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사

조선 배불정책 속에서 승단의 변화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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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라마제공

조선 배불정책 속에서 승단의 변화 고찰

아라마

1. 머리말

 

2. 조선시대 불교 정책

1) 조선전기 숭유억불정책

2) 조선후기 불교탄압운동

3) 불교의 쇠퇴

 

3. 민중불교의 개화

 

5. 맺음말

 

 

1. 머리말

 

불교는 한반도에 전해진 이래로 삼국시대 통일신라, 고려시대까지 국가통치이념으로 적극적으로 수용되어 다양한 사상적 기반들을 토대로 집권층뿐만 아니라 일반민중에게도 깊이 존숭되어 왔다.

그러나 C.E.1392 조선왕조가 들어서고 유교가 새로운 국가이념으로 자리하면서 불교는 필연적으로 쇠퇴의 역사를 걷게 된다. 불교사적으로 볼 때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귀족불교의 불교신앙이 민중 생활 속에 토착화 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여기서는 조선시대의 그러한 열악한 상황에서 불교의 모습은 실제로 어떠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변화?했는지 살펴보고 이를 거울삼아 불교의 오늘을 반성하는 기회로 삼고자 한다.

 

 

2. 조선시대 불교 쇠락

 

1) 조선전기 숭유억불정책

 

조선 5백년의 역사 속에서 불교의 모습은 연산군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 본래 숭유억불정책은 불교의 폐단을 시정하고 국가운영을 견고히 하기위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조선 초기에 비록 국가가 주관하여 승과를 시행한 것만 보더라도 처음에는 종교로써는 그 존재를 인정받고 있었다.

그러나 태종대 이르러 최초로 배불정책이 시행되어 사찰의 토지를 몰수하고, 사찰 소유의 노비를 관원으로 편입시키고, 승려들을 대규모 환속시켜 군대에 편입시켰다. 또한 출가를 허가받는 도첩제도를 엄격히 실시하여 출가를 제한하고, 왕사·국사 제도를 폐지하고 승려의 지위를 낮추었다.

세종대에는 국가적으로 시행하던 경전독경행사를 폐지하고, 사찰 전답에 따라 승려수를 제한하고, 7종을 선교양종으로 통폐합하여 화엄과 선을 제외한 모든 경전의 학습이 폐지되었다. 때문에 기존의 232개 사찰 가운데 36개 본산만이 사찰의 자격을 인정받게 되었으며, 승려의 파계문제를 이유로 도성 출입을 금하였다. 그러나 세종 말년에는 스스로 월인천강지곡을 저술할 정도로 개인적으로는 불교를 신앙했다.

이후 조선 최대의 숭불 군주인 세조대에는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법화경><영가집><반야심경> 등을 한글로 번역한 경전들과,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용비어천가를 비롯한 수많은 불교서적들이 간행되었다.

그러나 성종에 이르러서 다시 불교는 쇠퇴하게 되는데, 도성안의 비구니 사찰을 모두 폐지하고, 염불소를 폐지하고, 도첩이 없는 승려들을 모두 군인으로 환속시켰다. 기존의 도첩제까지 폐지하였기 때문에, 오직 승과제도를 통과해야만 정식 승려가 될 수 있었다.

 

 

2) 조선후기 불교탄압운동

 

그러나 연산군대에 이르러서는 가히 불교탄압운동이라 할 만큼 불교계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도성내의 사찰은 모두 폐지되고, 전답까지 몰수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승려들이 환속하였으며, 무엇보다도 승과제도까지 전면 폐지되어 승려배출이 원천봉쇄 되었다.

중종은 더욱 철저한 척불정책을 시행하여, 한양의 사찰은 모두 관공소로 활용하고, 동국여지승람에 기재된 사찰을 제외하고 모조리 폐쇄하였으며, 국가의 대규모 토목공사에 승려들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명종대 다시금 승과제도를 부활하고, 도첩을 주었으며, 봉은사와 봉선사를 선교종찰로 삼았으나 문정왕후가 죽고 난 후, 승과제도는 다시 폐지되었다.

선조대에는 임진왜란의 국난을 막은 공로로 서산대사를 중심으로 일어난 승군들과 일본으로 건너가 포로를 송환하고 전쟁을 종식시킨 사명대사 덕분에 불교의 위상을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조직화된 승려들이 고된 축성작업을 비롯하여 마비된 국가기간산업에 동참하며 국가재건에 힘을 보탰다.

승려들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억불정책이 완화된 것은 아니었으며, 인조대에 승려의 도성출입자체가 금지되었으며, 현종대에 이르러 양민의 출가까지 엄격히 금지되었다.

 

 

3) 불교의 쇠락

 

이조 500년간 지속적인 배불정책 속에서 불교의 쇠락은 세 가지 측면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사찰 신축이 금지되고, 여러 차례 통폐합을 거치면서 사찰 수는 급감하고, 사원의 전답과 재산이 국유화 되면서 사찰경제가 무너졌다. 더욱이 승역僧役의 부담이 양란이후 과중되고 변질되면서, 지방군현의 각종 잡역까지도 사찰이 담당하게 되면서 사찰전체가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

둘째, 불교의 부패를 방지하기위해 도입된 도첩제도가 이후 출가를 제한하는 수단이 되면서 출가의 문이 좁아졌다. 연산군에 이르러 승과제도까지 없어지자 무단출가자들이 속출하였고, 이후에는 범죄자, 유민들까지 불법적으로 사찰에 유입되어 승려의 사회적 지위가 급락하였다. 이후 승려의 도성출입을 금지하고, 양민의 출가가 법적으로 금지되면서 조선 초기 최고 엘리트 계층이었던 승려는 점차 고된 일을 도맡아 하는 부역집단으로 사회적 신분이 급락했다.

셋째, 오교양종五敎兩宗을 감축시켜 조계, 천태, 총남의 3종은 선종이 되고, 화엄, 자은, 중신, 시흥의 4종은 교종으로 통폐합되어 승과의 응시과목 역시 선과 화엄에 한하였다. 이에 따라 양종 이외의 경전 학습은 사실상 중단되었고, 불교는 사상적으로도 암흑기에 들어섰다.

다행히 이조500년 동안 조선의 제왕 가운데 몇몇은 개인적으로 불교를 숭앙하기도 했고, 집권층의 여인들 역시 암암리에라도 불교를 쉽게 떠나지 못했기 때문에 불교의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보우, 휴정 등의 활약 덕분에 지속적인 압박과 탄압 속에서도 법통이 끊여지지 않았다.

 

 

4. 민중불교의 개화開化

지속적인 배불정책속에서도 불교는 아녀자들 신앙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사찰을 찾는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문정왕후 이후 잠시나마 부활했던 선교양종의 승과제도가 완전히 폐지되고 도성의 사찰은 모두 폐사되자, 대부분의 승려들은 환속하여 천업에 종사하고, 신행이 돈독하고 지계가 굳은 승려들은 자취를 감추고 수행에 전념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불교는 민중들에게 눈을 돌렸고, 귀천을 가리지 않고 중생제도에 힘쓰며 민중불교가 꽃피게 된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전국에서 의승병들이 궐기한 것은 전쟁으로 인해 무너져버리는 백성들의 삶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살육이 난무하는 전쟁을 종식하기 위해 불살생의 계율을 어겨야 했던 승려들의 자발적인 희생은 백성들로 하여금 재발심의 계기가 되었다.

또한 승려들이 전쟁직후 마비된 국가사역의 대부분을 대신하면서, 백성들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왔다. 비록 반공민半公民과도 같이 양반들의 핍박은 더욱 심해졌지만, 자신들의 부역을 대신하는 승려들의 자비와 인내는 민중들의 가슴으로 전해졌다.

후대 농민수탈이 극심해지자, 불상에서 땀이 흐르거나, 눈에서 피가 흐르거나, 종이 제 스스로 소리를 내는 등 기이한 사건들이 속출하여 민중의 신심信心에 불을 지폈다. 이렇듯 암담한 현실에서 백성들이 찾은 희망은 바로 불교였다.

지배층의 탄압을 함께 받으면서도, 끝없이 인내하고 의연히 수행하는 모습만으로도 민중은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깡마른 탁발승의 초라한 모습에서 오히려 희망을 본 것이다. 점차 극락왕생의 정토사상과 암울한 세상을 뒤엎고 새로운 세상을 연다는 미륵신앙이 널리 성행하였다.

지배층의 농민 수탈이 극심해지자 사찰을 중심으로 지배세력에 항거하는 민중봉기도 전국 곳곳에서 발발했다. 탐관오리들의 횡포에서 민중의 편에 선 승려들까지 유생들은 도적 중이라고 말했지만, 당시 스님들은 억눌린 백성들에게 새 세상을 향한 끈질긴 희망과 민족자주 의식의 씨앗을 뿌려주었다.

주목할 것은 승려들의 사회적 지위가 실추되고, 유생들의 탄압이 더욱 거세졌음에도 불구하고 출가자 수는 지속적으로 증가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지배층의 어떠한 탄압도 민중들의 불교신앙을 말살할 수 없었음은 조선후기 불교를 소재로 한 많은 조형물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유생들은 필사적으로 불교를 진흙탕에 몰아넣었으나, 당시 승려들은 보살정신으로 민중들의 아픔을 어루만지며 진흙에 물들지 않는 꽃을 피워낸 것이다. 그러한 민중불교의 면면이 근대 일제강점기시대까지 이어져 왔으며, 625전란 이후 한끼 굶더라도 탁발승들만큼은 외면하지 않았던 것은 시대의 아픔을 함께한 불교에 대한 보은報恩이기도 했다.

 

 

5. 맺음말

 

삼국시대 불교는 한반도에 유입된 이래로 큰 마찰 없이 국가정치이념으로 수용되어 국가종교로 발전되었다. 그러다 고려 말 권문세족들과 합세하여 많은 스님들이 부와 권력, 안일함에 젖어 출가자 정신을 망각한 결과, 조선건국과 함께 제1척결 대상이 되었고 유학자들의 견제로 인해 지속적인 탄압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조 억불정책의 근본원인이 불교의 근본정신에서 멀어져간 승단의 안일함에 있었음을 우리는 뼈아프게 반성해야 한다. 다행히 고승들의 활약과 처처의 스님들의 보살행 덕분에 불교에 대한 사회적 시선은 달라졌고, 일제감정기와 6·25 전란이후 민중과 고락을 함께하고 승단내부의 자정의지를 통해 오늘날 한국불교는 다시금 원점으로 돌아왔다고 믿는다.

이제 시작이다. 다만 고대 삼국시대 풍부한 사상체계로 환영받았던 1700여 년 전과 달리, 지금은 종교와 사상의 홍수와 물질만능주의로 인한 차가운 시선 속에서 불교의 진정한 가치를 전하기 위한 승단전체의 수행과 노력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지난 역사를 거울삼아 오늘날 출가자들 모두가 청정수행을 견고히 하고, 시대의 눈물을 닦아주며 정토를 구현해 나가기를 간절히 두 손 모은다.

 

 

* 참고서적

> 한국불교사, 가마타시게오, 민족사, 1992

조선불교통사5, 이능화, 동국대학교출판부, 2010

한국불교전교사, 석성법, 망월사, 1998

한국불교학9, 한국불교학회, 불교학술연구소, 1995

부처, 통곡하다, 정동주, 이룸, 2003

> 17세기 승려의 국역체제 편입과정, 경북대학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박세연, 2014