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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발심자경문 강의 - 자경문 [책한권 타이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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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문현토,해설포함

이 강의는

해인사에 주석하시는 宗眞스님께서,

통도사 3 행자 교육 < 불멸후 2535(서기 1991) 가을 >,

행자들을 대상으로 강의하셨고, 그것을

통도사 眞目스님이 비디오로 녹화⋅녹음했는데, 그것을,

해인사 常愚가 녹음한 것만을 DAT復音하고,

그것을 다시 일반 카세트에 復音하였고, 그것을

동학사 行吾 비구니가 그것을 모두 종이에 적었는데, 그것을,

해인사 강원에 圓昌외 지산⋅보인⋅혜종⋅동운⋅현묵스님이 셈틀에 옮겨 입력한 것을

7.해인율원 (효명,법천,지효,수경,화봉,수인,신묵)에서 감수.교정.교 열했읍니다.

 

 自警文

 

자경문에 들어가는데, 그렇게 하기전에 몇가지 말씀을 드리겠읍니다. 지금까지 자경문은 ‘야운’이라고 알아왔는데, 그 야운이라는 분이 대체 누구의 제자냐. 해서 두가지 주장이 있었읍니다.
대충 신라때 원효스님의 제자인, 금강산에 신선으로 있던 영랑선인이라고 하는 신선이 원효스님한테 계를 받아 가지고 호를 野雲이라 했다.
들로, 한가한 산중에 두둥실 뜨는 구름이라 이렇게 이름을 붙였다 이런 글이 나오는데 그건 잘못된 겁니다. 왜냐하면, 이 글속에는 자경문 안에는 원나라 때 임제종의 蒙山德異라고 하는 스님이 계시는데 몽산덕이 스님의 법문이 실려 있는 것이 확인이 됩니다. 제가 그 뒤에 인용 문헌 조사하는 데도 그것을 밝혀 놓았읍니다. 이 스님은 생존 연대가 확실하진 않지만 적어도 1300년대에 활약하던 스님입니다. 원효스님은 617년에 태어나서 686년에 돌아가셨는데, 70년을 살다 돌아가셨거든요. 그러면 몽산스님은 1300년대니까 얼마나 후기입니까. 그 글이 분명하게 이 자경문 속에 들어 있읍니다.
심지어는 제 5번째. 除三便外에 不許睡眠이어다. 하는 것은 글자 한자 안 고치고 十門의 제목으로 써 놓았단 말이죠. 그래서 영랑선인이라고 하는 것은 안 맞고, 자, 그러면 영랑스님이다 하는 그것은 안 맞고, 두번째는 나옹혜근, 왕사를 지낸 나옹혜근이라고 하는 스님의 제자다.
그랬는데 나옹스님은 서기로 1320년에 태어나서 1376년에 입적을 하셨는데 그 스님의 제자라고 할 것 같으면, 이 내용은 여기에 나오는 글은 훨씬 후기에써져야 되쟎아요. 그런데 나옹스님 제자 가운데 야운이란 이름을 가진 스님이 있기는 있었는데 그 스님하고 같이 교류를 맺었던 분이 누군가 하면 함허 기화라고 하는 스님인데, 그 스님은 서기로 1376년에 태어나서 1438년에 돌아가셨단 말씀이죠. 그러면, 15세기 초의 분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래서, 이 내용을 갖다가 이렇게 여러가지로 조사해 보니까 15세기의 문헌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단 말씀이죠. 그래서 나옹스님의 제자인 야운 覺友, 이 스님도 역시 아니더라. 그러면, 누구냐 원나라때 역시 임제종의 鐵山紹瓊이라고 하는 도인이 있었읍니다. 철산소경이라고 하는 스님이 있었는데 이 스님도 전기가 분명하지를 않습니다. 다만 그 스님 법문에 “⋯⋯13살에 불교가 있다 하는 걸 알고 18살에 출가를 하고 22살에 스님이 되었다⋯⋯” 하는 것은 스님 법문에 실려 있읍니다. 그런데 이 스님이 우리나라에 온 적이 있읍니다. 그 때가 바로 1300년대 입니다.
그래 가지고 그 때 권단이라고 하는사람이 성은 권씨고 이름은 밝은 단자(㫜)인데 날일변에다가 아침단한 권단이라고 하는 사람이 태어난 데는 모르는데 세상 떠나기를 1311년에 세상을 떠났읍니다. 철산소경 스님이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오니까, 그 온 날자도 있읍니다 만은 언제 왔는가 하면은, 제가 조사를 해봤는데 금방 그 시기를 찾을 수가 없네요.여하튼 1300년 초기에 왔읍니다. 그래가지고 3년을 있다가 중국으로 돌아갔는데, 그 때 임금이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이 스님을 맞이 했고, 궁중에 초청을 해서 선법문을 듣고, 또 보살계도 받고 그렇게 하고 우리나라 금강산도 구경을 하시고 그 다음에 대장경 한 질을 얻어서 중국(애양)산이라고 하는 산에다가 봉안을 하였다. 그런 기록이 나오는데, 그 때 철소경스님이 왔을때 이 권단이라고 하는 사람이 발심을 했읍니다. 아주 늦게 발심을 해가지고 자기 식구들 몰래 스님이 되어서 공부를 했는데 스님이 되고 난 다음에 호를 그러니까 법명이죠. 법명을 야운이라 했다. 그래요, 스님이 되고 나서 바로 오래지 않아서 늦게 출가를 했으니까, 7년 후에 세상을 떠났는데 떠난 시기는 1311년이라 했죠. 그것은 권단 묘지에 들어 있읍니다. 또, 고려사에도 그런 기사가 나오고요. 고려사에는 이렇게 설명해 놨읍니다.권단이라는 사람이 40년 동안 불교를 ‘惑信’이라고 했어요 혹신, 되게 불교를 좋아하고 불교를 믿었는데 일체 술도 안 먹고, 오신채도 안 먹고, 불교 공부를 열심히 했다. 때 마침 소경스님이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오니까 그만 발심을 해 가지고 아들⋅딸⋅그 다음에 가족들이 그렇게 만류를 하는데도 몰래 스님이 되었었다. 그때 이 사람은 여러가지 벼슬을 했던 유명한 사람이라요. 그러니까 그 묘지도 남아 있단 말씀이죠. 그것 하나 하고, 이 자경문 저 끝에 가면 속서가 나옵니다. 맨 마지막 귀절에 보면 말이죠. 속서가 나와요. 무엇이 나오는가 하면은 끝에 불교 말씀을 많이 인용하고 하다가 뭐라고 말씀했나 하면은 “古曰 道不遠人이라 人自遠矣라 하며 又云 我欲仁이면 斯仁이 至矣라 하시니 誠哉라 是言也여” 그랬거든요 그러면 고왈-인자원인 이것은 ‘중용’이라 하는 책에 나오는 글이고 ‘又云~ ~ 至矣라’ 하는 글은 논어에 나오는 글입니다. 그러니 결론 부분에 가가지고 이렇게 속서를 인용을 하고 그 다음에 “성재라 시언야여” 그랬읍니다. ‘참 좋구나 이 말이여’ 이렇게 결론을 내린 걸로 봐서, 이 자경문을 지은 사람은 권단, 곧 야운. 호는 없읍니다. 호는 스스로 몽암거사라 했어요. 거사로 있을때 몽암이라 했다.
여기에 대한 참고 자료는 한국 금석전문 下권하고 그 다음에 허흥식이라고 하는 사학자가 있는데 지금 정신문화연구원의 교수로 있읍니다. 12분이 85년에 “고도에 남긴 철산경의 행적” 하는 글을 한국학보 30⋅90에다 실었었는데 그 내용을 수정해 가지고 “고려 불교사의 연구”하는 책에는 1306년 “고려국 대장 이양기”라고 하는 글을 논문으로 발표한 적이 있읍니다. 그래가지고 저도 그 내용을 검토를 해 보니까 여러가지검토를 해 보고, 이 허교수는 자경문의 내용은 증거( )지 않았읍니다.
그냥 그런 사료만 가지고 자경문의 저자는 야운, 곧 권단이라고 하는 사람이다. 이걸 밝혔는데 제가 자경문 내용을 분석을 하고 거기에 들어 있는 서적을 조사를 해 보니까 그 허교수의 주장이 맞는데 출가한지 일곱해
곧 7년 밖에 안된 사람이 어떻게 이런 좋은 글을 남길수 있겠느냐 40년 동안 머리는 삭발은 안하고, 출가는 안했지만 불교 공부한 사람이니까 능히 그렇게 쓸 수도 있다 하는 것하고, 이 내용 가운데는 몽산덕이스님의 법문이 여러군데 인용된 것이 나옵니다. 그걸로 봐서 철산소경스님의 제자였던 몽암거사 야운이 맞다.
다른 책에는 그냥 自警文 이렇게 나왔는데 제가 만든 교재에는 자경序
그렇게 되어 있읍니다. 序라는 것은 문체의 하나입니다. 어떤 책에는
‘야운자경’ 이렇게 기록된 데도 있고 또 어떤 책에는 자경서 이렇게 기록된데도 있읍니다. 어제 철산소경 스님에 대해서 잠시 말씀을 했는데 우리나라에 오기는 1304년 7월달이라고 합니다. 7월에 왔고 햇수로 3년 있다가 1306년에 중으로 다시 돌아갔읍니다. 그리고 몽암도 야운, 속명이 권단이라고 하는 사람이 1308년 그러니까 소경스님이 중국으로 돌아간 2년 후에 ‘유정사기’라고 하는 글을 짓고 아마 그 무렵에 이 자경문도 쓰지 않았느냐 그렇게 여겨집니다. 그 밖에 다른 것은 그만 생략을 하겠읍니다. 제목을 우선 보겠읍니다.

「자경문」
그랬는데, 중국 운문종에 장로종색이라고 하는 이가 선원청규(禪苑淸
規)를 썼는데 그 속에 보면 ‘자경문’이라고 하는 글이 들어 있읍니다. 자경문 그러면 충감스님이라고 하는 수선사의 스님인데 그 스님이 철산소경스님께 요청을 해서 철산소경 스님이 우리나라를 오게 되었고 또 그때 충감스님이 선문청규다 그건 선원청규가 아니고 苑자를, 선원청규, 이렇게 동산 원자를 썼는데 거기에는 선문으로 되어 있읍니다. 선문청규 그렇게 되어있는데, 그건 표기를 잘못 해서 그랬는지 어쨌든지 간에 청규는 마찬가지구요. 이 선원청규 안에 장로종색스님이 쓴 자경문이라고 하는 글이 있읍니다.  神心洞照에는 “聖黙爲宗이요 旣啓三緘댄 宜遵四實이니라” 이렇게 시작을 해 가지고 “禍終滅頂하나니 何也오” 이렇게 시작해 가지고 끝나는 것?
내용은 간단한데 종색스님이 그 글을 가지고 스스로를 경책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또 아울러 후학들에게도 경책을 했구요.
그러면  자경문이라고 하는 것은 장로종색 스님의 자경문에서 그 이름을 따왔을 거다. 이렇게 짐작을 하구요. 그 다음에 내용이  十門으로 나누어 지는데, 보윤대사(普潤), 법운이 있읍니다.
중국의 경덕사라고 하는 절에 살았는데, 이 분은 1088년에 1158년, 이 1158년은 계초심학인문을 지은  보조국사가 태어나던 해입니다. 우연히 그렇게 돼요. 자 그건 그렇고,이 분이 지은 務學十門이라고 하는 글이 있읍니다. 열심히 학문을 해야 된다. 여기 學은 佛敎學을 말하지요. 불교학을 열심히 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이 훌륭하게 성공하는 데도 어려울 뿐더러 부처님의 은혜도 갚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교화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니 열심히 불교 공부를 해야 됩니다’ 하고 10장으로 나누어 써 놓은 글이 있읍니다. 그게 후대에 와서 치문경훈이라고 하는 책에도 수록이 되지만
아마도 몽암 야운이 1312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치문경훈은 1313년에 비로소 원나라에서 편집이 됩니다.
 그러면, 이 법운스님의 무학십문은 그 앞에 고려에 전래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어떤 데에 근거를 두느냐 하면은 이 법운스님이라고 하는 이가 ‘번역 명의집’이라고 하는 범어로 된 불교 용어를 중국말로 해석을 한 책이 있읍니다. 7책이나 되는데, 불교 용어 아는데는 상당히 귀중한 책이지요. 그 책이 고려에 들어온 것으로 봐서, 법운스님의 무학十門도 보조스님이 태어나기 전에 전래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몽암 야운도 그것을 참고로 해서 열장으로 나누면서 그 표현을 십문이라고 했다.
여기 뒤에 글이 나오지요. 그래서 뒤에 제가 이 자경문에 나오는 인용 문헌을 대충 밝혀 놓은게 있읍니다. 출판사에 사정이 있어 가지고 제가 알고 있는 내용도 다 자세하게 밝혀 놓진 못했지만 거의 인용 문헌이 드러나 있읍니다. 그걸 참고를 하시는데 여하튼 제목은 장로종색스님의 선원청규에 실려있는 ‘자경문’ 거기에서 이름을 딴 것 같고, 십문의 내용은 보윤대사 법운의 무학십문을 참고를 해서 쓴 것 같다. 여기에 어떻게 글을 쓴다고 하는 그런 내용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출가를 한 다음에 열심히 수도를 해야 되는데, 요음은 말세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게으르고 수도에 전념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이 글을 쓴다고 하는 취지는 들어있지 만은 어떤 문헌을 참고하고 어떤 이유에서, 이 글을 짓게 되었다 하는 것은 여기에 나와있지 않습니다. 대충 이 글을 언제 쓰고, 또 여기에 나오는 내용을 보니까 어떤 책을 참고로 해서 제목과 내용을 분류를 했을 것이다. 하는 것에 대한 설명을 해 드렸읍니다.
자 본문을 봅시다. 자경서하고 야운술 아까 말씀드린대로 ‘야운자경’이라고 기록된 데도 있고, 그냥 ‘자경서’라고 기록이 되어 있는데, 저는 이 교재를 만들면서 한국불교전서 6권에 보면은 이 글이 실려 있읍니다. 거기 것을 참고를 했읍니다. 그 이유는 왜냐하면 한국불교전서는, 여러가지 문헌을 모아가지고 서로 대조를 하면서 만든 책이기 때문에 그래도 가장 신빙성이 있고 또 꼭 한번은 이렇게 구할수 있는 데로 구해서 대조를 해 보니까 그 판본에는 상당수가 ‘자경서’라고 되어 있읍니다.
그래서, 저도 이렇게 자경서라고 제목을 붙였읍니다.

 主人公아 聽我言하라 幾人이 得道空門裏어늘 汝何長輪苦趣中고 汝自無始已來로 至于今生히 背覺合塵고 墮落愚癡하야 恒造衆惡而入三途之苦輪하며 不修諸善而沈四生之業海로다.

「主人公아 聽我言하라」
자신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어떤 연극이라든지 소설에 중심되는 인물을‘주인공’이라 이렇게 하는데 그건 불교에서 따간 말입니다. 이 말은 쓰기는 벌써 당나라 때부터 선사스님이 쓰기 시작했읍니다. 그리고 또 능엄경이라고 하는 경전에서 ‘주인’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거기에 公자는 안 붙이고, 주인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주인공이 어떻다 하는 그 표현도 불교에서 쓰던 말을 우리나라에 불교용어를 사회에서 쓰는 예가 참 많습니다. 그러니 “아무개야!” 하는 표현하고 마찬가지죠. 청아언하라. 내말을 자세히 들으라.

「幾人이 得道空門裏어늘」
몇 사람이나, 얼마인지 숫자를 확실하게 모른다 이 말씀입니다. 공문리어늘 도를 공문 속에서 깨달았거늘, 得자는 깨닫는다, 받는다, 깨닫는다 이렇게 해석을 해야 된다고 그랬죠.
공문은 어제도 잠시 설명 드렸는데 불교의 다른 표현입니다.불교안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도를 깨달아서 생사를 해탈했는지 알 수가 없는데

「汝何長輪苦趣中고」
너는 무엇때문에
길이 고취 가운데에서 윤은 輪廻. 윤회를 하는고. 윤회의 준말입니다. 字數를 맞추다 보니까 이렇게 되었읍니다. 그리고, 뒤에 제가 문헌 대조표에서 밝혀 놨읍니다 마는 ‘기인득도 동문리어늘’하는 글은 야운의 창작이 아니고 동산양개화상이라고 하는 조동종의 시조지요 그 스님의 편지에 나오는 글귀를 그대로 따다가 놓은 겁니다. 도인은 생사 해탈을 해서 무엇이든지 걸림이 없읍니다. 그런데, 너는 무엇 때문에, 무슨 이유에서 여기까지 자기 자신을 보고 하는 말입니다. 늦게 거의 말년에 노인이 되어가지고, 그것도 가족들 몰래 선흥사라고 하는 절에 가서 그 삭발하고 계를 받은 절도 나옵니다. 고려사에 ‘터닦을 선’字하고 일흥字,선흥사라고 하는 절에 가서 스님이 되었다. 그렇게 고려사에 기록이 되어 있는데 만년이란 말씀이죠. 자기 신세가 한심스러워 그래서 이렇게 적고 있읍니다. 너는 무엇 때문에 괴로움 속에서 이렇게 고통을 받고 있냐.

「如自無始已來로」
이제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네가 무시로부터 옴으로, 무시이래로

「至于今生히」
언제 우리의 생이 시작되었는지 모른단 말씀이죠. 금생에 이르기까지

「背覺合塵하고」
불교는 등지고 세속에
어울려서, 覺이라고 하는 것은 깨닫는다 하지만 불교를 말합니다. 도를
말하죠. 도는 등지고 세속에 어울려서

「墮落愚癡하야」
어리석은데 떨어져서, 墮 나락이나 마찬가집니다.

「恒造衆惡하야」
여러가지 악을
항상 지어서 중악을 불교에서는 8만4천가지 악한 것이다. 그러죠.

「而入三途之苦輪하며」
삼악도의 괴로움괴 로운 것이 항상 반복 된다.
이렇게 해서 고륜이라 했읍니다. 고륜, 괴로움이 많다고 할 때는 苦海, 바다해자를 쓰고, 그것이 반복되어 언제 끝날지 모른다. 끝나는 날은 바로 부처님이 되는 날이다. 그렇게 불교에서는 말씀하고있으니까, 괴로움이 항상 계속된다고 표현 할 때는 苦輪, 바퀴륜자를 씁니다. 삼도의 고륜에 들어가며,

「不修諸善」
모든 착한 것을 닦지 아니해서,
이 修자는 지을作자 하고 마찬가집니다. 衆惡의 반대가 諸善이죠. 모두제字나 뭇중字나 마찬가지죠. 그래 모든 선을 짓지 아니해서

「而沈四生之業海로다」
四生, 지구상의 모든 동물, 사람도 포함되죠.
사람을 위시해서 모든 동물을 태어나는 종류를 구분해 보니까 대충 네가지로되더라. 불교에서는 그렇게 분류합니다. 태로 나는것, 알로 나는것, 변화해서 나는것,그 다음에 물기운으로 나는것, 그래서, 胎卵濕化 그렇게 말씀하는데, 태어나는 종류를 분류하는 기준이죠. 사생의 업해에 빠짐이로다. 악을 지으면 삼악도에 들어가고, 악은 안 짓더라도 나쁜 짓은 안하더라도 좋은 일은 못하고, 그럭저럭 되게 모질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착하지도 못한 생활을 하게 되면 사생으로 또 돌아다니게 됩니다.

「身隨六賊故로」
몸이 육적을 따르는 까닭에, 색성향미촉법. 바깥 경계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면 ‘안이비설신의’ 하는 여섯 기관을 가지는데 뜻은 意라고 하는 것은 心의 작용이니까.
그만두고 眼耳鼻舌身까지를 오관(五官)이라 그러죠. 오관을 가지고 色聲香味觸 다섯가지 바깥 경계를 반연하게 되면 거기에서 여러가지 공덕을 밖으로 빼앗기게 된다. 그래서, 바깥경계, 곧, 對境을 대상을 오관의 대상을 좋은 공덕을 짓지 못하도록 만든다 하여 도둑놈에다 비유를 해서 六賊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곧 몸이 항상 밖으로 작용을 한다. 그래서, 身隨六賊이라 그럽니다. 몸이 육적을 따르기 때문에 항상 악취. 악취는 삼악도의 다른 표현입니다.

「或墮惡趣則」
혹은 악취에 떨어지면

「極辛極苦하고」
극히 괴롭고. 여기의 신자는
매울辛字가 아니고 괴로울신字 입니다. 그래 고통 받는 것을 辛苦한다 그렇게 하죠. 極자가 있으니까 이만저만 괴로움을 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아픈줄 모르고 태어납니다. 죽을 때도 숨 넘어가는 사람은 그 순간에 숨 넘어가기 전에 괴롭지, 괴로움을 알 수 있지. 숨이 넘어가는 그 순간은 괴로운지 어쩐지도 모른다. 그런데 뒤에다 나옵니다 만은, 나고 죽는 것이 이 세상에서 제일 괴로운 일이다. 그렇게 부처님은 말씀을 했읍니다. 그러니까 괴로움이 그 이상 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극신 거기다가 또 극고 그랬단 말씀이죠. 말로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프다. 그것은 몸에 관한 말씀이죠.

「心背一乘故로」
一乘은 두가지로 해석을 해야 되는데 하나는 불교, 이렇게 보고 하나는
일불승의 준말로 봐서, 법화경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一佛乘. 법화경
방편품에 나오는 말씀인데 시방국토중에, 우리 시방삼세 하는 시방입니다. 불토 부처님 국토 중에 唯有一乘法이요. 오직 一乘法만 있고 無二亦無三하니라. 둘도 없고 또한 셋도 없다. 이승도 없고 또한 삼승도 없다. 그런 말씀이 나오는데 일승이란 말씀이 거기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법화경을 중심으로 해서 종파를 세운 천태종에서는 일승불을 주장합니다. 모든 중생은 부처가 될 수 있는 자격이 구비되어 있기 때문에 다 성불할 수 있다고 하는 견지에서, 부처님의 교법은 오직 하나 뿐이다. 그렇게 보는 견해를 일승이라 하기도 하고 일불승이라 하기도 하고 그걸 줄여서 佛乘이라 하기도 합니다.
여기에서는 불교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자 몸이 육적을 따른다 하는 것은 항상 욕심을 부려가지고 쉬지 않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되고 죄를 지으니까 고통을 받는데 그 고통이 한없이 크다 그랬고, 마음에 불교를 믿지 않고 항상 배반했기 때문에, 불교를 모르고, 또 불교를 안다 하더라고 열심히 수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或生人道하면」
혹은 사람으로 태어나면

「佛前佛後로다」
부처님 전에 내가 태어났다가 부처님을 내가
못 뵙는다던지 또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셔 가지고 모든 중생 많은 사람들을 교화를 하시고 이미 열반에 드신후 곧 우리처럼 말씀입니다. 2536년후에 우리는 태어나서 이 통도사라는 강당에서 지금 자경문을 공부하고 있으니 바로 佛後거든요. 그래 佛前佛後는 聞法八難이라고 해서 부처님을 직접 뵙고 가르침을 받지 못하게 되는 어려움 가운데 하나를 불전불후라 그럽니다. 그럼 부처님이 이 세상에 안 오실 때 태어났어도 부처님 말씀을 못 듣게되고,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에 태어나도 부처님을 직접 뵙고 가르침을받지 못하게된단 말씀이죠. 그런데

「今亦幸得人身이나」
지금 다행하게
사람 몸을 받았지만은

「正是佛後末世로다」
틀림없이. 정시. 시字는
어조사입니다. 틀림없이 부처님 후인 말세로다. 말세는 다른 표현으로는 末法이라 그러죠. 말법 시대에 우리가 태어났다. 그러니

「嗚呼痛哉라」
참 슬프다. 슬프고 아프다 그 말이죠.
오호는 슬프다. 우리가 되게 놀란다던지 또 갑자기 어떤 슬픈 일을 당했을 때 ‘아이구머니’ 하던지 ‘아이구’ 하던지 그게 ‘오호’ 입니다. 통재는 그냥 가슴을 치면서 애통해 하는 모습입니다. 슬프고 아프다

「是誰過歟아」
그러면 이것이 누구의 허물이냐. 누구 때문에 부처님 당시에 태어나지 못하고 이렇게 말법 시대에 태어났느냐. 다른 사람의 잘못이 아니죠. 곧 우리 각자의 잘못이란 말씀이죠. 열심히 수도를 했고 복을 많이 지었을 것 같으면 부처님 당시에 태어나 가지고 부처님을 뵙고   수도를 해 가지고 생사 해탈을 했을텐데, 그 때에는 딴전을 피고 있다가 겨우겨우 인제 이 어지러운 세상에 태어나 가지고 어렵게 어렵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게 됐으니, 그 원인은 다른데 있는게 아니고 곧 우리 각자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雖然이나」
그렇지만

「汝能反省하야」
네가 능히 반성하야

「割愛出家하며」
애정을 다 끊어버리고 출가를 하며,

「受持應器하고」
응기는, 응량기의 준말이니까 鉢盂입니다. 발우를 받아가지고

「着大法服하야」
대자는 좋다는 뜻이고 법복은 가사를 말합니다. 대법복을 입어서

「履出塵之逕路하고」
출진은, 진은 塵로를 가리킵니다. 또 천수경에는 洗滌塵勞. 塵勞라고 그랬죠. 또 다른 표현으로는 俗塵 그럽니다.속진이나 진로나 그 다음에 진세, 이 세상은 마치 하찮은 티끌과 마찬가지다. 그래 이 세상을 진세라 그래요. 진세나 진로나 그 다음에 속진이나, ‘出’字는 벗어난다. 뛰어넘는다는 말씀이죠. 곧 세상으로부터 멀리 벗어나는 것을 출진이라 그럽니다. 세상을 뛰어 벗어나는 지름길. 경로는 지름길. 돌아서 가는 길이 아니고 곧게 바로가는 길을 밟으며, 이 글도 역시 앞에 ‘기인득도 공문리의’조동종의 始祖인 동산 양개화상의 말씀이라 했는데 이 글도 동산양개화상의 규계라고 하는, 뒤에 나와 있읍니다 만은 동산양개. 당나라때 스님인데 이 스님의 규계라고 하는 이 글에 나오는 것을 그대로 옮겨 놓았읍니다.
그러고 보면 몽암야운이 공부를 하던 시기에는 아마도 동산양개화상의 어록이 고려에 들어와 있었던 모양입니다. 지금은 남아 있는게 없는데. 왜냐하면 이 글이 글자 하나 안 바뀌고 그게 그대로 나온단 말씀이죠. 그러니까 그때는 지금보다도 상당히 책이 많이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수입했던것을 짐작 할 수가 있어요.
近代 우리나라에서는 겨우 일본 사람들이 대정때 만든 신수대장경이라고 하는데 실린 동산양개화상 어록 밖에 볼 수가 없읍니다. 어쨌건 이 글귀는 동산 양개화상의 規誡에서 따온 글이요 내용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벗어나는지름길을 택하고, 리字는 밟는다는게 그 길을 따라 간단  말씀이죠.둘러가는 것이 아니고, 그럼 왜 이런 표현을 썼느냐. 조동종도 역시 선종입니다. 선종에서는 생사 해탈을 하는 지름길을 선을 닦아야만 곧 참선을 해야만 구할 수 있다.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썼읍니다.

「學無漏之妙法하면」
샘이 없는 묘한 법을
배우면 무루지묘법은 바로 불법의 다른 표현입니다. 루라고 하는 것은 번뇌의 다른 표현인데, 번뇌가 없는 묘한법. 그러니까 불교의 다른 표현이다.
불교는 또 달리 불법이라 하기도 하죠. 불법을 배우면

「如龍得水요 似虎靠山이라」
용이 물을 얻은것과 같고 범이 산을 의지한
것과 같다. 그러니까 마음대로 할 수 있다 하는 표현입니다.마음대로 할 수 있다. 자기 뜻대로 된다. 그렇잖아요. 용은 물에 산다고 그랬는데 용이 물을 만났고, 범은 산에 사는데 범이 산속에 있어야 제대로 활동을 할수 있고, 용은 물을 만나야 되듯이 모든 것을 뜻대로 자유롭게 할 수 있다 하는 표현입니다. 그러하니

「其殊妙之理는」
그 수묘한 이치는 수자는 여기는 매우 또 크게의 뜻이예요. 수묘한 이치는

「不可勝言이니라」
다 말하지 못한다. 가히 말하지 못함이니라
글로는 불교를 공부 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적을 수가 없는 것이다.말로 표현을 다 못하겠다. 참 좋다 이거겠죠. 몽암 야운이 40년 동안 술도 안마시고 고기도 안먹고 그 다음에 파,마늘도 안먹고 열심히 불교 공부를 했었다. 그런데 혼자 그렇게 공부를 하다가 철산소경이라고 하는 임제종의 도인을 만나고 보니 내가 지금까지 불교 공부한 것은 잘못 되었구나. 그만 지금 늦었지만은 출가를 해야 되겠다하고 그것도 아주 오래에 출가를 하고보니까
아마 이 세상을 새로 태어나는 기분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적고 있죠.

「人有古今이언정」
그런데 사람은 고금이 있을지언정 그렇잖아요.
옛 사람도 있고 지금 현재에 사는 사람도 있고, 시간이 옛과 지금이 나누어 지지만

「法無가 遐邇하며」
불교는 멀고 가까움이 없으며, 부처님 당시 때
불교가 다르고 오늘날  불교가 다르고 그렇지는 않단 말씀이죠.

「人有愚智언정」
이것은 시간에 따라서 불교가 변하지 않는다.
진리라는 것은 항상하다는 말씀이고, 앞 귀절은 뒤에는 인유우지언정 사람은 어리석고 지혜 있는 이가 있을 지언정

「道無盛衰니라」
그 도는 불교를 가르키지요. 도는 왕성하고 발전하고 또 불교가 왕성하게 발전을 하고 쇠퇴하는 것이 없나니. 그렇게 보이는 것은 표면적인 것일 뿐이다.

「雖在佛時나 不順佛敎하면」
비록 부처님 당시에 있으나
부처님을 만나 뵙게된다 그 말씀이죠. 수재불시니까 부처님 당시에 태어나서 산다 이거죠. 불순불교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지 아니하면, 따르지 아니하면, 배우지 않는단 말씀이죠. 부처님 당시라고 해서 다 불교를 믿은건 아니죠.

「何益이며」
무엇이 이로울것이며

「縱直末世나」
비록, 가령, 앞에 발심에는 設無道行하는 설자가 나왔죠.
그 다음에 만약若자도 초심에는 나왔고 만약若자나 만일 設자나 비록縱자나 같은 의미를 가진 글자고, 그 다음에 儻, 당유쟁자어든 하는 당자도 의미는 같죠. 비록 말세를 만났다 하더라도

「奉行佛敎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봉행하면

「何傷이리요」
무엇이 잘못되리요 傷자는 나쁘게 된다. 손해나게 된다. 그 다음에는 여기에 대한 자기 주장이 부처님 말씀에도 있다 하는 내용을 인증하는데 유교경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故로 世尊이 云」
세존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我如良醫하야」
나는 훌륭한 의사와 같아서

「知病設藥하노니 服與不服은 非醫咎也라」
환자의 병을 진단하여, ‘知’字는 진단한다는
말씀입니다. 진단하여 약을 지어 주노니 설자는 약을 짓는단 말씀입니다.지어주거든 그 약을 먹고 안먹는 것은 이건 옷 복자가 아니고 먹을 복자입니다. 의사의 허물이 아니며

「又如善導하야」
또 좋은 길잡이와 같아서, 여기의 導자는 요즈음
가이드라고 있죠. 여행사의 가이드guide, 그거하고 같애요. 그러니까 우리 말로는 길잡이지요. 선도니까 아주 솜씨가 있는 가이드란 말씀이죠. 좋은 길잡이와 같애서,

「導人善道호대」
사람을 좋은 길로 인도호대

「聞而不行은」
듣고도 가지 않는것은, 行은 갈행자입니다.
가지 않는다. 이리로 가면 좋은 경치를 볼 수 있고 고생도 안하고 길도 좋다. 이렇게 가르쳐 주지만 부득 부득 그런 설명을 듣고도 가지 않는 것은

「非導過也니라」
길잡이의 허물이 아님이니라.

「自利利人에 法皆具足하니」
자리이타와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를 이롭게 하고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는 법이 다 구족하니, 곧 상구보리하고 하화중생하는 모든 내용이 부처님 경전 속에는 다 들어 있다. 구족이라는 것이 남김없이 갖추어졌다는 의미니까요.

「若我久住라도」
만약 내가
이 我는 세존을 지칭하지요. “만약 내가 오래 이 세상에 살아 있다 하더라도”

「更無所益이니라」
더 이상 이익될 것이 없음이니라.

「自今而後로」
지금부터, 이 뒤로

「我諸弟子가」
나의 모든 제자가

「展轉」
‘점점’ 하는
표현하고 마찬가지고 반복해서 하는 뜻입니다. ‘펼 전’字 ‘구를 전’字잖아요.펴고 구른다 자꾸자꾸 그렇게 반복한다니까 반복해서 하는 의미도 되고 점점,더욱더욱, 또 차차 이런 의미가 들어 있읍니다. 전전히 ‘之’字는 부처님의 법을 가리킵니다.

「行之則」
그것을 실행에 옮기면

「如來法身이」
부처님의 법신이

「常住而不滅也라 하시니」
항상 머물러서 없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말씀을 했으니

「若知如是理則하면」
만약, 이와 같은 이치를 알면

「但恨自不修道언정」
다만, 스스로가 자신이 도닦지 않는 것을 한탄 할 지언정

「何患乎末世야리요」
어찌 말세를 근심하리요. 말세는
저 앞에 종치말세에 나왔죠. 이미 또 불후말세도 나왔어요. 그러니

「伏望하노니」
엎드릴복字 윗 어른의 처분 바라는 것을 伏望
그렇게 하고 다른 사람에게 겸손을 표하기 위해서 이런 표현을 쓰는데 이 글은 몽암 야운의 글이 아니고, 중국 선종 가운데 위앙종이라는 종파가 있는데 그 위앙종의 始祖인 위산대원이라고 하는 스님의 법문을 모아 놓은 것이 警策이라고 하는 글이 있는데 거기에 나오는 글을 그대로 인용해 왔읍니다. 엎드려 바라노니

「汝須興決烈之志하며」
너는 반드시 결렬한 뜻을 일으키며
결렬이라 결렬. 그냥 보통 생각이 아니고 아주 대단한 각오를 가지고 하는 것을 결렬지지라 그럽니다. 결렬한 뜻을 내며

「開特達之懷하야」
특달한 마음을 내어서

「盡捨諸緣하며」
개특달지회까지가
위산경책에 나오는 글이고 진사제연하며

「除去顚倒하고」
모든 인연을 다盡자 다皆자하고 같습니다. 이것은 다할진자가 아니고
무엇 무엇에 진력한다고 하는 다할 진자가 아니고 다 진자입니다. 모두 모든 인연. 여러가지 조건을 가리키죠. 특히 수도하는데 나쁜 조건 수도하는데 방해가 되는 여러가지 조건을 諸緣이라 이렇게 표현을 했읍니다.
제거전도하며, 잘못된 생각 遠離顚倒夢想 하는 전도입니다. 반야심경에는 전도 몽상 그랬죠. 이 세상의 이치를 마치 사람이 거꾸로 보는 것하고 마찬가지다. 서서 물건을 보면 바로 보이는데 우리가 머리를 구부려 가지고 반대로 거꾸로 볼 것 같으면 반대로 보이잖아요. 그러니까 세상 이치를 바로 보지 못하고 반대로 보는 것을 전도라 그래요. 앞뒤가 바뀌었다.
그 말씀이죠.그러니까 이 세상을 올바르게 보지 못하는 모든 견해를 잘못된 견해를 제거니까 다 없애버리고 여기에 나오는 내용도 야운의 창작이 아니고 어제 말씀드렸죠. 몽산덕이라고 하는, 원나라때 임제종스님이 있는데 그 스님의 법문에서 따온 글입니다.  뒤에 대조해 놓은 대조표가 있으니까 참고로 하시고

「眞實爲生死大事하야」
진실하게 거짓이 아닌
참으로 나고 죽음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곧, 생사를 벗어나서 대자유자재한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곧, 진실하게 생사대사.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일은 나고 죽음 이상 가는 일이 없다 해서 불교에서는 나고 죽음이 가장 큰 일이라 해서 ‘생사대사’하기도 하고, 영가현각 스님은 生死事大. 그렇게 말씀을 했읍니다. 無常이 迅束하고 生死事大라.
무상, 세월은 한없이 빠르고 나고 죽는일이 ‘생사사대’ 이렇게 표현했읍니다. 마찬가지죠. 세월은 총알같이 빠르고 나고 죽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일이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생사대사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런겁니다. 우리는 모르니까 그저 이럭저럭 살지만은 정말 나고 죽음에 대해 깊이 느낀 사람은 태어났다가 생을 마치는 죽는 그 일보다 더 큰 일은 없다. 진실하게 생사대사를 해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爲生死大事라는 말은 곧 ‘해탈을 하기 위해서’란 뜻이죠.

「於祖師公案上에」
조사의 공안. 다른 표현으로는 話頭라 그러죠.
조사선을 깨달은 분을 조사라 그랬고 공안은 그분들의 한 말씀은 관청의 공문와 같아서 누구든지 바꿀 수 없는 기준이 되며 만고에 변할 수 없는 내용이다. 그래서 공안이라. 공안이라 하는것은 公文하고 같은 뜻이예요. 공문은 이리저리 마음대로 바꿀수가 없읍니다. 그렇듯이 어떤 기준이 되며 그것이 곧 법이 된다해서 公案이라 하기도 하고 그걸 바꾸어서 話頭라 하기도 하고 또 다른 말로는 古則이라 하기도 하고
 화두는 말머리가 아닙니다.말이라는 뜻이죠. 頭자는 어조사입니다. 또 話則. 이렇게 여러가지로 씁니다. 거듭 말씀드리면 조사선을 깨달은 도인 스님들이 한 말씀은 관공서의 공문서와 같아서 누구도 바꿀 수 없을 뿐더러 그 말씀은 우리가 공부하는데 기준이 되며 법이 된다해서 공문이라 이름을 붙였는데, 다른 표현으로는 古則,話頭, 話則 이렇게 표현한다. 그러면 여기서 어조사공안상에는 쉬운표현으로 하면 조사의 화두에 그 말입니다. ‘上’字는 별 뜻이 없어요.

「宜善參究하야」
마땅히 잘 선자의 선지의 선지하고 같습니다. 의선의 선은 마땅히
그러니까 뭐하고 같겠어요.필수칙이목하는 필수하고 같죠. 반드시 잘 참구는 공부하고 같습니다. 실참구에서 나온 말씀인데 진실하게 참구를 한다 하는 말씀으로 實參實究라 하는 뜻인데 이 구라는게 바로 공부의 뜻
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말로하면 공부다. 마땅히 잘 공부를 해서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화두를 든다’ 그러죠. 화두를 든다는 말이 화두를 공부한다. 공부라고 하니까 뭐 다른 사람한테 무엇을 배운다는 뜻이 아닙니다.그러면 다른 말씀으로는 ‘수행’ 이렇게 되죠. 공부⋅수행⋅참구, 같은 내용이죠. 이건 선종에서만 쓰는 용어다.

「以大悟로 爲則이언정」
크게 깨달음으로 법칙을 삼을 지언정. 깨달아야만 그것으로 끝난다. 깨닫는 것이 바로 기준이 된다. 이 때는 ‘칙’이라고 읽어야 됩니다. ‘즉’이 아니고

「切莫自輕而退屈이니다」
간절히 자기 스스로를 업신 여겨서 輕자는 업신여길 경자
입니다. 업신여겨서. 나는 그럴 자격이 없다고 해서 포기 하는걸 ‘자경,이라그래요. 퇴굴. 물러난다. 물러가지 말지어다.

「惟斯末運에」
오직 斯자는
어조사입니다. ‘이’라고 새기지 마십시요. 오직 운은 ‘운 운’字인데, 앞에 나오는 ‘말세’라는 표현 또, 뒤에 나오는데 말법(末法). 말법이나 말세나 같은 표현입니다. 어떤 때에 일이 잘되고 못되는 것을 時運이 좋다
좋다 나쁘다 그럽니다. 그럼 여기의 말운의 운도 시운하고 같은 말입니다.
그래서, 운 ‘운’ 그렇게 했어요. 저 사람 운이 있다, 없다 그러잖아요. 그러면 나라가 잘되고 못되는건 국운이 좋다 나쁘다 그렇게 말하잖아요. 그렇듯이 여기 나오는 말운은 지금 우리가 말세에 살고 있는데 여러가지가 어지러우니까 그래서, 말세의 운. 제일 끝의 운이다. 그래서, 말세라고 안하고 말운이라 했고 지금 말세라는 말을 벌써 세번이나 반복했으니까 글 쓰는 데는 별로 재미가 없으므로 글자를 바꾸어서 말운이라 그렇게 썼죠. 오직 말세에

「去聖時遙하야」
설명을 잘 들으십시요. 갈거자가 아닙니다. 갈거자가 아니고 떨어질去자
입니다. 떨어질거. 높은데에서 밑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공간이나 시간적으로 서로 벌어지는것. 그걸 떨어진다고 그러죠. ‘고향을 떨어져서’ 그렇게 하죠. 그래서, 떨어질거자 인데 한문 글자로는 무슨 글자하고 같은가 하면 떨어질격. 벌어질격(隔). 이 글자 하고 같은 의미입니다. 去자 하나에 간다는 의미는 전혀 없읍니다. 그래서, 이걸 격한다 그러는데 첫째는 시간적으로, 둘째는 시간의 반대는 공간이죠. 공간적으로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去라 그럽니다.간다고 하면 아주 잘못 해석한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석해야 되느냐. 여기에 나오는 聖은 서가모니 부처님을 가리킵니다. 서가모니 부처님은 2536년 전에 열반에 드셨으니까 그 이전이라 하더라도 지금 우리 하고는 얼마나 시간적으로 오래 흘렀어요. 그러니까 바로 부처님하고 우리하고는 많이 시간이 경과가 되었다. 하는 표현으로 성인과, 부처님과 나와 떨어진 시간이 遙字는 멀요字인데 오랠久자하고 같이 보면 되죠. 오래 되어서 그렇잖아요.
지금 佛紀가 2536년. 그것은 중국에서 종래에 쓰던 불기로 치면 지금 3000년이 넘었단 말씀이죠. 그런데 제가 그 시기는 확실하게 모르겠는데 여하튼 60년대에 여러나라의 스님들이 모여서 불기가 각각 다르니 곤란하다. 기준을 하나 만들자 해서 가장 그래도 신빙성이 있는 아쇼카왕의 석주에 나오는 내용을 참조를 하고 이렇게 해서 2536년이 그래도 가장 근사치다. 이렇게 해서 우리나라도 거기에 따라 불기를 2536년으로 쓰게 됐읍니다. 2536년이면 얼마나 오랜 시간입니까?
그러니까 遙지요. 이건 멀요字라고 하지 말고 오랠요.
우리하고 부처님하고 우리는 시간적으로 얼마나 후대에 태어났느냐. 그래서,부처님과 떨어진 때가 멀어서

「魔强法弱하고」
그러하니 마는
강하고 불법은 약해지고. 자연히 그렇단 말씀이죠. 불교를 훼방하는 마구니는 강하게 되고 우리 불교는 점점 약해져서

「人多邪侈하니」
사람은, 邪는 삿되고 侈는 사치한다. 사치할 때 사字는 호사스러울사(奢)字인데 그것은 다릅니다. 邪는 삿되단 말이고 侈는 사치한다. 글자가 달라요. 그 치라는건 꾸미기를 좋아한다. 사치한다 그러잖아요.맵시를 내는것. 그러니까, 사람은 삿되고 맵시를 내고, 그러니까 수도하는 데는 전념을 안하고 괜히 엉뚱한 짓만 한다는 뜻이죠. 사치하는 이가 많으니

「成人者는 少하고」
사람을 성공시켜 주는 이는 적고

「敗人者多하며」
사람을 망가뜨리는 사람. 敗, 사람을 파괴시키는 사람은 많으며

「智慧者寡하고」
지혜있는이는 적고,

「愚癡者衆하야」
어리석은 사람은 또 많아서

「自不修道하고」
스스로 도를 닦지 아니하고,

「亦惱他人하나니」
또한 다른 사람을 어지럽게 만들어 주나니,
다른 사람을 어지럽게 만들어 버리나니, 부처님 법문에 出家惱他人하면, 출가해서 다른 사람을 惱자는 괴롭게 한단 말씀입니다.
자기가 잘못하는 건 그만이지만 남까지 공부를 못하도록 애를 먹인다는 말씀입니다. 뇌타인하면 不名爲門이니라. 스님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게 율장에는 말씀을 하고 있읍니다.여기 나오는 내용이 바로 저 내용하고 같습니다.
출가뇌타인하면, 출가해서 다른 사람을 못살게 한단 말씀이죠. 괴롭게 만들어버려. 그러면 불명위사문.스님이라고 할 수가 없다. 항상 저 말씀을 기억하시고 여기나오는 자불수도하고 역뇌타인. 저 자신이 수도하지 않고 다른 사람도 수도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을 역뇌타인이라 그런단 말씀이죠.
때문에 율장에서는 소임 보는 사람 흉을 절대로 보지 말라. 또 한가지 소임 보는 사람을 귀찮게 하거나 고통을 주어서는 안된다. 그런 말씀이 나옵니다. 제 자신이 수도하지 아니하고 또한 다른 사람까지도 괴롭게 하나니

「凡有障道之緣은」
무릇 도를 장애하는
인연은 이 緣이라 하는 건 조건이다. 또 ‘與件’이라 그러죠.

「言之不盡이라」
그 之字는 장도지연을 거듭 가리키는 대명사
입니다. 그것을 말하려 하여도 부진. 다하지 못한다. 다 말할 수 없다하는 것을 이렇게 표현했읍니다.

「恐汝錯路故로」
너 자신이 길을
잘못들까 염려하는 까닭에 공자 염려할 공字입니다. 또 아마 공으로 해석해도 됩니다. 네가 길을 잘못 들까 염려하는 까닭에.

「我以管見으로」
내가 좁은 소견으로 관견은 좁은소견 자기의 견해를 겸손하게 표현하는
말입니다. 관견으로

「撰成十門하야」
열가지 문을 찬성하야. 지을찬字.
원래의 撰은 창작을 말합니다. 창작을 말하는데 표현상 이렇게 썼을 뿐입니다.여기에는 인용문이 지금 지적한 것만해도 여러 귀절이 있지요. 짓는다 이 말씀입니다. 지어서

「令汝警策하노니」
너로 하여금 경책케 하노니
경은 경계란 말씀이고 책은 채짹질 한다는 뜻입니다. 곧 鞭撻한다는 의미예요. 경계하여 편달한다. 그것을 선문에서는 ‘경책’이라고 씁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잘못했을때 그것을 꾸짖고 잘 타일러서 다시는 그렇게하지 않도록 하는것을 선문에서 경책한다. 그렇게 가르치죠. 요즈음 스님네가 여러분을 지도할 때 경책이란 말씀을 들었을 겁니다. 너로 하여금 경책케 하노니.

「汝須信持하야」
너는 반드시 믿어 그대로 지켜서
持자는 지킨다. 受持身是光明憧하는 그 持자 하고 같습니다. 너는 반드시 확실하게 믿어 그대로 지켜서

「無一可違를」
一자니까 하나도.
다른 표현으로 하면 조금도. 또 그것을 강조하면 ‘절대로’ 하는게 되죠. 가히 어김없기를

「至禱至禱하노라」
지극히 바라고 이것은
‘바랄 도’字 입니다. 지극히 바라고 지극히 바라노라.

「頌曰」
앞에 나오는 글을 경전에서는 長行이라 합니다. ‘긴 장’字 하고 줄行. 이건 행이라고 읽으면 안됩니다. 항이라고 읽어요. 줄이라고 할때 한줄 두줄 세줄 이렇게 쓸 때는 음을 항이라고 읽습니다. 그래 행렬안하고 ‘항렬’ 그러죠. 항렬이 높다 낮다. 가정에서 서열을 따질 때 ‘항렬’ 그죠. 항렬이 어떻게 됩니까? 그래서 줄로 쓸 때는 ‘항’이라 읽어서 ‘긴 줄’ 그러니까 우리말로 하면 산문. 산문은 이 앞에까지는 지도지도까지는산문이죠. 그걸 경전에서는 長行(散文)이라  씁니다.
그 다음에 그 산문의 내용을 간추려 가지고 거기에 나오는 요점 만을 싯귀로  운문으로 나타낸 것을 뭐라 하는가 하면 경전에서는 重頌 그럽니다.
우리가 重復이라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이 때는 거듭중자입니다. 송이라고 하는 것은 싯귀다 그 말씀이죠. 해서 중송이라 하는데 그것이 바로 韻文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송은 중송을 줄여서 그냥 송왈 그랬읍니다. 그러니까 내용을 보면은 앞에 나오는 뜻을 간추려서 요점만 말씀 해 놨죠.

「愚心不學增憍慢이요」
어리석은 마음으로 배우지 아니하면.
‘學’字 밑에는 佛敎가 있을걸 싯귀니까 줄였읍니다. 불교를 배우지
아니하는 것은 교만만 더하고.

「癡意無修長我人이로다」
어리석은 뜻으로
수도를 하지 않을것 같으면 아상과 인상만 기름이로다. ‘기를장’字입니다. ‘길장’字가 아니고 ‘기를장’字. 我는 나라고 하는 잘못된 번뇌. 人은 남이라고 하는 너는 나하고 상대가 되는, 남이라고 하는, 잘못된 번뇌를 人이라 그럽니다.
그걸 불교에서는 ‘人相’ 그러죠. 어리석은 뜻으로 닦지 아니하면 아상과 인상만 키움이로다.

「空腹高心은 如餓虎요」
빈 배에 공부한 것이
없다는 표현입니다. 빈 배에 마음만 높은 것은 여아호요. 마치 주린 호랑이와 같고. 배가 되게 고픈 호랑이는 먹을 것만 보면 달려들어서 잡아 먹으니까 그렇게 무섭게 된다. 비유의 말씀입니다.

「無知放逸은 似顚猿이로다」
앎이 없이 놀기만 하는 것은 방일. 해태의 다른 표현이라고 했죠. 방일이나 해태가 번뇌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무지방일이니, 공부를 안하고 놀기만 해 가지고 방일이라는 번뇌만 자꾸 더한단 말씀이죠. 그러한 것은 미친 원숭이와 마찬가지로다. 이 전(顚)은 미쳤다는 말이죠. 미친 원숭이와 마찬가지다.
그러하니, 여기 이제 4귀절은 수도를 안해서 결과적으로 자기에게는 아는 것이 없다 하는 뜻이요. 그러니 자연히

「邪言魔語는 肯受聽하고」
삿된 말과 마구니의 말. 불교하고는 정 반대의 내용은 그런 말씀이죠.
긍수청. 즐겨 받아 듣고. 불교의 말씀을 하면 싫어하고 반대로 불교 아닌 곧, 자기에게는 아주 비상과 같은 나쁜 말은 잘 받아 듣고

「聖敎賢章은 故不聞하나니」
성인의 가르침과 이것은 경율론 삼장을 가리키고
현장은 조사스님네의 법문을 가리킵니다. 또 어록이라고 그러죠. 고불문. 일부러. ‘故’字는 고의로 들으려고 하지 아니함이로다. 안 들으려 한다. 그렇게 해석을 해야죠. 성인의 가르침과 현인의 글을 일부러 들으려고 하지 않나니

「善道에 無因이어니 誰汝度리요」
선도 귿 불교를 가리킵니다.
불교에 인연이 없거니. 불교를 공부할 수 있는 인연. 조건이란 말씀이죠. 조건을  만들어 놓지 아니 했거니 수여도리요. 누가 너를 제도하리요.
부처님의 중생을 제도 한다고 하시지만은 중생이 공부를 안할 것 같으면 부처님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단 말씀이죠. 그러니 부처님 가르침은 앞에 나오듯이 약과 같은데, 약을 부처님이 아무리 좋게 인삼, 녹용을 넣어가지고 지은 약이라 하더라도 안 먹으면 효과가 없다. 그렇듯이 부처님이 아무리 좋은 말씀을 하더라도 믿고 실천을 안할 것 같으면 생사해탈 하는거 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다. 하니 제도를 받는 것이 아니라 제도를 하는 자신이 수도를 안 해가지고는 제도가 안 된단 말씀이죠. 그러니 누가 너의 생사를 벗어줄 수가 있느냐. 선도에 조건이 없거니, 좋은 원인이 없거니 누가 너를 제도 하리요.

「長淪惡趣하야 苦纏身이로다」
길이 악취에 빠져서, ‘빠질
윤’字. 그 ‘윤’字는 ‘바퀴輪’字하고 마찬가지입니다. 길이 영원하게
악취로 윤회를 해 가지고 고전신이라. 고통이 늘 몸을 얽어 버릴 것이다.

「其一은 軟衣美食을 切莫受用이니다」
부드럽고 좋은 옷과 맛있는 음식을 절대로. 간절히
받아 쓰지 말지어다. 어제 施恩을 많이 져 가지고 버섯이 되어서 시은을 갚았다하는 말씀을 드렸는데 그 밖에 그런 말씀들이 많죠.

「自從耕種으로 至于口身히」
경은 밭갈경자요. 그 다음에 종은 종자를 심는다. 밭갈고 종자를 심음으로부터 自나 從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부터자. 부터종. 글자를 맞추려니까 같은 의미의 글자를 중복해 썼읍니다. 밭을 갈아서 씨앗을 뿌림으로부터. 지우구신히 입과 몸에 이르기까지 이건 먹기까지죠. 추수를 해서 먹기까지.

「非徒人牛의 功力多重이라」
다만, 한갓도는 ‘다만도’字입니다.
다만, 그러면 非徒는 非但과 마찬가지죠. 다만 무엇무엇할 뿐만 아니라할 때 쓰는, 다만 사람과 소의 힘이 많고 무거울 뿐만 아니라

「亦乃」
두글자가 또한입니다. 또한

「傍生」
사람 곁에 산다고 해서 짐승을 불교
에서는 축생이라 그러죠. 방생이라 그럽니다. 독립해서 살기도 하지만 가축등은 사람이 거두어 주어야 자라죠. 그래서 짐승을 방생이라
그럽니다. 그러니 소도 밭을 갈잖아요. 그 밖에 가축이 사람하고 같이 사니까 방생의

「損害無窮이어늘」
손해, 고생을 많이 한단 말씀이죠. 소가 밭을 갈려고 해 봐요. 얼마나 힘드는가.

「勞彼功而利我라도」
‘저공을 부려서’ 로자.
‘저 공을 부려서’ 利我라도. 나를 이롭게 하더라도

「尙不然也온」
오히려
그렇지 못하거든. 요즈음에는 농기계가 많이 개발되어서 소로 밭을 갈거나 논을 가는 것이 극히 드문데 지금부터 한 20여년 전만 하더라도 거의 소로 농사를 다 지었읍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況殺他命而活己를 奚可忍乎리요」
하물며 저목숨을 죽여서, 소를 사가지고 논을 갈고 밭을
갈고 짐을 실어 나르다가 소가 이제 나이가 많아서 기운도 없고 일을 잘 못하면 잡아 먹는단 말이죠. 여기 나오는게 바로 그 말씀입니다.
해가인호아. 어찌 가히 차마 하겠느냐? 그것은 차마 그렇게 할 수 없는 일이다.

「農夫도 每有飢寒之苦하고」
밭가는 농부도 항상 배불리 먹지 못해서 주리고 옷을 두껍게 입지 못해서 추운 고통이 있고,
지금은 우리도 살기가 좋아져서 기한은 이제 면했읍니다. 제가 중하교를 다닐 때만 하더라도(    ) 말할 수가 없었읍니다. 절에 들어 왔어도 지금처럼 어떻게 이렇게 살아요. 그러니 이 글을 쓸 때가 언제입니까? 적어도 1300년대인데 1308년 쯤 이것을 썼을 것이다.그래도 2년을 더쳐서 10년이나 하더라도. 뭐 이야기도 안되는 시절이죠. 더군다나 이 때는 원나라의 지배를 받던 시기입니다. 그러니 국민들이 사는 모습이 대단히 몹시 어려웠다.
우리가 이렇게 편안하게 사는데는 여기 나오는 대로 고통을 많이 받는 이들이 있으니까 우리가 편안하게 산다. 그러데 우리가 거기에 대한 아무생각없이 살아서 되겠느냐해서 이렇게 적고 있읍니다.

「織女도」
요즈음 織工이라 그러죠. 방직 공장에 다니는 직공들도

「連無遮身之衣은」
앞에 乃자를 같이 쓰려니까 그 모양새가 우습잖아요. 그래, 연⋅계속해서⋅ 늘, 그런 뜻이죠. 늘 차신지의 하나니 몸을 가릴만한 옷이 없나니 베를 짜서 팔거나 아니면 자기하고 관계있는 잘 사는 사람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한테 갖다 주어야 되기 때문에 베를 짜긴 짜지만 입고 싶은 옷을 만들어서 입을 형편이 못된다. 그러니까 농사 짓는 사람이 농사를 짓더라도 자기의 논이 그렇게 많지를 못했읍니다. 그러니 항상 가난에 쪼들리지요.베는 짜지만은 다른 사람한테 갖다 주어야 되니까 입을 옷이 없단 말씀이죠.
지금은 우리나라도 살기가 좋아져서 보리 고개란 그런 말조차 없어졌지만 지금부터 30년전.  5.16 군사 혁명이 나기 전에는 봄이 되면은 뭐 야단입니다. 양식이 떨어져갓고, 61년에 해인사에서 사는데 봄에 비가 많이 왔다구 보리를 베어서 깔아 놨는데 비가 계속해서오니까 애써 지은 보리에서 싹이 났읍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 온 식구가 그냥 노스님들까지 다 칼⋅작은칼⋅가위⋅또는 낫을 가져가서 그걸 잘라다가 큰방에 말려가지고 찧어먹었는데 싹이 나면 달게 되어있어요.
보리는 그래 가지고 밥을 해먹으니 그게 밥맛이 제대로 있을 턱은 없지만 그래도 어떻게 해. 다른 양식은 없으니까 그렇게 한번 지나기도 했읍니다.
그러니 여기에 나오는 것은 우리가 1310년 그 때 원나라의 압제를 받아서 아주 살기 어려웠던 시기에 절은 비록 사는 것이 괜찮았다 하지만 일반 국민들의 생활이 그렇게 어려우니 우리도 그 사람들의 공을 알고 어려움을 알고 수행을 철저하게 해야 되겠다 해서 제목도 좋은 옷 입지 말고 좋은 음식 먹지 말고 그렇게 살아야 된다 했읍니다.

「況我長遊手어니」
하물며 나는. 나는 이건 복수로 해석해야 합니다. 우리들은 스님네를 가리키죠. 황유어수니. 길이 손을 놀리거니 無爲입니다. 徒食. 그걸 유수라고 했어요. 하는 것이 없이 밥을 먹는다. 유수라는게 그겁니다. 일 안하고 밥 먹는단 말씀이죠.

「飢寒을 何厭心이라」
배가 고프고 추운 것을 어찌 마음에 싫어하리요. 飢寒에 發道心이라.
그랬읍니다. 춥고 배가 고파야만, 배가 고프고 추워야만 수도를 할 마음이 생기지 배부르고 좋은 옷 입고 편안한데 도닦을 마음이 날 리가 만무하다.해서 어려운 환경에서는 수도도 열심히 하고 도인도 많이 배출이 되었지만 경제적으로 풍부하고 여건이 좋아지면 정반대로 도인이 배출이 안되고 또 수도도 아주 등한히 하고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게 된다.
그건 역사적으로 증명이 됩니다. 삼국 시대 때부터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오기 시작해서 신라에서 완전히 자리잡혔죠. 고려에 들어와서는 고려 태조가 훈요 10조를 짓기를 무슨 일이 있어도 불교만은 받들지 않으면 안된다. 태조가 그렇게 훈요 10조에다 적어 놨단 말씀이죠. 그러니까 어느 임금이든지 불교 앞에는 까빡 죽어, 그렇게 해서 온 국민으로부터 불교가 존경과 보호를 받았는데 스님들이 잘못해 가지고 고려 전체에 나쁜 영향. 곧 국력에 큰 악영향을 끼친 예가 많습니다.
또한 지금은 우리 스님네가 너무 살기 편해가지고요. 가만히 보면은 물건도 함부로 쓰고, 여기도 보면말이죠. 비누 같은 것도 물에 녹아 가지고 말이죠. 그렇게해서 그걸 잘 건져 놓지도 않고 그게 다 돈이지 뭐 다른게 아니잖아요. 누가 사왔든지간에, 우리가 아껴 쓰면 그만큼 남는 것이고 함부로 쓸 것 같으면 그만큼 없어지게 돼있잖아요. 그게 조그만한 예인데 그게 다 감복하는 겁니다.
내 복을 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옛날 스님네는 그랬어요.(막장자의 호포척하라) 그냥 자기 마음대로 물건을 쓰고는 여기 던지고 저기 던지고 막 그렇게 하지 말아라. 用者는 물건을 쓰는 사람은 成者의 어려움. 만든 사람의 어려움도 생각를 해줘야 된다. 그런 경책의 말씀이 있는데 우리가 조금 살기 편해졌다고 물건이 흔하다고 함부로 쓰다 보면은 나중에 가가지고, 또 예기치 않게 물건이 귀해지고 또한 금생에 옷을 함부로 귀한줄 모르고 입으면 내생에는 반드시 옷 때문에 고통을 받게 되겠고, 흔한 물도 함부로 쓸 것 같으면 내생에는 물 귀한 나라에 태어나게 되죠. 지금 ( )물 귀한 나라는 농사를 못지어서 굶어 죽는 사람이 많다고 그러잖아요. 그러니 여기에서는 아껴쓰고 또 함부로 내가 배가 고프다던지 춥다고 해서 싫어하면 안되는 것이다.

「軟衣美食은 當恩重而損道요」
부드럽고 좋은 옷과 맛있는 음식은 무겁고.
그 은은 ‘施恩’ 그러십시요. 시은은 시주의 은혜지요. 시주의 은혜는 반드시 무겁고 나의 수도에는 손해가 나고.

「破衲蔬食은」
떨어진 옷하고. 납은 원래는 가사를 말합니다.
가사가 요즘처럼 베를 구입을 해서 일부러 규격대로 가위로 잘라서 만드는 것이 아니고 떨어지거나 쥐가 쏠거나 못쓰게 된 천 내버리는 것을 주어다가 세탁을 해가지고 적당히 맞추어서 입었기 때문에 그래서 납의(破衲)라 그럽니다.
가사를 그게 예가 되어가지고 요즘도 누더기를 입는 경우가 있다. 그것이 그냥 여기저기 기웠기 때문에 떨어진 옷과 소식. 채소로 만든 음식은

「必施輕而積陰이니라」
반드시 시주의 은혜를 가볍고 陰德을 쌓음이니라. 음은 음덕 그런 의미입니다. 다른 사람 몰래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 덕을 쌓는 것을 음덕이라 그럽니다.

「今生에 未明心하면」
금생에 마음을 밝히지 못하면 곧 도인이 못되면 그말씀이죠.

「滴水도 也難消니라」
방울 물도 소화시키기가 어려움이니라.
여기에 나오는 내용은, 가나제바존자가 범마정덕 장자 집에 가서 들은 말씀. 그 내용하고 같은 겁니다.

「頌曰」
위에 나오는 내용을 간추려 놓은거죠.

「菜根木果慰飢膓하고」
풀뿌리 나무 열매로 주린 창자를 위로하고.
그 위자는 달랜다. 배가 되게 고프면 배가 아픕니다. 그래 창자가
끊어질 것 같다고 그러잖아요. 고픈 배를 조금 허기가 지지 않도록 하는걸 ‘위(慰)’字라 그랬죠.

「松落草衣遮色身이어다」
송락. 겨우살이. 소나무에 자라나는겨우살이를 가리킵니다.
그걸 가지고 모자에다 씌우기도 하고 요즘에는 많이 보이지 않더라구요. 송락과 풀 옷으로 마조도일스님 제자 가운데 대매산 법상스님이라고 하는이가 있었읍니다.
대매법상(大梅法常) 산에 매화가 많이 나, 매실이 많다 해서 大梅山이라 했고 거기에서 살았다 해서 대매스님이라 그랬는데 법명이 法常입니다.이 스님이 마조스님에게 갔읍니다.
“如何是佛法大意닛고”
어떤것이 불법의 요지입니까? 마조스님이 대답했읍니다.
“卽心卽佛 이니라.”
마음이 부처니라. 그 말씀을 듣더니 ‘스님, 안녕히 계십시요. 말씀 잘들었읍니다.’ 하고는 가버린단 말씀이죠. 어디로 갔는가 하면 바로 매실이 자라는 매화가 이 있는 매화산으로 갔읍니다. 그래 가지고 혼자서 여기 나오는 말씀대로 채근목과로 수도를 하면서 지냅니다.
그런데 마침 마조스님 밑에 염관제안(鹽官齊安) 스님이라고하는 스님이 있었는데, 스님들이 짚고 다니는 지팡이를 주장자라 그러죠. 그 주장자를 좋은 놈을 하나 구하기 위해서 여기저기 다니다가 우연히 갔는데 머리는 길대로 길고 옷도 풀로 역어서 입고 있고 사람은 분명히 사람인데 서로 얘기를 하다보니까, 아는게 상당해, 자기는 따라가지 못할 만큼 공부가 많이 된 사람이더라. 그래
“내가 어느 동네에 사는데 길을 잃어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리로 가려면 어디로 가면 됩니까?” 물으니 
“개울을 따라 내려가시요”
사람 사는 곳으로 시냇물은 흘러 가게되어 있으니까. 나중에 물을 따라 내려가 마조스님 회상에가서 마조스님한테 그걸 보고를 했읍니다.
문답한 얘기가 많은데 그걸 다 생략하고 한참 생각하시더니
“어느 때 어떤 스님이 와서 법문을 묻고 대답했는데 인사하고 간 후로는 종적이 묘연했는데 가만히 말하는걸 보니 그 때 그 사람이다” 그래, 염관스님한테 시켰읍니다. 네가 내일 거기를 다시 찾아가서 얘기를 하는데
“그 때는 즉심즉불이라 했지만 지금은 非心非佛이라 한다. 이렇게 해봐라.”
비심비불이니까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그래 가서 또 마조스님이 시키는대로그렇게 했읍니다.
그렇게 했더니
“마조는 비심비불 하지만 나는 즉심즉불 한다”
이렇게 하고 그 때 산중에서 사는 스님이 게송을 지었읍니다.  (一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