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불교

한국의 선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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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수집자료

대한불교조계종은 종헌(宗憲)에,

'본종은 신라 헌덕왕 5년에 조계 혜능조사의 증법손 서당지장 선사에게서 심인(心印)을 받은 도의국사를 종조로 하고, 고려의 태고보우 국사를 중흥조로하여 이하 청허와 부휴 양법맥을 계계승승(係係承承)한다'

고 정하고 있다.

현재 조계종의 법맥은 도의국사의 가지산문의 법맥을 승계하고 있다. 가지산문의 초조인 도의국사부터,

원적도의(元寂道義)-억성염거(億聖廉居)-보조체징(普照體澄)-
선각형미(先覺逈微)-무위도수(無爲道修)-혜공정열(慧空定悅)-
월산경월(月山景月)-인각자흘(麟角自屹)-보림이익(寶林爾益)-
지산혜안(智山慧安)-향수혜함(香水惠含)-원응학일(圓應學一)-
홍원도태(弘圓道泰)-구산해안(龜山海安)-진전대웅(陳田大雄)-
보각견명(普覺見明)-보감혼구(寶鑑混丘)-진정청진(眞靜淸珍)-
회엄광지(檜儼廣智)-태고보우(太古普愚)로 이어진다.
1902년 무렵 경허 스님이 직접 쓴 것으로 추정되는 <등등상속(燈燈相續)>(사진)에는 '청허휴정-편양언기-풍담의심-월담설제-환성지안-호암체정-청봉거안-율봉청고-금허법첨-용암혜언-영월봉률(永月奉律)-만화보선(萬化普善)-경허성우(鏡虛惺牛,1846~1912)'로 법맥이 밝혀져 있다. 스님은 자신을 청허휴정의 13세손, 환성지안의 7세손임을 스스로 선언했다.

경허 스님의 법제자에 대해서는, '경허성우선사 법어집간행회'가 편찬한 《경허법어》에, 수월음관(水月音觀,1855~1928), 혜월혜명(慧月慧明,1862~1937), 용성진종(龍城震鐘,1864~1940), 침운현주(枕雲玄住,?), 만공월면(滿空月面,1871~1946), 혜봉(慧峰,?~?), 한암중원(漢巖重遠, 1876~1951)으로 되어 있다. 경허 스님은 <등등상속>에서 자신의 상수제자로 혜월혜명 스님을 올려놓았다.

-출처 : 만불신문 제137호 불기2549년 8월6일자 서현욱 기자-

경허 선사 밑에서 훌륭한 제자들이 배출되어 네 분이 법을 전해 받았으니, 혜월(慧月), 만공(滿空), 침운(枕雲), 한암(漢岩) 선사입니다.

그 가운데 상수(上首) 제자인 혜월 선사의 법맥(法脈)이 운봉(雲峰) 선사로 내려와서 향곡(香谷) 선사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현재 해운정사 조실, 동화사 금당선원 조실, 조계종 기본선원 조실로 계신 진제 대선사로
불조의 법맥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 제75조 경허 성우 선사
忽聞人語無鼻孔

頓覺三千是我家

六月燕岩山下路

野人無事太平歌
홀연히 사람에게서 고삐 뚫을 구멍 없다는 말을 듣고

문득 깨닫고 보니 삼천대천 세계가 다 나의 집일세.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

들사람 일이 없어 태평가를 부르네.
付 慧月慧明

了知一切法
自性無所有
如是解法性
卽見盧舍那
依世諦倒提唱
無文印靑山脚
一關以相塗糊

水虎中春下澣日
萬化門人 鏡虛說
혜월 혜명에게 부치노니,

일체법을 요달해 알 것 같으면
자성에는 있는 바가 없음이로다.
이와 같이 법의 성품을 깨쳐 알 것 같으면
곧 노사나 부처님을 보리라.
세상법을 의지해서 그릇되게 불법을 제창하였고
문장과 도장이 없는 도리에 청산을 새겼으며
고정된 진리의 상에다 풀을 발라 버림이로다.

임인년 중간 봄 그믐일에
만화 문인 경허 설함.
▲ 제76조
▲ 혜월 혜명 선사
▲ 경허 선사께서 혜월 선사에게
▲ 법을 전하는 증서(전법게)
付 雲峰性粹

一切有爲法
本無眞實相
於相若無相
卽名爲見性

世尊應化二九五一年 四月
鏡虛門人 慧月說
운봉 성수에게 부치노니,

일체의 함이 있는 법은
본래 진실한 상이 아님이라.
저 상에 만약 상을 여의면
곧 견성이라 이름 함이로다.

세존 응화 2951년 4월
경허 문인 혜월 설함.
▲ 제77조
▲ 운봉 성수 선사
▲ 혜월 선사께서 운봉 선사에게
▲ 법을 전하는 증서(전법게)
付 香谷蕙林丈室

西來無文印
無傳亦無受
若離無傳受
烏兎不同行

향곡 혜림 장실에게 부치노니,

서쪽에서 온 문자와 흔적이 없는 진리는
전할 수도 없고 또한 받을 수도 없나니,
만약 전하고 받음이 없는 그 자체를 여읠 것 같으면
까마귀와 토끼는 동행하지 못함이로다.

世尊應化 二九六七年 八月 日 ........세존 응화 2967년 8월
慧月門人 雲峰說 ..혜월 ................혜월 문인 운봉 설함.
▲ 제78조
▲ 향곡 혜림 선사
▲ 운봉 선사께서 향곡 선사에게
▲ 법을 전하는 증서(전법게)
付 眞際法遠丈室

佛祖大活句
無傳亦無受
今付活句時
收放任自在

진제 법원 장실에게 부치노니,

부처님과 조사의 큰 산 진리는
전할 수도 없고 또한 받을 수도 없나니
이제 산 진리를 부치는 때에
거두고 놓는 것을 그대에게 맡김이로다.

世尊應化二九九三年八月十日 ......세존응화 2993년 8월 10일
雲峰門人 香谷說 ...... ...... ...... ..운봉 문인 향곡 설함.
▲ 제79조
▲ 진제 법원 선사
▲ 향곡 선사께서 진제 선사에게
▲ 법을 전하는 증서(전법게)
경허 선사로부터 혜월-운봉 선사로 전해 내려오던 등등상속의 임제정맥의 법맥이 향곡-진제 선사로 이어지는
전법(傳法)의 기연은 다음과 같습니다.
향곡 혜림(香谷蕙林 : 1912~1978) 스님은 16세에 내원사로 출가하여, 그 곳에서 조실(祖室)이신 운봉(雲峰) 선사의 법문을 접하고
도무지 그 뜻을 알 수가 없어서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에 한시도 의심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과를 마치면 밤잠을 물리치고 정진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늦가을 어느 날 정진하던 중에 갑자기 산골짝 돌풍이 몰아쳐서 문짝을 때리는 소리에 홀연히 마음의 눈이 열렸습니다.

그 때가 아직 사미계도 받지 않은 행자시절이었는데, 행자(行者)는 곧장 조실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행자의 거동이 사뭇 다르므로, 운봉 선사께서 간파(看破)하시고 대뜸 목침을 가리키시며,

"한 마디 일러라!"
하시니, 행자는 즉시 발로 목침을 차버렸습니다.
"다시 한번 일러라!"
"천마디 만마디가 모두 꿈 속에서 꿈을 설(說)한 것이니, 모든 불조(佛祖)께서 나를 속이신 것입니다."

이에 운봉 선사께서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이 때부터 혜림 스님은 줄곧 운봉 선사를 시봉(侍奉)하면서 탁마(琢磨)받으며
정진하셨습니다.

운봉 선사께서는 1944년, 열반에 드시기 전에 혜림 스님에게 향곡(香谷)이라는 법호와 전법게(傳法偈)를 내려서
임제정맥(臨濟正脈)을 부촉하셨습니다.

지금부터 50여 년 전 정해년(1947년) 당시에 문경 봉암사에서 ‘종전에 안 것은 다 덮어두고 대오견성을 하기 위해
용맹정진을 하자’고 해서 향곡, 성철, 청담, 자운, 월산, 혜암, 법전스님을 비롯하여 전국에서 발심한 납자들이 20여 분
모여들어 정진에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성철 선사께서 향곡 선사께 말씀하시기를,

“‘죽은 사람을 죽여 다하여야 바야흐로 산 사람을 봄이요, 산 사람을 살려 다하여야 바야흐로 죽은 사람을 본다’ 하는
옛 도인의 법문이 있는데 이 무슨 뜻이냐?”

하니 향곡 선사께서 답을 못하셨습니다.

그래서 향곡 선사께서 그 화두를 들고 여름 석 달 동안 오매불망 정진을 거듭했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정진을 했던지
하루는 폭우가 쏟아졌는데 탑 난간에 기대어 폭우가 쏟아지는 줄도 모르고 화두일념에 푹 빠져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삼칠일 동안을 화두일념삼매에 푹 빠져 자기의 몸뚱이까지도 다 잊어버렸다가, 하루는 도량을 걷는 중에 당신 손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활연대오(豁然大悟)를 하셨습니다.

오도송을 읊으시기를,

忽見兩手全體活 홀연히 두 손 보고 전체가 드러나니

三世諸佛眼中花 과거, 현재, 미래 모든 부처님이 눈 가운데 꽃이로다.

千經萬論是何物 일천 경과 만 가지 논문이 이 무슨 물건인고

從此佛祖總喪身 부처님과 모든 도인이 이를 좇아 생명을 잃는다.


이렇게 오도송을 읊은 후에 즉시 성철 선사를 찾아가서,

"'죽은 사람을 죽여 다하여야 산 사람을 보고, 죽은 사람을 살려 다하여야 비로소 죽은 사람을 볼 것이다.'하는 법문의 뜻을
네가 물었으니 한 번 일러 보아라!”

하고 향곡 선사께서 성철 선사께 물으니 성철 선사께서 우물쭈물 답을 못하셨습니다. 그래서 멱살을 잡고 절 대문 밖으로
성철 선사를 끌어내시고는,

“이것을 답을 못하면 절 대문을 들어올 수 없다.”

이렇게 명을 내리시고는 대문을 닫아버리셨습니다.

그때가 두 분이 서른 여섯 살 때였습니다. 20대부터 절친한 십 년 도반의 서릿발 같은 명을 순수히 받아들이고는 며칠간
먹고 자는 것도 다 잊어버리고 밤낮으로 이 화두와 씨름해서 일념삼매가 지속이 되어 화두가 타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밤중에 돌멩이를 가지고 절 대문을 치니 온 산이 쩡쩡 울렸습니다. 절 대중들이 공비가 내려온 줄 알고 다 일어났는데
향곡 선사께서 절 대문에 이르러 말씀하시기를,

“일러라!”

하니 성철선사께서 척 답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대문을 열어 주고는 두 분이서 춤을 추시며 좋아하셨습니다.

지금은 두 분 다 고인(故人)이 되셨지만 한국 선종사의 안목에 위대한 진일보를 나투신 그러한 위대한 대선사이셨습니다.

향곡 선사께서는 이로부터 천하 노화상(老和尙)들의 공안(公案) 법문에 속지 않고 걸림없이 임의자재(任意自在)로
대사자후(大獅子吼)를 하셨습니다.

-2002년 국제무차선대법회 법문 중 발췌-

이렇게 봉암사에서 향상(向上)의 진리를 깨치신 후 제방 선지식들을 두루 참방하여 거량(擧揚)하시니,
비로소 불조(佛祖)의 정문정안(頂門正眼)이 만천하에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한국 선종사에 향상일로(向上一路)의 정안(正眼)의 장(場)이 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선사의 세수 56세이던 정미년(1967년) 하안거(夏安居) 해제일에 제자 진제(眞際) 스님과 법거량이 있었습니다.

선사께서 상당(上堂)하시어 묵좌(默坐)하고 계시는데 진제 스님이 나와 여쭈었습니다.
"불조(佛祖)께서 아신 곳은 여쭙지 아니하거니와, 불조께서 아시지 못한 곳을 스님께서 일러 주십시오."
"구구는 팔십일이니라."
"그것은 불조께서 다 아신 곳입니다."
"육육은 삼십육이니라."

이에 진제 스님이 예배드리고 물러가니, 선사께서는 아무 말 없이 법상에서 내려오셨습니다.
다음날 진제 스님이 다시 여쭙기를,
"불안(佛眼)과 혜안(慧眼)은 여쭙지 아니하거니와 어떤 것이 납승(衲僧)의 안목입니까?"
하니, 향곡 선사께서 답하셨습니다.
"비구니 노릇은 원래 여자가 하는 것이니라."
그러자 진제 스님이,
"오늘에야 비로소 큰스님을 친견하였습니다."
하니, 향곡 선사께서 물으셨습니다.
"네가 어느 곳에서 나를 보았느냐?"
이에 진제 스님이
"관(關)."(관 : 대문 잠그는 빗장)
이라고 답을 하자 향곡 선사께서는
"옳고, 옳다."
하시며 인가하시고 전법게를 내리셨습니다.

여기에서 향곡 선사께서 진제 선사에게 전법게(傳法偈)를 내리시며 임제정맥(臨濟正脈)을 부촉하시니,
태고 보우 선사의 22세 손(孫)이며 불조정전(佛祖正傳) 제79조(祖)로서 오늘에까지 당당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출처 : http://www.seon.or.kr/ 부산 해운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