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의 재발견 명품 열전 ⑥ 나전칠기 불교용품 주로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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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공예·나전기술의 융합 … 불교용품 주로 제작

고려사의 재발견 명품 열전 ⑥ 나전칠기

박종기 국민대 교수 j9922@kookmin.ac.kr | 제340호 | 20130915 입력
고려문화의 또 다른 정수를 보여주는 명품은 나전칠기(螺鈿漆器)다. 현재 16점이 전해진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1점을 빼곤 모두 해외(일본 10점, 미국 3점, 유럽 2점)에 유출돼 있다. 나전칠기는 칠공예(漆工藝)와 나전 기술이 합쳐진, 이른바 기술의 융합에 의해 생산된 명품이다. 나전 기술은 원래 중국 당(唐)나라에서 건너왔다. 이와 달리 목재제품 등에 옻칠을 입히는 칠공예 기술은 이른 시기부터 우리나라에서 축적돼왔다. 우리나라 칠공예의 장식기법이 주로 자개를 이용해왔기 때문에 칠공예 기술과 나전기술을 분간하지 않고 사용하면서, 나전칠기가 단일한 기술로만 제작된 것이라는 오해를 받게 된 것이다.

또한 고려의 나전기술은 중국과 달랐다. 당나라의 나전은 자단(紫檀·동남아 등지에서 식생한 나무)과 같이 단단하고 무늬가 아름다운 나무에 바로 나전을 새겨 넣었다. 그래서 목지나전(木地螺鈿)이라 한다. 반면에 고려의 경우 경전·염주 등을 담는 나무상자에 굵은 삼베를 바르고 옻칠을 한다. 그 위에 잘게 썬 나전을 새겨 넣은 후 다시 옻칠을 덧입힌다. 그런 후 나전 무늬에 덮인 칠을 벗겨내고 광 내기 과정을 거쳐 제품이 생산됐다. 이렇게 나전 기술과 칠공예 기술이 결합돼 나전칠기라고 했다.

나전대모국화당초문 염주합 세부도. 국화꽃의 붉은색 꽃술과 잎은 채색한 대모, 흰빛 잎과 넝쿨은 나전을 각각 새겨 넣은 것이다. 꽃 주변 테두리는 은과 구리선을 가늘게 꼬아 넣은 것이다. 약 900년 전 만들어진 나전칠기의 아름답고 화려한 무늬는 아직도 선명하게 살아 있다. [사진 일본 당마사(當麻寺)]
대표작은 나전대모국화당초문 염주합
두 가지 기술의 융합으로 제작된 나전칠기는 제작기법상 세 가지 특징을 갖는다. 첫째, 1㎝ 이내로 자른 조개 조각으로 무늬를 엮는다. 이를 절문(截文·끊음질 무늬)이라 한다. 이 과정에서 흰빛에 일곱 가지 색이 어른거리는 조개 특유의 색깔이 드러난다. 둘째, 바다거북 등딱지인 대모(玳瑁)의 뒷면을 채색해 나전과 함께 그릇 표면에 무늬를 놓는다. 조개와 붉은빛으로 채색된 대모의 색깔이 어울려 환상적인 색감을 보여준다. 셋째, 잘게 쪼갠 자개들을 정교하게 새긴 꽃이나 넝쿨무늬 주변에 은(銀)·동(銅)으로 꼰 가느다란 금속선을 둘러 꽃줄기와 넝쿨을 명확하게 드러냄으로써 무늬 구성에 디자인적 질서를 부여한다. 고려 나전칠기의 화려하면서도 전아(典雅)한 멋은 이 세 가지 기술이 결합된 무늬의 아름다움에 있다.

하지만 나전칠기의 수요가 많아져 대모를 조달하기 힘들어지자 대모 장식은 점차 사라진다. 초기 작품(11~12세기)에 대모의 장식이 많이 나타나는데, 현재 전해지는 나전칠기의 종류는 주로 불교 의식과 관련된 제품이다. 대장경 등을 담는 나전경함(經函)이 전체 16점 가운데 9점으로 가장 많다. 나전칠기의 가장 아름다운 대표작인 나전대모국화당초문(*넝쿨무늬) 염주합(사진) 역시 불교 의식용 제품이다. 이처럼 나전칠기는 당시 성행한 불교 문화와 밀접한 관련 속에서 제작됐다. 1272년(원종13) 원나라 황후가 대장경을 담기 위해 나전으로 장식된 상자를 요구하자, 고려는 전함조성도감(鈿函造成都監)을 설치한 것(『고려사』 권27 원종 13년 2월조)이 그 증거다(유홍준,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2』, 2012년).

무늬 주변에 금속 선(線)을 넣는 기법은 고려 공예예술을 상징하는 기법이다. 금속공예에선 금속 표면에 무늬를 깊게 파낸 다음 가느다란 금실이나 은실을 메워 넣는 금(金) 입사(入絲), 은(銀) 입사 기법으로 나타난다. 도자공예에선 도자기 표면에 문양을 새기고 그 속에 검정·빨강·하양의 흙을 메운 뒤 구워 특유의 문양을 드러내는 상감기법으로 구현됐다. 고려의 나전칠기는 이같이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칠공예 기술에다 조개를 잘게 썰어 아름다운 문양을 새겨 넣는 정교한 나전 기술의 결합을 통해 탄생한 명품이다.

“(고려에서) 그릇에 옻칠하는 기술은 정교하지 못하지만, 나전 기술은 세밀하여 귀하다고 할 수 있다”(地少金銀 而多銅 器用漆作不甚工 而螺鈿之工 細密可貴)(『고려도경』(1123년) 권23 토산조).

고려에 온 송나라 사신 서긍은 위 기록과 같이 칠공예와 나전 기술을 분리해 평가했다. 실제로 고려는 왕실의 기물을 관장하던 관청 중상서(中尙署)에 나전장(螺鈿匠)과 칠장(漆匠)을 분리시켜 관리했다(『고려사』 권80 식화지). 서긍은 또한 고려에선 칠공예보다 나전 기술이 더 발달했다고 했다. 그의 지적은 사실 중국에 비해 화려하게 옻칠을 사용하지 않은 것을 지적한 데 불과하다. 실제로 그는 고려에서 옻칠공예가 성행한 사실을 같은 책 『고려도경』에 기록하고 있다. 즉 ‘쟁반과 소반은 모두 나무로 만들어 옻칠을 했으며’(『고려도경』 권33 궤식(饋食)조), ‘왕과 관료들이 사용한 붉은 칠을 한 소반(丹漆俎)을 사신에게도 사용했다’(권28 단칠(丹漆)조)고 했다. 당시 식생활 전반에 쟁반·소반 등 칠공예 제품이 널리 쓰였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나전국화문경함. [사진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원 왕실도 옻칠과 匠人 보내달라 요구
목재 제품에 옻칠을 하면 방수 효과와 함께 쉽게 부패되거나 썩는 것을 예방하고 그릇의 아름다운 모양을 유지할 수 있다. 그래서 옻칠공예는 목기(木器)에 주로 활용되었다. 이규보 역시 다음 기록과 같이 술병에 옻칠을 하여 사용했다.

“박으로 병을 만들어 술 담는 데 사용한다(自瓠就壺 貯酒是資). 목은 길고 배는 불룩하여, 막히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는다(頸長腹枵 不咽不歌). 그래서 내가 보배로 여겨, 옻칠을 하여 광채 나게 했다(我故寶之 漆以光之)”(『동국이상국집』 권19 잡저 칠호(漆壺)).

우리나라에서 옻칠 기술은 청동기 시대 이후 유물에서 칠 제품이 출토될 정도로 일찍부터 발달돼왔다. 신라 때는 옻칠 공예를 전담한 부서인 칠전(漆典)이 있었다. 또 그릇에 칠을 해 장식한다는 뜻으로 식기방(飾器房)이라 했다(『삼국사기』 권39 잡지). 앞서 언급했듯이 고려 때도 중앙관청에 칠장(漆匠)을 소속시켜 칠공예 제품을 생산하게 했을 정도로 옻칠공예가 성행했다. 전국에 닥나무(楮), 잣나무(栢), 배나무(梨), 대추나무(棗) 등과 함께 옻나무(漆)를 심게 해 옻을 계획적으로 생산했다(『고려사』 권79 식화지 명종 18년(1188) 3월조). 그래선지 일찍부터 옻칠의 품질과 제작 기술이 뛰어났다.

“묵구(墨狗) 등 7명이 원나라에 금칠(金漆)을 보내라는 황제의 명령서를 갖고 왔다. 국왕(*원종)은 ‘우리나라가 비축한 금칠은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할 때 모두 없어졌고, 생산지인 남쪽 섬은 요즘 역적(*삼별초 군대)이 왕래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틈을 타 생산해 보내겠으며, 우선 갖고 있는 열 항아리를 보냅니다. 옻칠의 액을 짜는 장인은 직접 생산지에서 징발하여 보내겠습니다’라고 보고했다”(『고려사』 권27 원종 12년(1271) 6월조).

원나라가 고려의 옻 품질이 뛰어나고 그것이 많이 생산된다는 사실을 알고 옻칠과 함께 장인을 함께 보내줄 것을 요구한 기록이다. 개경 환도 직후 옻칠이 많이 생산된 남쪽 섬 지역이 삼별초 군대에 점령되어 제대로 생산될 수 없었던 사정도 알려준다. 고려는 위 기록대로 삼별초 난이 진압된 2년 후인 1276년(충렬왕2) 원나라에 황칠(黃漆)을 공납했다.

원나라가 요구한 금칠은 황칠의 다른 이름이다. 원래 칠에는 옻칠과 황칠 두 가지가 있다. 옻칠은 옻나무에서 채취한 짙은 적갈색 진액이다. 지금도 많이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 옻은 황칠나무에서 주로 채취한 황금 색깔의 진액이다. 서긍도 당시 ‘나주지역에 황칠이 많이 생산되어 왕실에 공납되었다’라고 기록했다(『고려도경』 권23 토산조). 조선 후기에 이수광은 ‘고려의 황칠은 섬에서 생산되는데, 6월에 채취하였다’(『지봉유설』 권19)라고 전한다. 황칠은 부와 권력의 상징인 노란색을 띠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또한 금 색깔과 같다고 해서 금칠이라 불렀던 것이다. 두릅나무과에 속하는 황칠나무는 남해안과 일대 섬에서 자라는 우리나라 토종의 늘 푸른 넓은잎나무다. 금빛을 띠면서 나뭇결을 살려내는 화려한 맛이 있어 왕실 등에서 선호했다(박상진, 『역사가 새겨진 나무이야기』, 2004).

기병用 말 안장·언치도 나전으로 장식
서긍은 앞에서 본 것처럼 “고려의 나전 기술은 세밀하여 귀하다”고 극찬했다. 현재 남아 있는 고려 나전 제품은 모두 목재제품을 이용한 것인데, 서긍이 극찬한 나전은 다른 제품이었다. 즉 그는 ‘기병이 사용하는 안장과 언치(안장 깔개)는 매우 정교하며 나전으로 장식하였다(騎兵所乘鞍韉極精巧 螺鈿爲鞍)’(『고려도경』 권15 기병마(騎兵馬)조)라고 말해 말 안장에 새겨진 나전 기술을 높이 평가했다.

1080년(문종34) 7월 고려는 송나라에 나전으로 장식한 수레(螺鈿裝車) 1대를 조공했다(『고려사』 권9, 1243년(고종32). 무신정권의 권력자 최이는 왕실 사람과 재추(*고위관료)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커다란 그릇을 나전으로 장식했다고 한다(『고려사』 권129 최이 열전). 즉 나전 기술은 목재 제품뿐 아니라 가죽 수레와 그릇 등 다양한 제품에도 적용되었던 것이다. 나전은 선물용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예종 때 문신 문공인(文公仁·?∼1137)은 거란에 사신으로 가서 나전 그릇을 선물로 많이 주었는데, 이후 거란의 사신이 고려에 오면 항상 나전 그릇을 요구하는 폐단을 낳았다고 한다(『고려사』 권125 문공인 열전). 고려에서 나전 제품이 많이 유통되고 외국에까지 널리 이름을 떨쳤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나전 기술 역시 칠공예 기술과 함께 발달된 것이다.

나전칠기는 이같이 칠공예 기술과 나전 기술이 함께 발달해야 생산될 수 있다. 어느 한쪽 기술만 발달하면 명품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제작된 제품이 송·거란·원나라 등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던 것은 당시 공예 기술이 높은 수준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술은 다른 분야에도 영향을 끼쳐 상감청자·고려지(高麗紙)·대장경을 명품의 반열에 올려놓게 했다. 이 점에서 고려왕조는 진정한 문화·기술의 강국이었다. 이외에도 고려선(高麗船)·금속활자·불화(佛畵) 등 수준 높은 명품 문화재를 낳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