)
보살전으로는 관세음보살을 모신 원통전(圓通殿), 지장보살과 유명계(幽冥界)의 시 왕(十王)을 모신 명부전(冥府殿) 등이 있다. 그 외에 대장경이 있는 사찰에는 대장전(大藏殿)이 있고, 조사에 대한 신앙을 매우 중요시하는 선종 사찰에는 조사전(祖師殿)을 특별히 갖추기도 한다.

3. 시대별 가람 배치
  ① 가람배치의 개념
가람(伽藍)이란 말은 범어를 음역한 것으로 사찰을 뜻하며, 가람배치(伽藍配置)란 말은 사찰 건축의 형식화된 틀, 혹은 정형화된 공간배치를 의미한다. 불교사원을 건 축할 때는 중요한 건물들, 즉 금당(金堂), 탑(塔), 문(門), 회랑(回廊), 강당(講堂), 경루(經樓), 종루(鐘樓), 승방(僧房) 등의 규모와 상호간의 거리 및 위치 등에 공간적인 규칙성이 있는데 이를 가람배치라고 할 수 있다.


  ② 고구려 - 일탑삼금당식
고구려는 일탑삼금당식의 가람 배치 양식을 띠는데, 이는 중앙에 놓인 하나의 탑을 중심으로 동·서·북에 각각 금당을 두는 것을 말한다. 고구려는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불교를 받아들인 나라이다. 소수림왕 2년(372), 중국 진나라 왕이 경전·불상과 함께 승려 순도를 보내 면서 불교가 전래되었다. 2년 뒤인 374년, 중국의 승려 아도화상이 들어오고, 375년 초문사와 이불란사를 짓는 데, 이것이 우리나라 불사의 최초 기록이다. 그 뒤 평양 에 9개의 절을 비롯하여 상당수가 창건되었다고 하나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정확한 가람 배치 양식은 알
기 힘드나 평양을 중심으로 발견된 몇몇 폐사지를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평양의 청암리사지)


  ③ 백제 - 일탑일금당식
백제는 일탑일금당식 가람 배치를 취하는데, 이는 남북측 선상에 남으로부터 중문, 탑, 금당, 강당을 차례대로 배치하는 형식이다. 이는 비교적 넓은 땅이 필요한 배치 양식으로 평야 지대가 많은 백제의 지역적 특성이 반영된 것이다. 백제는 고구려보다 12년 뒤인 침류왕 원년(384), 동진을 거쳐 백제로 들어온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에 의해 불교를 받아들였다. 백제의 사찰은 공주, 부여, 익산을 중심으로 많이 세워
졌으나 현재 제대로 남아 있는 곳은 없다. 하지만 부여 군수리사지(左), 동남리사지, 정림사지, 익산 미륵사지가 발굴, 조사되면서 그 형식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익산의 미륵사지(右)는 일탑일금당식을 기본으로 한 삼탑삼금당의 특별한 형식을 띠고 있다.

  
  ④ 신라 - 단탑식
신라의 가람은 고구려나 백제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탑을 중심으로 가람이 형성된다. 하지만 고구려, 백제의 경우 처럼 금당 건물의 수가 획일화되지 않고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신라의 가람은 단탑식 가람 배치를 갖는 다고 하는 것이다. 신라의 확실한 가람 배치를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사찰은 황룡사지이다. 전체적인 배치는 백제의 일탑식을 따르고 있지만, 금당 좌우의 동서 금당이 놓인 것은 고구려의 일탑삼금당식을 따르고 있다. (경주 황룡사지 가람배치도)

  ⑤ 통일신라 - 쌍탑식
통일신라시대로 접어들며서 쌍탑식이라는 독특한 가람 배치가 등장한다. 금당 앞 에 하나뿐이던 탑이 좌우 두 개로 나누어 지면서 두 개의 탑이 가람의 중심부에 자리잡는 쌍탑식을 취하게 된다.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가람은 1959년에 발굴, 조사된 감은사지(右)와 1969년에 발굴, 조사된 불국사(左) 등이다.


  ⑥ 고려·조선
쌍탑식 가람은 8세기까지 크게 유행하지만 9세기 이후, 즉 통일신라 중기 이후부 터는 선종의 보급으로 큰 변화를 맞는다. 좌선과 해탈을 중시 하는 선종의 영향으로 사찰들은 산간 지역으로 옮겨가게 되는데, 험준한 산악 지형에 따라 사찰을 짓다 보니 앞선 시대의 양식대로 자유롭게 지을 수 없었다. 쌍탑을 세울 수 없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아예 세울 수 없는 절도 생겨났다. 이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며 사찰은 꾸준히 세워지는데, 기본적으로는 통일신라시대의 쌍탑식 가람 배치를 계승하지만   주로 단탑식 가람 배치를 따른다. 또한 풍수지리설의 영향으로 모든 가람이 자연지세와 어울리는 터에 자리잡고, 풍수에 기초를 둔 가람 배치를 이루는 변화가 생긴다.


Ⅲ. 결  론


이제 가람의 구조와 변천과정에 대해서 종합해보고 가람배치 연구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가람배치의 큰 변화는 한마디로 금당과 탑의 변화라 할 수 있을 것 이다. 불교 초기에도 그랬지만 삼국시대 초기에는 주경배 대상이 탑(목탑)이었으나 차츰 탑에서 금당으로 중심 축이 바뀌면서 조선시대에 오면 탑은 단순히 장식적인 구조물로 되어 버린다. 그리하여 여기서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은  삼국시대 이후의
우리 나라 역사를 연구할 때 가람 배치는 중요한 시간적인 지표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각 시대마다 가람배치 형식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남아있는 절터에서 발굴된 유물의 시기를 가람 배치 형석에 견주어 추정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람배치 연구의 의미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